<23화>
기요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새틴. 그게 가능할까?”
“해 봐야 알겠지만, 지금처럼 겁만 내고 있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낫잖아. 그리고 나는 루블리에 카 딜론이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여자애들도 걸핏하면 걔 얘기를 하는데, 실체를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나는 사사건건 나만 보면 놀려대서 짜증 나고 재수 없는데 말이야. 이번 기회에 큰코다쳤으면 좋겠네. 그럼 나도 당한 거 똑같이 돌려줄 거야.”
말을 하면 할수록 일 년간 쌓아온 서러움이 폭발했다. 새틴은 씩씩거렸다.
“알았지? 기요른? 지면 안 돼.”
“노력은 해 보겠지만…….”
“너무 불안해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너는 노력파잖아.”
게다가 기요른은 누군가 응원을 하면 그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성실함도 갖추고 있었다.
이번 학술제에서는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결과가 벌어질지도 몰라.
새틴은 내심 기원했다. 수업을 마친 빈 교육실에서 응원과 격려, 더불어 루블리에에 대한 속마음까지 터뜨린 후에 새틴은 문을 열었다.
“우리도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기요…….”
문을 당기는데, 문짝이 힘없이 딸려 나왔다.
참. 여기 문이 고장 났었지.
틈이 딱 맞물리지 않는 바람에 밖이 시끄러워지면 소리가 흘러들어와 다른 교육실보다 조금 더 수선스러운 방이었는데 깜빡 잊었다.
지금 수업이 없는 시간이라 사방이 조용했던 탓도 있었다.
새틴은 검술 시합 걱정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는 기요른을 챙겨 교육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90도로 꺾이는 모퉁이에서 어쩐지 눈에 익은 뒷모습이 일렁였다.
짙은 흑발, 큰 키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걸음걸이.
일순 흠칫했다.
에이, 설마.
옆을 쳐다보니 기요른은 여전히 깊은 고민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기색이었다. 새틴은 자신이 했던 이야기를 돌이켜보았다.
‘나는 루블리에 카 딜론이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 여자애들도 걸핏하면 걔 얘기를 하는데, 실체를 모르니까 그러는 거지. 나는 사사건건 나만 보면 놀려대서 짜증 나고 재수 없는데 말이야. 이번 기회에 큰코다쳤으면 좋겠네. 그럼 나도 당한 거 똑같이 돌려줄 거야.’
다 들었나? 들었을까? 내가 말이 좀 심하긴 했나?
갸웃했지만 새틴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걸로 죄책감을 느끼기엔, 그간 루블리에가 자신에게 한 짓들이 있었다. 그냥 그간 당한 놀림을 한꺼번에 갚아줬을 뿐이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이만하면 피장파장이다. 저한테 화가 나서 아예 말도 안 걸어주면 더 고맙겠고.
새틴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몰아냈다.
그해 학술제에서 열린 검술 시합에서 루블리에는 사정 봐주지 않고 기요른을 몰아붙였다. 꼭 누군가에게 증명하기 위한 검을 선보이는 것 같았다.
기요른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연습하고 올라갔지만 루블리에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격차가 지독하게 현격했다.
검술에 문외한인 새틴의 눈에도 두 사람의 우열이 확실했다.
루블리에에 대한 소문은 헛된 소문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지? 차기 신성 기사단의 수장이 될 재목이라는…….”
“카 딜론 가문에서 또 대단한 인물이 나왔네.”
“차이가 심하니까 보기 안쓰럽다.”
“실력 차이가 저리 현격한데 어떻게 결승전이 성사된 거야?”
“다른 학생들이 져 준 거지 뭐…….”
“하긴. 셀 위오나 델 마레에 밉보이느니 성적 좀 떨어지는 게 훨씬 낫지.”
가장 좋은 자리에서 기요른을 응원하고 있던 새틴의 귀에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스며들었다.
두 파수꾼 가문의 격돌이라 호기심을 가득 안고 모여든 무수한 관중 앞에서 기요른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무참히 탈락했다.
그해 검술 토너먼트의 우승자는 루블리에였다.
결과가 선언되자마자 두 학생은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고 퇴장했다.
한쪽은 승리자, 한쪽은 패배자였다. 관중석으로부터 승리자를 향한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새틴은 인파를 헤치고 다급히 대기실로 달려갔다.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대기실이었으나 새틴에게는 그런 제한이 없었다.
“기요른!”
문을 덜컥 열고서 새틴은 기요른을 소리쳐 불렀다.
루블리에와 기요른은 한 대기실을 같이 쓰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소속된 사용인들이 땀을 닦을 수건과 근육통을 가라앉혀줄 약을 나눠주던 중이었다. 기요른은 약을 받았고 루블리에는 받지 않았다.
새틴의 등장에 루블리에가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렸다.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루블리에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새틴은 기요른에게 다가갔다.
비록 엉망인 검술이라 해도 기요른은 최선을 다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은 땀에 푹 젖어 늘어졌고, 손목과 어깨에는 통증을 약화해주는 팩을 올려놓았다.
루블리에는 승리자로서의 명예와 함성을 받았지만 기요른에게는 새틴뿐이었다.
새틴은 사용인에게 냉찜질 팩을 받아 기요른의 어깨를 꾹꾹 눌러주었다.
기요른이 멋쩍어했다.
“미안, 내가 너무 못했지?”
“아냐, 최선을 다했잖아. 고생했어. 미안해. 나 때문에 부담스러웠지?”
새틴은 진심으로 위로했다. 루블리에가 왜 그 정도로 기요른에게 틈을 주지 않았는지 짚이는 데가 있었기에, 오히려 미안한 사람은 새틴이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상냥하게 나왔다.
이기고도 묵묵히 있던 루블리에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갔다. 새틴은 탁, 닫히는 문을 돌아보고서 뚱해졌다.
“좀 너무하다. 어차피 검술에 재능이 있는 거야 소문이 자자했으니 남들도 다 아는데, 굳이 널 이 정도로 몰아붙일 것까진 없었잖아. ……나를 싫어해도, 너하고는 친구면서. 친구의 체면을 봐서 좀 적당히 끝내주지. 정말 못됐다니까.”
“……아냐. 내가 능력이 모자랐던 탓이야, 새틴.”
기요른이 루블리에의 역성을 들었다. 그는 쓰게 웃었다.
“오히려 루브도 자기한테 걸린 기대가 있던 만큼 사람들 보는 데서 능력을 증명해야 했겠지. 새틴, 그래도 나 지금 홀가분하다? 무대 올라가기 전까지는 긴장으로 죽을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속이 다 시원해. 너무 좋다.”
기요른이 말하는 시원함이 무엇인지 새틴도 알 듯했다. 결론이야 어쨌든, 부담스럽던 검술 시합이 끝나서 새틴도 편했다.
“나도 그래. ……그렇지만 나중에 꼭 너 대신 한번 혼쭐내줄게. 두고 봐.”
작은 복수의 시간은 뜻밖에도 빠르게 찾아왔다.
학술제의 마지막은 전체 학생들이 연회 홀에 모여 성대한 파티를 했다. 성과를 전시하느라 고생했으니, 다 잊고 먹고 즐기며 노는 시간이었다.
새틴의 첫 춤 상대는 기요른이었다. 어렵지 않은 스텝이었고, 집에서 오래 배워왔기에 새틴은 사뿐사뿐 다리를 움직이며 기요른과 춤을 췄다.
검술에는 젬병인 기요른도 동작이 반복되는 춤은 그럭저럭 리드했다. 새틴은 옷자락을 살짝 들었다가 놀았다. 기요른의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도는 순간 치맛자락이 꽃잎처럼 내려앉았다.
친분을 과시하는 파트너로서 가장 의미가 깊은 첫 춤, 두 번째 춤, 세 번째 춤을 전부 기요른과 함께하고서 새틴은 눈인사를 나눴다.
“얼른 한 바퀴 돌고 이따 다시 만나.”
춤의 진행 방향을 따라 오른쪽으로 몸을 꺾으니 새로운 파트너가 나타났다.
곡이 바뀌면서 춤에서 잠시 쉴 사람은 빠지고, 다시 합류할 사람은 합류하느라 약간의 움직임이 일긴 했어도 다들 적당히 상대를 골라잡아 춤을 추었다.
새틴도 그렇게 두세 명의 파트너를 바꾸었다.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 남학생들이었지만 어차피 춤은 추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대화는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새틴은 파티를 즐겼다.
그러고서 다음 파트너의 손을 잡자마자 새틴은 팍 인상을 썼다.
루블리에였다. 끼어드는 방식이 너무 자연스러워 손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근처에 없었는데 대체 언제 나타났담? 춤 안 추는 거 아니었어?
이미 음악은 시작됐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서 새틴은 루블리에의 리드에 따라 일단 첫 스텝을 시작했다.
아름답게, 우아하게 몸을 쓸 줄 아는 새틴이었으나 루블리에와 완벽한 춤을 추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루블리에에게는 갚아줘야 할 빚도 있었다.
“새틴.”
루블리에가 입을 엶과 동시에 새틴은 기회를 보아 루블리에의 발을 콱 밟았다. 의도한 실수였다.
새틴은 재빨리 시치미를 뗐다. 루블리에는 밟힌 발을 흘끔 내려다보고는 픽, 웃었다.
남자 신발이 아무리 튼튼하고 질기다 해도 드레스를 갖춰 입느라 굽이 뾰족한 신발을 신어 약간은 아팠을 텐데 그런 티를 조금도 내지 않았다.
아, 그렇단 말이지.
핑그르르, 턴을 돌면서 새틴은 다시 한번 루블리에의 발을 밟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밟혔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여전히 태연했다.
새틴은 약이 올랐다.
아니, 진짜 안 아파?
그 뒤로 이 춤은 새틴이 발을 밟고 루블리에가 모조리 밟히며 엉망진창으로 흘러갔다.
심히 몰입한 나머지 손동작 몇 개를 까먹었어도 새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완벽한 춤은 기요른과 추었으니 괜찮았다. 지금은 설욕의 시간이었다.
클라이막스를 맞은 음악이 고조되었다. 모두들 활기차게 춤을 추는 한편으로, 이제 곧 손을 놓고 다음 파트너를 찾아 떠나갈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새틴은 남자 파트너의 발이 닿을 부분을 미리 노리고 있다가 끝까지 복수했다.
“앗…….”
그러다 균형이 살짝 어긋나면서 몸이 뒤로 쏠렸다.
넘어지겠다! 아,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후회가 들려는 찰나 루블리에가 새틴의 등을 안아 바로 세워주었다. 마치 춤의 한 자락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새틴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얼떨떨했다.
이윽고 음악이 멎었다. 학생들은 한 곡의 춤을 함께한 파트너에게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히는, 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체를 숙이는 레베랑스로 마지막 예를 갖추고서 다음 파트너를 찾아 흩어졌다.
그 시류에 탑승해 오른쪽으로 건너가다가 새틴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루블리에는 더 이상의 파트너를 찾지 않고 댄스홀에서 벗어났다.
나중에서야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을 듣고 새틴은 그의 유일한 댄스 파트너가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저를 제외한 다른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