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루블리에는 느긋하게 앉아 시선을 던졌다.
기척이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이내 스르르르 멀어졌다. 유령도 아니면서 발걸음 소리가 없었다. 심히 놀라운 재주였다.
루블리에는 입가를 당겼다. 그가 슬쩍 새틴의 방어를 도발로 받아친 이후, 새틴은 집에서 루블리에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장기 출장을 다녀온 보상으로 루블리에는 사흘간의 휴가를 받아왔다. 물론 신혼부부를 위한 휴가로는 턱없이 짧은 편이다. 하지만 일개 기사도 아니고 팔라딘이 오랫동안 기사단을 비울 순 없는 일이다.
설마 사흘 동안 집에서 한 번도 안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새틴은 아침 식사에 늦잠을 잤다는 핑계로 안 나타났다. 물론 루블리에는 아카데미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새틴이 늦잠을 잘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교를 믿고 법황이 다스리는 나라인 만큼 아침마다 모든 학생이 교당에서 기도를 올려야 했던 까닭이다.
아마도 생각이 몹시 많아진 모양이다.
하루 종일 수프와 과일로 때울 작정이 아니라면 점심 식사 시간에는 방에서 나오겠지.
루블리에는 마음을 조급하게 먹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 * *
“마님, 식사하셔야죠.”
라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게…….”
새틴은 긴 숨을 내쉬었다.
잠시간 망설이다가 새틴은 몸을 일으켰다. 식사 자리까지 피했다가는 아무래도 제 의도가 뻔히 읽힐 듯했다.
마냥 도망만 다니다 루블리에의 말마따나 자신이 유책 배우자로 지목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것만은 절대 사양이었다.
밥만 먹고 후딱 일어나야지.
다짐하고서 새틴은 식당으로 걸어갔다.
뭐, 이미 루블리에가 도착해 있을 테니 맞은편 자리에서 차분한 척 식사하고 나오면 그만이다.
어떤 얼굴로 루블리에를 대면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웅얼웅얼 연습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루블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틴.”
새틴은 복도 중간에 우뚝 멈춰 섰다.
“어디 가?”
태연자약한 물음이었다.
머릿속에 갑자기 제동이 걸렸다. 입이 고장 나면서, 의도치 않은 헛소리가 나왔다.
“……요, 욕실이요.”
자신도 모르게 식당 앞에서 욕실을 찾았다. 새틴은 다급하게 변명을 둘러댔다.
“늦잠을 잤더니 잠이 안 깨서 목욕이나 하려고요.”
답하고도 새틴은 벙해졌다.
아아, 망했다. 나 뭐라는 거니?
루블리에가 한참 작은 새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욕실은 저쪽인데?”
“아. 헷갈렸어요.”
새틴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가 없었다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을 것이다. 제 입이지만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다. 이걸 말이라고 하고 있다니, 정말 바보래도 할 말이 없다.
“세 달을 산 집인데 아직도 헷갈려?”
새틴은 자포자기해서 반응했다.
“그런가 봐요.”
슥, 올라가는 루블리에의 입매를 새틴은 못 본 척했다.
“알았으니 들어와. 식사부터 하자.”
제 등 뒤에 서서 재촉하는 루블리에를 곁눈질하며 새틴은 혼잣말로 조용히 불평했다.
“……아니, 기사단 출근은 왜 안 해?”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새틴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루블리에의 눈길을 무시하면서 음식을 푹푹 떴다.
무얼 먹든 맛이 잘 안 느껴졌다.
접시만 대충 비우고 일어서야지.
새틴은 시선을 딱 접시에만 고정하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강대강 고기를 썰고, 대강대강 스테이크에 곁들인 가니쉬도 떠먹고, 시원한 과일로 입가심을 하려던 참이었다.
“새틴.”
“네.”
“나 휴가야.”
“네.”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새틴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네?”
루블리에는 반복했다.
“나 휴가라고.”
“왜요?”
속마음이 고스란히 튀어나왔다. 너무도 솔직한 태도에 루블리에는 실소했다.
“그러게. 왜일까? 왜라고 생각해?”
신혼이라고 법황청에서 배려를 해 준 거겠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붙어 있으라고.
보통의 신혼부부는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하다고 하니까.
그러나 새틴에게는 딱히 반갑지 않은 배려였다. 눈만 마주쳐도 불꽃이 튀는 신혼이기는커녕 남은 삼 개월이 빨리 지나가라고 빌고 있는 마당이었다.
“……먼저 일어날게요.”
새틴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루블리에가 없던 집에서 자유롭게 지내다가,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맞닥뜨릴 상상을 하니 아뜩함이 몰려왔다. 그냥 저도 휴가를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갈 데가 없었다. 친정을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부모님은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야단을 할 테고, 사람들을 만나자니 아직은 스캔들이 시끄러울 듯했다.
기요른과 딜라일라가 일으켰던 소문은 난장판으로 끝난 결혼식 때문에 오히려 더 크게 번지지 않고 소거되었을 것이다.
스캔들끼리 부딪치면 결국은 더 권력이 높고 이름난 사람의 스캔들이 오래 살아남게 마련이니까.
그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사람을 끊으니 새틴도 요즘 바깥 사정에 귀가 어두워졌다. 잠깐 기요른과 딜라일라를 되새기다가 새틴은 뚱하게 튕겨버렸다.
“뭐,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자신의 스캔들이야 결혼식을 그나마 수습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을 뿐이고, 실제로 결투까지 벌여가며 세기의 사랑을 증명했던 쪽은 그들이 아닌가.
검술에 자신 없어 하던 기요른이 딜라일라를 빼내겠다고 검까지 들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배운 검술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혹은 후원자가 셀 위오의 위력에 겁을 먹고 포기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기요른은 제 첫사랑을 위해 새틴을 내던졌다.
첫사랑. 기요른의 첫사랑은 자신이 아니었다.
새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기요른이 더 부나방처럼 달려들었을 테다. 그런 감정이 처음이어서.
놓치고 싶지 않아서.
둘을 생각하면 욱성이 치밀어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부러웠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임을 알면서도 새틴은 진심을 부정하지 못했다.
대체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뭐기에 사람을 그토록 맹인으로, 귀머거리로 만드는 걸까. 자제력을 지워버리고 충동을 일으키는 걸까.
모르겠다.
씁쓸하지만 새틴은 자신의 미래를 인정했다. 분명 저도 누군가와 다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 테지만…….
다만 사랑.
그건 아마 델 마레의 후계자로 살면서는 평생 느껴서도 안 되고, 느끼지도 못할 감정이리라.
* * *
“……이거 마음 불편해서 죽겠네.”
새틴은 베개 밑에서 상자를 꺼냈다.
델 마레의 가보를 매일 밤 머리 아래 베고 자게 될 줄 언제는 상상이나 했었을까.
너무 중요한 물건이었다. 이렇게 함부로 보관해선 안 될 칼데브란카의 역사인데, 딱히 숨겨둘 곳이 없어서 내내 베개 밑에 두고 지냈다.
어차피 새틴의 침실에 종종 출입하는 하녀는 라리뿐이고, 집을 돌보는 사용인들도 양가에서 믿음직한 사람들을 뽑아 보내왔기에 분실의 위험은 없었다.
실제로도 상자는 늘 안전히 이 자리에 있었다.
새틴은 머뭇거리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조각난 성물의 마지막 한 토막. 칼데브란카의 보물이자 상징. 이 어마어마한 의미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금고에 보관하라고 사용인들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집에서 후계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기 때문에.
금고로 들어가는 물건들의 목록은 문서로 작성되어 꼼꼼하게 관리된다. 이름이 실리는 순간, 루블리에에게도 목록은 금방 흘러 들어간다. 당연히 그는 새틴이 어떤 의미로 이 상자를 떠맡았는지 눈치챌 것이다. 그것만은 싫었다. 진짜 루블리에에게는 절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똑똑똑.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새틴은 심상히 응답했다.
“들어와.”
라리라고 생각했다. 항상 라리였기 때문이었다.
문이 열렸다.
“새틴.”
동시에 예상과 전혀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새틴은 그제야 소스라쳤다.
루블리에였다.
새틴은 다급히 상자를 닫았다. 그러나 이미 루블리에는 다 본 눈치였다.
애초에 못 보려야 못 볼 리 없는 위치였다. 루블리에도 카 딜론의 남자였다. 새틴이 그러했듯이, 그도 카 딜론에 남아 있는 가보를 보고 자랐을 게 분명했다.
일순 열이 몰리면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손을 안 대봐도 느껴졌다. 뺨이 뜨거웠다.
곧 펑 터져나간대도 믿을 정도였다.
“시, 신경 쓰지 마. 별…… 별것 아니야.”
말을 더듬대다가 무심코 반말이 튀어나왔다. 오래전의 습관이었다.
새틴이 하도 보이지 않기에, 별생각 없이 새틴의 방에 찾아왔던 루블리에는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새틴은 지금 자신이 경어를 썼는지, 반말을 썼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어린 새틴은 루블리에가 말을 놓고 장난을 걸면 아등바등 같은 반말로 받아쳤었다. 지기 싫어하는 새틴의 성격은 그때도 지금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재회했을 땐 의도적으로 경어를 쓰고 루블리에를 ‘카 딜론 경’이라고 꼬박꼬박 고쳐 불렀다. 경어와 카 딜론 경. 새틴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거리가 느껴지던 표현이었다.
루블리에는 얼핏 튀어나온 옛날의 새틴이 반가워졌다.
“델 마레의 가보인가 보군.”
루블리에가 아는 체를 해 왔다.
무얼 말해도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올 것 같지가 않다. 새틴은 발끝을 지분대면서 제 초조함을 애써 감췄다.
자신이 알기로, 루블리에는 아직 카 딜론의 가보를 물려받지 않았다. 두 집안 중 후사 문제에서 조급한 쪽은 델 마레였다.
루블리에는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더 있다고 들었다. 외동딸 하나뿐인 델 마레보다는 충분히 여유로웠다.
새틴은 혀를 깨물었다.
하필 이걸 지금 들켜선. 자존심 상하게…….
루블리에가 흥미로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구경 좀 해도 될까?”
새틴은 단박에 거절했다.
“싫어.”
“델 마레 가에 나는 이미 사위인 모양인데.”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우리는 기한부 부부일 뿐이고.”
새틴의 궁색한 해명을 루블리에가 가볍게 끊으며 끼어들었다.
“대신 그동안 부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로 협의했지.”
새틴은 침묵을 지켰다.
“추기경 예하의 설교에서도 듣지 않았나? 신랑과 신부의 서약은 당장의 감정을 넘어, 앞으로 계속해서 상대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이라고.”
루블리에가 언급한 이혼의 유책이 유령처럼 눈앞을 떠돌았다.
“그렇지만…….”
반박하고 싶어도 최대한 트집잡혀선 안 된다는 경계가 새틴의 발목을 잡았다. 반면 루블리에는 태연했다.
“시도할 생각이 있냐고 너에게 물어봤었지?”
‘……그거, 스킨십이 안 되잖아요?’
‘어디, 정말 불가능한지 한번 시도해 볼까?’
대답하지 못하고 달아났던 질문이 재차 떨어졌다. 심지어 후사의 압박이 들통난 이 상황에서.
새틴의 손에서 상자가 톡 굴러떨어졌다. 무릎에 부딪히고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루블리에는 그것을 낚아챘다.
델 마레의 가보가 루블리에의 손에 들어갔는데도 새틴은 차마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못했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덩달아 간격을 유지하기 위한 새틴이 몸을 뒤로 밀고, 밀었다. 문뜩 균형이 무너졌다. 시각이 기울었다.
그다음, 새틴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머리 근처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한쪽 팔로 새틴의 머리 근처를 짚고 긴장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가까이 내려다보면서,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확실하게 대답하지. 나는 해 볼 생각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