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12)

<19화>

절로 이불을 걷어차게 만드는 반응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뭘 생각한 거냐고!

무슨 오해를 샀는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그러게 나는 안 입는다니까…….”

오래된 하녀라 라리가 제 마음을 가장 잘 안다던 믿음은 아무래도 취소해야 할 듯했다. 라리가 나빴다, 이건.

라리도 나쁘고 루블리에도 나빴다.

어쩌면 타이밍도 그리 안 맞는지 모르겠다.

하필 그 순간에 지나갈 게 뭐람. 아니, 하필 그 순간에 나올 게 뭐람.

집에는 또 언제 도착했던 건데? 어떻게 소리 소문도 없이 들어와 있지?

잘 맞는 사람과는 사사건건 다 잘 맞는데 역시 안 맞는 사람과는 사사건건 다 안 맞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항상 이 모양 이 꼴이지.

새틴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무지 뺨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비명이라도 확 터뜨리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밖에서 라리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올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베개로 입을 막고서 새틴은 탄식했다.

“아아아…….”

속이 탔다. 새틴은 벌떡 일어나 침대 옆의 협탁에 있던 냉수를 들이켰다.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있을 방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렇게 뒤척이게 만들고, 저는 속 편하게 잘 자고 있겠지.

화르르 타오르는 울화를 끌어안고서 새틴은 재차 결심했다. 결심하고,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유혹할 생각 따윈 없었다고 증명해야 했다. ‘그’ 루블리에와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으니까.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오해 사기 너무나 억울했다.

이혼할 거다.

내일 아침에, 당장 이혼장을 작성해서 인장부터 찍어 놓을 거다.

그러고 삼 개월이 되는 날 곧장 제출해야지.

결심이 바로 서니 조금 편해졌다.

새틴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 * *

다음 날 아침, 뾰로통한 얼굴로 나타난 새틴이 폭탄을 터뜨렸다.

“약속했던 3개월이 거의 다 지나갔으니까요. 우리 약속했던 대로 이혼해요.”

아침 식사의 첫술도 채 뜨기 전이었다.

루블리에는 새틴이 딱 내려놓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가장 먼저 맨 위에 적혀 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혼장.

내용은 굳이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새틴이 적절히 꾸며 작성했을 게 분명했다.

이런 데 들어가는 사유란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성격 차이. 살아보니까 성격이 잘 안 맞아서 상대에게 맞춰가기 힘드니 이혼하고 예전의 삶을 되찾겠다.

가장 무난해서 좋게 헤어지고 싶은 부부들이 선택하는 이혼 사유였다.

맨 아래에는 델 마레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새틴은 루블리에가 딱 인장만 찍으면 끝나게끔 서류를 꾸며 놓았다.

루블리에는 이혼장을 내려놓고 득의만면하게 앉아 있는 새틴을 쳐다보았다. 두 달 반이 넘는 기간의 출장을 마친 다음 날 아침, 부인으로부터 제일 먼저 받은 소식이 이혼장이었다.

윽문 턱이 일순 움찔했다. 그래도 루블리에는 새틴보다 능숙하게 감정을 감출 줄 알았다.

그는 이혼장을 잠시 덮어두었다. 그러고서 새틴의 앞까지 슥 밀어놓았다.

“식사부터 하자.”

“이 얘기부터 해요.”

새틴이 다시 이혼장의 앞장을 펼쳐 루블리에에게 밀었다. 새틴의 고집에 루블리에는 결국 이혼장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새틴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루블리에의 눈길이 이혼장을 훑는 동안에도 시간은 또박또박 흐르고 있었다. 고작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흐르지 않았는데, 침묵이 지독하게 길었다.

루블리에가 고개를 들었다. 새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기로 했던 이혼 아닌가. 기한이 정해져 있던 결혼 생활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이혼장에 루블리에만 도장을 찍으면 완벽한 이혼이 된다.

그런데.

“……동의 못 하겠는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새틴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루블리에에게는 종종 말문을 틀어막는 재주가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새틴은 잠깐 굳어 있다가 반문했다.

“뭐라고요?”

반면 루블리에는 여유로웠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새틴에게로 이혼장을 되돌려보냈다.

“이런 이혼에는 동의 못 하지.”

“아니, 우리 이혼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언제?”

“출장 전에요!”

욱한 새틴이 뾰조록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동의하지는 않았어. 일단 알겠다고 했지.”

……그, 그랬었나?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랬던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데, 한참 전에 지나간 일이라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새틴도 얌전히 물러나진 않았다. 사람을 약 올려놓고 루블리에는 혼자 침착했다. 그 태도에 빈정 상해서라도 이대로 꼬리를 말 순 없는 일이다.

새틴은 이혼장의 서명란을 짚으려 몸을 테이블 가까이 기울였다. 이혼장만 의식한 탓에, 맞은편에 앉은 루블리에와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루블리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를 알지 못한 채로 새틴은 그를 독촉했다.

“여기.”

손끝이 비워 둔 서명란을 지목했다.

“우리 평화롭게 인장 찍죠?”

“누구 마음대로?”

“아, 좀!”

울컥한 나머지 옛날 버릇이 나왔다.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지 말고, 표정을 숨기라는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감정이 이겼다.

아니지, 여기서 이러면 안 돼.

새틴은 짜증을 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흥분하면 루블리에에게 휘말리는 꼴만 될 뿐이다.

이성을 찾아야 했다. 침착함을 유지해야 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이미 동의했던 이혼에 루블리에가 어깃장을 놓는지 그 이유부터 아는 게 우선이었다.

“왜요?”

새틴의 물음에 루블리에도 질문으로 응했다.

“이혼이 누구 유책인데?”

여태 이혼장을 읽어놓고도 딴소리다. 새틴은 참을성을 끌어모았다.

“반반으로 작성했어요. 딱히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요. 성격 차이가 그렇잖아요? 안 맞아서 못 살겠다는데…….”

“그러니까 내가 인정을 못 하지.”

“아니, 그러면 제가 유책 배우자예요?”

새틴은 황당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조용히 이혼하고 싶은 사람들이 괜히 성격 차이를 들먹이는 게 아니다.

유책 배우자로 지목되면 당사자는 상대에게 그만큼 센 위자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것도 잘살면 잘살수록 집안 재산을 비율로 나눈다.

새틴은 델 마레의 유일한 상속자였다. 서로 책임이 없는 성격 차이여야만 이 결혼에 든 비용을 상쇄하고 헤어질 수 있는데, 말이 어긋나면 본가의 재산까지도 손을 대게 된다.

안 그래도 부모님이 이 결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마당이었다. 이혼 분쟁은 안 될 소리였다.

루블리에가 반격했다.

“이혼까지 왜 3개월의 숙려 기간이 있는지 알아?”

새틴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계속해서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석 달 동안 잘 살게끔 노력해보라고. 그런데 우린 노력한 거 없잖아. 이 와중에 네가 이혼을 요구하면 우리 둘 중에선 네가 유책 배우자가 되는 거지.”

새틴은 머리를 기웃 꺾었다.

“어차피 하기로 한 이혼이고, 서로 잘못한 게 없으니 반반 가면 쉽고 좋잖아요.”

이 남자가 남의 집 재산 털어먹으려고 이러나. 카 딜론의 재산이 델 마레보다 넉넉하면 넉넉했지, 결코 모자랄 리 없는데도 말이다.

새틴의 반박에 루블리에가 입매를 슬그머니 늘였다. 그의 미소에 새틴은 더욱 불안해졌다.

“우리는 성격 차이를 이유로 못 대. 안 살아봤으니까.”

“무슨…….”

“난 세 달 가까이 장기 출장을 다녀왔어. 법황청에 신고된 출장이니까 법황 성하께서도 아시지. 음, 오히려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이 법황 성하의 일을 대리 수행하느라 3개월 만에 부인에게서 이혼당했다고 하면 승인은커녕 성하께서 친히 중재하실지도 모르겠군.”

그야말로 소름 돋는 예측이었다. 이혼 하나에 법황까지 관여하다니. 부모님을 감당하기도 벅찬데 법황까지 등장하면 이건 무조건 지는 싸움이 된다.

이래서 너무 잘난 남자와 결혼하면 머리가 아픈 것이다. 그 위로 줄줄이 딸린 고위 성직자들이 많아서.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루블리에가 법황까지 들먹이는데 반박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한발 물러서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다시 유예해. 3개월 더. 같이 살아보고 아니면 깔끔하게 갈라서자.”

“……그래요, 그렇게 해요.”

뭐, 3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3개월이다.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대신 새틴, 너도 부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해 봐.”

부인으로서의 어떤 책임을 말하는 거지?

루블리에의 의중을 궁리하느라 머리가 바빠졌다. 새틴은 입을 다물었다. 루블리에가 재우쳤다.

“싫으면 이혼의 유책 사유는 델 마레 가에 있는 것 아니겠어?”

“알았어요.”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려던 찰나, 새틴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가는 깨달음이 하나 있었다. 가만 보니 확실한 이혼 사유가 있지 않은가.

‘부부 사이에 이것만큼 빨리 정드는 방법도 없어요.’

새틴은 손을 들고 흔들었다.

“잠깐만요. 우리, 이혼 사유가 있는데요?”

“뭔데?”

“우리는.”

이 말을 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새틴은 잠깐 숨을 참았다.

“……그거, 스킨십이 안 되잖아요?”

손을 잡고 상대를 응시하고, 입을 맞추는 그런 것. 그리고 그 이상의 것.

새틴의 답을 들은 루블리에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해 볼 생각은 있고?”

“네?”

“어디, 정말 불가능한지 한번 시도해 볼까?”

무슨, 무슨 얘기야, 이게? 왜 결론이 그렇게 돼?

대번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이혼을 못 하겠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느낀 당혹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생각이 완전히 멎어버렸다. 새틴은 기함하며 얼어붙었다.

루블리에는 느긋한 시선을 던지며 기대어 앉아 있던 등을 일으켜 세웠다.

“이제부터 알 수 있겠지. 우리가 과연 스킨십이 가능한지, 아닌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루블리에의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가운데 놓여 있던 테이블은 그에게 아무런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새틴은 제 얼굴을 가득 담고 있는 루블리에의 짙은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밝은 아침이라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함께 스며 있어, 제 놀란 표정이 훨씬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얼어붙은 새틴과 달리 루블리에에게는 주저함이 없었다.

눈 한번 깜빡할 새에 그는 손가락 한 마디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가까운지도 몰랐다.

어, 하는 사이에 서로의 코끝이 살짝 스쳤다. 문뜩 생소한 감각이 새틴을 후려쳤다.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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