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112)

<20화>

새틴은 의자째로 몸을 물렸다. 묵직한 의자 다리가 바닥을 드르륵 긁었다.

“라, 라리가 방금 절 불러서요. 못 들으셨어요?”

다급히 손으로 얼굴을 감싸 막으며 새틴은 루블리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벌떡 일어났다.

이혼장의 존재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고서 그녀는 침실로 도망쳤다.

허.

……와.

뭐야?

방금 뭐야.

문을 닫자마자 새틴은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미쳤나 보다. 심장이 너무 뛰어 웅웅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어지러워 멀미가 나려고 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서 새틴은 숨을 몰아쉬었다.

‘해 볼 생각은 있고?’

루블리에의 음성이 귓가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어디, 정말 불가능한지 한번 시도해 볼까?’

나랑 해 볼 생각이 있다는 거야? ……뭐를?

“아, 나 어떡하지?”

왜 이러지? 대체 왜 이렇게 떠는 건데, 정말.

뒤늦은 억울함이 몰려왔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댄 이혼 사유를 도발로 받아쳤다. 성격대로라면 ‘할 수 있는데요?’ 하고 맞섰을 테지만 여기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는 순간 왠지 돌이키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바본가, 나. 거기서 놀라서 도망이나 치게.”

애도 아니고 너무 곧이곧대로 반응해버렸다.

더 억울한 건, 지금도 세차게 뛰는 심장이었다.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긴장을 풀면 이렇게 휩쓸리고야 만다. 꼭 파도 같았다. 느닷없이 크게 덮쳐와 몸을 훌쩍 적셔버려서 난감하게 만드는, 그런 파도.

암만 봐도 진짜 얄미운 사람이다.

얄미운 남자였다, 루블리에는.

새틴은 비틀비틀 침대로 걸어가 털썩 엎드렸다.

한참 들썩대던 심장을 수습하고서, 새틴은 자못 비장한 얼굴로 침실을 나섰다. 혼자만의 공간인 침실을 벗어나자마자 또 가슴이 바짝 조여왔다.

새틴은 살금살금 집안을 기웃거렸다. 다행스럽게도 루블리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 딜론 경은?”

갑자기 마주칠까 봐 긴장하면서 집안 곳곳을 돌았는데도 루블리에가 없었다. 새틴은 지나가는 사용인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법황청 들어가셨어요.”

“법황청?”

“네, 출장 결과 보고하신다고요.”

그러면 어제는 보고도 안 하고 바로 집으로 왔던 거였어?

어쩐지……. 막 귀환한 사람이 집에 너무 일찍 와 있다, 싶었다.

새틴은 조금 전까지 루블리에가 있었던 자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이혼장을 놓고 갔는데 그새 어디로 치운 건지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에 두었냐고 사용인을 불러서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딘가에는 있겠지. 어차피 이혼을 유예한 이상 기입한 날짜가 달라져서 그 이혼장은 쓸모없게 되었다. 삼 개월 뒤에는 새로운 이혼장을 써야 했다.

그때는 고집 피우지 않고 인장을 찍겠지?

‘대신 새틴, 너도 부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해 봐.’

또 한동안 집을 비워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는 당분간 장기 출장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부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면서 삼 개월을 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새틴은 차츰차츰 표정을 잃어갔다. 도대체 어떤 신혼 생활을 보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 * *

야단났다. 그림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데 예전의 고즈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목장의 염소들을 보아도 내면의 평화가 사라졌다. 사실 지금 심정으로선 무얼 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눈은 앞을 향해 있는데, 귀는 조만간 들려올 말 울음소리를 찾아 열려 있었다.

이러고 있은 지도 어느덧 몇 시간째였다. 그가 곧 돌아올 때가 되었다.

시간은 정말 야속하게도 흘렀다.

멀리, 곁눈으로 봐도 평범한 말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거대한 흑마가 나타났다.

저도 모르게 새틴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초조한 마음에 방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라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마님, 어지러워요.”

“……라리. 나 물 한 잔만 갖다 줘.”

“네, 마님.”

목이 탔다. 냉수 마시고 정신 차려야지.

라리가 가져다준 컵을 쥐는데 손가락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새틴은 물을 홀짝거리면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한혈마는 진짜 빨랐다.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루블리에가 집에 도착했다.

새틴은 일부러 문 쪽에 신경을 두지 않으려 했다. 자꾸 먼저 의식하고 어쩔 줄 모르면 자신만 지는 기분이라서, 최대한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있으려 했다.

“새틴.”

풉. ……콜록. 그대로 사레들리고 말았다. 입을 막고 기침을 죽이려 기를 쓰는데, 루블리에가 다가왔다.

억지로 참으려고 하니까 더 죽을 맛이었다. 눈이 다 매워 눈물이 났다.

새틴은 훌쩍거리면서 가슴을 두드렸다. 루블리에만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죄지은 것도 없이 왜 이러나 미치겠다.

“콜록, 콜, 어우…….”

“조심해.”

크고 튼튼한 손이 새틴의 등을 쓸어내렸다. 원래는 이런 걸 라리가 해줬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곁에 있던 라리가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척이 없었다.

막혔던 목이 트였다. 손이 커서 그런가. 효과가 빨랐다.

“어…… 이젠 괜찮아요.”

호흡이 가라앉았다. 새틴은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루블리에를 올려다보며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새틴의 얼굴을 본 루블리에가,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손을 가져왔다. 엄지로 새틴의 눈가를 쓸더니 눈물을 닦아냈다.

헉. 다시 숨이 확 막혀왔다. 기겁한 새틴이 얼른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문 바깥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을 훔쳐보던 라리와 눈이 마주쳤다. 라리가 배시시, 안도한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거 지금 오해한 거지? 그런 거지?

아니야. 절대 아니야! 아니거든?

바로 앞에 루블리에가 있는 탓에 라리를 불러 해명도 못 한 새틴이 세상 무너지는 한숨을 숨겼다. 기운이 죄다 빠져서 이제는 억울하지도 않았다.

루블리에가 돌아온 뒤부터 새틴은 집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를 잃어버렸다.

조금만 인기척이 들려와도 우선 방으로 숨게 됐다. 한 공간에 있기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진 탓이다. 차라리 답답하더라도 침실에 콕 박혀 있는 편이 나았다.

라리가 따라 들어왔다.

“마님.”

“왜?”

“팔라딘께서 출장 가셔서 무슨 일 있으셨대요?”

응? 루블리에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꽤 오랜 기간 집을 비웠던 사람치고는 그리 피곤한 기색도 아니었다. 기사니까 아무래도 체력이 좋은가 보지.

확실히 그런 점이 기요른하고는 달랐다. 기요른은 아카데미의 기초 체력 훈련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으니 말이다.

하여튼 루블리에는 평소와 전혀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새틴은 머리를 기웃하다가 라리에게 되물었다.

“몰라. 무슨 일이 있었대?”

“안 물어보셨어요?”

“안 물어봤어.”

“물어보셔야죠!”

라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시니까 두 분께서 서로 대화가 없으신 거잖아요.”

“대화는 원래 없었는데……?”

“마님께서 관심도 없어 보이시고요.”

“그것도 맞는데…….”

아카데미에서 오 년간 쌩하게 피해 다니거나 툭툭거렸고, 졸업하고서는 아예 생각도 없었고, 어쩌다가 결혼까지 왔지만 결혼하자마자 임무 때문에 집을 나갔고, 오래 안 봤더니 또 더 어색해졌고, 삼 개월 후에는 이혼할 거고.

도대체 어느 구석에서 루블리에와의 친분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루블리에는 너무나도 당연히 서먹한 존재였다.

뚱하기 그지없는 새틴을 바라보다가 라리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저는 마님께서 이왕 결혼하신 거 두 분이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응?”

“……저따위가 함부로 할 소린 아니지만, 기요른님이 너무 괘씸해서요.”

라리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어떻게 그분이 마님께 그러실 수가 있어요? 남자 마음 믿는 거 아니래도 저는 기요른님은 안 그러실 줄 알았어요. 두 분이 워낙 친하셨잖아요. 갓난아기 때부터 봐오셨다고 들었는데, 그런 분이 결혼식 사흘 전에 오페라 가수와 스캔들이 나고……. 다행히 일이 잘 풀려서 망정이죠. 결혼식도 수습됐고 더 좋은 가문과 인연이 닿았으니까, 저는 기요른님 보란 듯이 마님께서 아주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새틴의 속앓이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면서 라리도 내심 속앓이를 했었던 모양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새틴이 라리의 이름을 불렀다.

“라리.”

“네, 마님.”

“네 걱정은 알겠는데, 나는 카 딜론 경도 믿지 않아.”

새틴의 답에 라리가 토끼 눈을 떴다.

“예?”

“이십 년을 봐서 누구보다 기요른을 제일 잘 안다고 믿었던 나야. 그런데 여자 하나에 남자가 완전히 뒤바뀔 줄 나라고 상상이나 했겠어? 지금 기요른이 내가 알던 기요른이니? 아니잖아. 그런데 나는 카 딜론 경은 기요른보다도 몰라.”

아무리 얌전하던 사람도 사랑에 푹 빠지면 아무것도 눈에 뵈지 않는다는 걸 기요른을 통해 깨달았다. 새틴은 말을 이었다.

“오 년, 그와는 오 년간 아카데미 같이 다닌 게 전부고 거기서도 나는 기요른하고만 거의 붙어 있었어. 그런데 내가 뭘 안다고 카 딜론 경을 믿어? 그나마 기요른은 평소에 착하고 순하기라도 했지, 카 딜론 경은…… 뭐, 어쨌든.”

새틴은 깔끔하게 정리했다.

“난 이혼하면 소문 잠잠해질 때까지 시골이나 내려가서 살래. 나 은근히 시골 생활 잘 맞는 것 같더라. 너도 나랑 내려가서 양이나 키우자.”

“마님, 그러면 델 마레의 후계는 어찌하시려고요?”

“나중에 적당한 사람 물색해야지. 의무를 경시하지는 않아. 나 이래봬도 델 마레의 외동딸이잖아.”

결혼과 이혼, 두 번의 스캔들이 있었더라도 델 마레는 델 마레다. 파수꾼 가문을 동경하는 남자라면 얼마든지 차고 넘칠 것이다. 새틴은 마음먹었다.

루블리에나 기요른처럼 집안이 너무 뛰어나 제가 아쉽지 않은 사람 말고, 델 마레의 이름에 순종할 사람을 찾기로.

더 이상의 사고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인생의 파트너가 어딘가에는 반드시 있을 터였다.

“아유, 마님…….”

라리가 추욱, 기가 죽었다. 새틴은 라리를 등 떠밀어 내보냈다.

“나가서 망 좀 봐. 나 그 사람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못 살겠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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