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12)

<22화>

거기서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번에는 대낮인 데다 사방이 열린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어두운 밤이고 닫힌 침실이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앞이 새하얘졌다.

어디를 보아도 루블리에가 있었다. 눈길을 돌려도 소용없었다. 그의 눈, 코, 입, 이마를 가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 도드라진 목울대, 어깨, 팔뚝, 뼈대가 뚜렷한 손이 차례차례 새틴의 시야에 들어왔다.

존재감이 버거웠다.

그 무게를 피해 이쪽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루블리에와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다급히 눈을 내리깔려던 새틴은 문뜩 놀랐다.

어, 원래 눈이 이런 색이었나……?

짙은 빛의 홍채 안에 다소 푸른 기가 섞여 있었다. 이만큼 가까이서 들여다본 적이 없어 여태 몰랐다.

그저 검은색에 가까운 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빛깔이 오묘했다.

얼굴을 피한다는 게, 얼떨결에 깊이 들여다보다가 그만 눈빛에 이끌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눈을 감아버릴 수도 없게 되었다. 오히려 더 이상하게 보일까 봐서, 새틴은 거꾸로 눈에 힘을 주고 버텼다.

경계를 품고 루블리에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시려오는데도 한번 깜빡이지도 못했다.

잠깐 눈을 감은 그사이에 혹시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키 어려웠기에.

이미 충분히 가까웠다.

가까우니까, 여기서 더 다가오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으나 루블리에는 새틴의 기대를 배신했다.

드레스가 버석거렸다. 침대 아래로 늘어뜨린 두 다리가 루블리에의 다리 사이에 갇혔다.

새틴은 빳빳하게 굳었다.

완전히 갇혀버렸다. 어디로도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였다. 시각뿐만이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 모두가 루블리에에게 사로잡혔다.

전신이 결박당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몸을 억누르는 강압은 전혀 없는데도 눈빛에, 기세에 옭아 매였다.

숨이 가빠왔다.

루블리에가 더욱 가까이 상체를 덮어왔다. 조금 남은 간격마저도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듯이 거리를 좁혀왔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지나치게 근접하니 몽환적이던 눈동자의 색까지 아예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얼굴의 굴곡은 더욱 확실해졌다. 눈꼬리는 서늘하게 뻗었고 코는 우뚝했다. 눈썹도 선명했다. 우아하게 솟은 광대뼈와 종종 위쪽으로 기우는 입술, 탄탄한 분위기를 풍기는 턱이 그늘을 받아 더욱 뚜렷해졌다.

“그래, 세 달 후의 우리가 어떨지 당장은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결혼했잖아.”

루블리에가 속삭였다.

“우리 결혼했다고, 새틴.”

그야…… 결혼은 했다. 결혼하기는 했지만…….

덫에 걸린 사냥감의 심정이 저와 비슷할까. 숨이 죄어왔다. 아뜩했다. 어질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에게 닿고 싶고 만지고 싶어. 남편이 부인을 바라는 게, 내가 내 부인을 원하는 게 이상한 건가? 나쁘다고 생각해?”

한결 깊어진 음성이 아찔하게 떨어졌다.

새틴은 답하지 못했다. 루블리에는 한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새틴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큼직한 손이 광대와 볼, 턱을 한꺼번에 감쌌다. 얼굴이 맞닿도록 턱을 들어 올리는 손길은 의외로 조심스러웠지만, 결과마저 조심스럽지는 않았다.

아까부터 호흡이 멎었다. 숨을 쉬면 닿을 것 같았다. 이대로 그를 제지하지 않으면 어디까지 가게 될지, 새틴은 본능으로 직감했다.

더불어 깨달았다. 자신은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한데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 볼 생각이 있다는 그의 선언, 그가 주장하는 부부로서의 책임, 이혼의 유책 배우자, 그리고 당장은 버겁기만 한 이 분위기 전부가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깜깜하기만 했다.

“너는 닥치지 않은 미래를 정해두고 벌써부터 그 미래에 맞춰 살려 하지. 이 결혼에 아무 의미를 두지 않고 잠시 머물렀다 금방 떠날 여행자처럼 굴어. 이까짓 상자 속에다 네 흔적을 가둬놓고선 말이야. 시기가 왔을 때 달랑 들고 달아나면 그만이라고 믿고 있겠지만.”

그가 나직하게 뱉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분명하게 맺혔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엄지가 새틴의 입술에 닿았다. 맞닿은 체온이 깊었다. 뜨거웠다. 엄지가 아랫입술을 따라 천천히 선을 그렸다.

전혀 그럴 턱이 없는데도 입술이 불에 덴 듯 화끈했다. 정중앙의 가장 도톰한 부분에서, 루블리에의 손가락이 입술을 살짝 당겼다.

그제야 새틴은 자신이 잇새로 그 연약한 피부를 깨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통증이 그제야 찡하게 고였다. 새틴은 미간을 찡그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새틴, 나는 능력 있는 기사야. 뒤쫓고 사로잡는 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지. 이 숨바꼭질에서 누가 이길지 내기해도 좋아.”

입술에 남은 잇자국을 문질러 풀어주며 루블리에가 말했다.

흡사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어쩌면 경고인 것일까.

얼마나 길었는지, 혹은 얼마나 짧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새틴의 얼굴을 또렷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루블리에가 입술에서 서서히 손을 뗐다.

그의 체중으로 살짝 기울었던 침대가 다시 균형을 찾았다.

“잘 자, 새틴.”

여상스러운 인사를 남기고서 루블리에는 몸을 빙글 돌렸다.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툭. 문이 조용히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멎어 있던 호흡이 뒤늦게 터졌다. 새틴은 몸을 일으켰다. 숨을 몰아쉬었다.

새로운 공기가 깊이 밀려 들어오면서 현기증이 났다. 전신에서 맥박이 쿵쿵 고동쳤다.

“……방금, 무슨…….”

너무도 얼떨떨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새틴은 손으로 입술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그의 손이 어루만졌던 부분에 여전히 온도가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일까, 입술이 지나치게 뜨거운 것도 같았고, 손이 지나치게 차가운 것도 같았다.

기분이 더없이 묘했다.

잘 자라고?

이래 놓고, 잘 자라고?

“우린, 이런 관계 아니었잖아……?”

상대를 잃어버린 혼잣말이 허공에 메아리쳤다.

우리가 어떤 사이였더라.

새틴은 잊고 살려 했던 기억을 헤아렸다. 워낙 오랜만이라 잠시 가물가물했던 과거는 금방 색을 입고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열두 살. 겨울의 학술제를 앞두고 기요른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그토록 해쓱해진 기요른을 새틴은 처음 보았다.

항상 온화하고 부드럽고 웃고 있던 그가 초조하고 겁이 나서 종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학술제의 수업 발표는 학업 성취를 전시하는 발표라 각자 맡은 부분을 하면 그만이지만, 일부 체력 수업은 성적이 전시됐다.

특히 제일 유명한 검술 시합은 일대일 토너먼트였다. 관객들 앞에서 객관적인 실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이다.

“새틴, 나 어떡하지? ……내가 최종전이라니. 어떡하면 좋아?”

전형적인 책상물림 스타일인 기요른은 검을 아카데미에 입학하고서 처음 잡았다.

이제 겨우 딱 일 년 배워가는 중이었다. 원체 좋아하지 않는 수업이라 실력 향상이 빠르지도 않았다.

하물며 상대는 다섯 살에 검을 쥐고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는 루블리에였다.

기요른이 덜덜 떨 만했다. 이건 새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검술 시합을 앞두고 새틴은 기요른에게 초반에 떨어지라고 조언했었다.

머리 아픈 시합에서 일찍 떨어지고, 학술제의 남은 행사나 구경 다니자고.

어차피 아카데미 내의 동급생들 중에는 기요른보다 실력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기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검술엔 더 뛰어났을 것이다. 한데 셀 위오의 ‘셀’이 문제였다.

파수꾼 가문임을 증명하는 중간 이름을 갖지 못한 학생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기요른의 어설픈 가검 앞에 몸을 내던졌다.

찔려주고, 깔려주고, 얻어맞아 주고서 항복을 선언했다.

한쪽에서는 루블리에가 본 실력을 발휘해 착착 올라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요른이 가문의 명성을 등에 업고 강제 진출 당하고 있었으니 결국 가장 꼭대기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내걸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파수꾼 가문끼리의 시합이었다.

새틴도 머리가 다 아파 왔다.

기요른은 새틴처럼 루블리에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도리어 특유의 유순한 성품으로 새틴과 루블리에의 관계를 중재하다가 둘은 친구가 되어버렸다.

친구였으니 누구보다 기요른이 제일 잘 알았다. 본 실력대로 부딪히면 학술제의 무대 위에서 기요른은 엄청난 망신을 당할 터였다.

원래대로라면 기요른은 토너먼트의 첫 회차에서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

새틴은 터무니없는 가정을 내놓았다. 진짜로 기요른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단짝 친구이자 미래의 남편인 기요른이 루블리에 상대로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 마뜩잖기도 했다.

새틴은 기요른을 격려했다.

“그 애, 너랑 친구잖아. 나랑은 사이가 나빠도. 걔도 머리라는 게 있으면 친구 사이에 심하게 굴지는 않을 거고, 적당히 맞춰주다가 이기는 쪽으로 가겠지. 오히려 실수를 저지를지도 몰라. 원래 방심하는 쪽이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잖아? 그럼 너도 빈틈을 잘 노려봐. 어쩌면 네가 이길 수도 있겠다.”

새틴 스스로도 기요른의 승리는 불가능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말을 하다 보니 일견 그럴싸하게 들렸다. 가능할지도 몰랐다.

루블리에도 사람이다. 그의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면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또래들 사이에서 저는 검을 발로 잡아도 이기겠다, 자신만만하게 굴 게 분명하고 기요른은 그가 대충 부딪쳐주는 검을 받아내다가 회심의 일격 한 방만 날리면 되니까.

그럼 루블리에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주는 격이 되어 저도 좋고 셀 위오 가에서도 카 딜론을 이겼으니 기뻐할 테고, 여러모로 행복한 결말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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