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캐내려 찾아다닌 바도 있었다.
루블리에는 다시금 죽은 새들을 지켜보았다. 악령이 다녀갔다는 그 기분을 이제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런 것인가. 새의 떼죽음을 두고 엄청나게 커다란 재앙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어렵다.
하지만 분명 마음 한구석을 껄끄럽게 만드는 불안감이 존재했다. 일상에서 마주치기에는 아주 드문 섬뜩함이다. 불길했다.
“근처의 주교구에 알릴까요?”
부관이 허락을 구했다.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됐어. 잠시 말에서 내려 이곳을 정리하고 떠난다.”
루블리에가 명령했다. 지시를 받은 신성 기사단이 구덩이를 파고 새의 사체를 수습해 매몰했다.
두 발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벌써 도착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황이 있는 수도에.
그리고 새틴이 있는 신혼집에.
루블리에는 말머리를 돌렸다.
* * *
“마님, 마님!”
라리가 새틴을 찾으며 달려 들어왔다.
새틴은 창가에 앉아 목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 한가로운 일상이었다.
스캔들이 잠잠해질 날까지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하려다 보니 새틴이 하는 일이라곤 주변 산책이나 집에서의 소일거리가 전부였다.
해 질 녘의 하늘이나 풀을 뜯는 염소, 고요하고 잔잔한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그토록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매일이 신기할 정도로 잔잔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라리의 호들갑을 들으니 신선했다.
새틴은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성벽의 깃발이 올랐대요. 신성 기사단의 귀환을 알리는 깃발이요!”
“뭐?”
큰일 났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솔직히 ‘벌써?’라고 묻기엔 루블리에의 부재가 예상보다 길긴 했다. 일찍 돌아오겠다던 사람이 본래 예상했던 기간인 두 달 반을 넘겼으니 말이다.
“이럴 게 아니라 귀환을 축하해드려야죠.”
루블리에의 급작스러운 귀환에 새틴은 그저 어리벙벙하기만 한데, 사용인들이 나서서 법석이었다. 새틴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아니, 물론 루블리에도 맡았던 임무를 끝내면 집에 돌아오는 게 당연한데, 당연하지만……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나 아직 그를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새틴은 꽁꽁 얼어붙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몰라도 새틴을 오래 돌봐 온 라리는 새틴의 긴장을 금방 눈치챘다.
“마님, 긴장 풀리게 목욕물 좀 받아드릴게요.”
오래된 하녀는 이런 점에서 좋았다. 말하지 않아도 주인의 기분을 바로 알아차리고 돌봐준다.
“……응.”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 라리가 사용인들을 몇 불러 무어라 이야기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에 다시 주방이 분주해졌다. 잠시 후 사용인들이 뜨거운 물을 욕실로 날랐다.
“마님, 준비 다 됐어요. 오세요.”
라리가 손짓했다. 새틴은 터벅터벅 라리를 쫓아갔다.
“이게 뭐야?”
“산양유예요. 피부에 좋아요.”
따뜻한 물 속에 늘어지듯 잠겨 있던 새틴은 라리가 어깨와 등허리에 웬 우유를 가져다 붓자 깜짝 놀라 허리를 세웠다.
욕실에 고소한 우유 냄새가 가득 차올랐다. 라리가 부연했다.
“여기는 목장이 가까워서 우유 질이 좋다더니,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래?”
우유를 먹지 않으니 맛이 있는지 없는지 별 관심이 없었다. 새틴은 다시 욕조의 끄트머리에 팔을 괴고 얼굴을 얹었다.
몸을 부드럽게 문질러 주는 라리의 손길이 기분 좋아서 조금씩 잠이 오려 했다.
라리는 새틴의 머리를 마사지하고 머리카락이 엉키지 않게 수십 번을 반복해서 빗었다.
어느 순간 잠깐 잠들었다가 눈을 뜬 새틴은 유독 반드르르하게 변해 있는 제 피부를 발견했다.
“어차피 곧 주무실 테니 옷은 가벼운 걸로 입혀드릴게요.”
“응.”
그런데 라리가 가져온 옷은 가벼워도 지나치게 가벼웠다. 새틴은 어이가 없어서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조금이라도 세게 잡으면 찢길까 겁이 나 손가락 끝으로 살살 잡았다. 힘이 없는 천은 몸을 따라 축 달라붙었다.
“이게 천이야, 베일이야?”
집에 이런 슬립이 있었는지도 처음 알았다. 새틴은 얼굴을 찌푸렸다. 라리가 재빨리 새틴의 어깨에 얇은 가운을 걸쳐주었다.
“겉에 가운을 입으시면 되죠.”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 않아.”
“충분해요.”
“왜 하필 오늘 이런 걸 입히는데?”
허구한 날 평범한 잠옷을 입히더니, 딱 골라 하필이면 루블리에가 돌아오는 오늘 옷이 얇고 살랑살랑 짧아졌다.
사람을 곰으로 아나 보다.
새틴은 새침하게 지시했다.
“바꿔줘, 라리.”
라리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부부 사이에 이것만큼 빨리 정드는 방법도 없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 싫으세요?”
“정 싫어.”
“팔라딘께서는 별로 나쁘신 분 같진 않던데…….”
“…….”
루블리에가 나쁜 사람이라고는 새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저와는 안 맞는 사람일 뿐이다.
라리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마님께서 싫으시다면 할 수 없죠. 어쩌겠어요, 마님이 싫으신걸……. 싫어하시니까 다른 옷을 찾아올게요. 여기서 기다리시겠어요?”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나가는 라리의 품새를 보아하니, 왠지 한참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러다가 루블리에를 마주치게 되면 그야말로 곤란하지.
새틴은 잠깐 고민하다가 얼른 라리를 따라나섰다.
벌써 도착하지는 않았겠지?
신성 기사단이 수도로 들어왔다 한들 법황청에 입성해서 출장 다녀온 내용을 보고하는 임무가 우선일 테다. 그러면 집에는 아주 늦은 밤이나 새벽쯤에야 도착할 것이다. 그때쯤이면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재회는 자연스럽게 내일로 미뤄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옷을 갈아입고 일찌감치 침실로 들어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는 게 낫겠다.
결정을 내린 새틴이 종종걸음으로 침실 근처의 드레스룸에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옆방의 문이 열리며 간편한 실내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루블리에가 덜컥 등장했다.
맙소사. 까마귀도 제 소리 하면 온다더니.
새틴은 그대로 멎어 눈을 굴렸다.
얇디얇디 그지없는 슬립, 어깨에 반쯤 걸쳐져 흘러내리는 부들부들한 가운……. 오늘따라 다리도 허전했다. 아니, 그냥 전체적으로 다 허전했다.
새틴은 팔을 들다가 흠칫했다. 가뜩이나 색이 옅은 피부가 어째 더 하얘 보였다.
우유 탓이겠지. 그놈의 우유.
새틴은 루블리에의 눈치를 보며 참새처럼 총총총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보폭이 워낙 좁은 탓에, 몇 걸음조차 채 멀어지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정적이 짙어 새틴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새틴은 침묵을 지켰다.
루블리에도 침묵을 지켰다.
하필이면 주변을 지나가는 사용인들도 하나 없었다. 라리도 드레스룸에 숨어 머리꼭지 하나 비추지 않았다.
적요를 깨고 먼저 움직인 사람은 루블리에였다. 의아한 듯, 뜻밖의 재회에 놀란 듯하면서도 별반 표정이 없던 루블리에가 고개를 기웃, 기울였다.
입가가 비싯 올라갔다.
“……꼬맹이.”
“…….”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지?”
이게 무슨 소리야?
맙소사! 오, 맙소사.
새틴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완연하게 당황한 낯빛을 띤 새틴이 자신의 침실로 먼저 달아나고서 루블리에는 천천히 자신의 침실로 들어왔다.
턱. 문을 닫고 벽에 기대어 섰다. 실소는 뒤늦게 흘러나왔다.
꼬맹이.
조그만 소녀가 다람쥐처럼 도도도 돌아다니는 모습이 귀여워서, 눈에 자꾸만 밟혀서 그녀를 그리 불렀었다.
오래 부르다 보니 입에 붙은 습관이 되었고 각인이 되었다.
하지만 결혼한 지금까지도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정말로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는데.”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새로운 진전을 위해서 낡은 습관을 바꿀 때가 되었다. 결혼하고도 여전히 아카데미 시절에 머물러 있으려는 게 아니면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꼬맹이가 아니었다. 훌륭한 숙녀고, 이제는 자신의 부인이다.
그런데 새틴은 물론이고 저 자신 역시도 과거의 관계에 묶여 있었다.
루블리에는 빈 침대 위에 앉았다. 몸을 반쯤 걸친 자세로 털썩 드러누웠다.
“새틴.”
새틴의 침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만히 이름을 불러보았다.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요른이 아니야. 내가 바로 네 남편이지. 안 그래?”
21년 동안 그녀가 기요른의 약혼녀로 살았을지언정 실제로 결혼식장에서 부부로서의 언약을 한 남자는 자신이다. 이 사실에 벅차오른 나머지 그다음을 놓치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루블리에는 팔을 들었다. 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쓸어올렸다가,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너무도 오래된 정혼자가 곁을 지키고 있었기에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마음이 길었다.
그래서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그녀를 두고도, 풋내 나는 학생처럼 굴었다.
나는 너를 얻었으니 여기서 만족한다는 거짓말은 안 해.
더 원한다고 말할 거다.
루블리에는 새틴의 침실을 향해 모로 누웠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이던 잔상이 눈을 감으면 더 또렷해져 와, 그는 눈을 감는 쪽을 선택했다.
왠지 잠을 이루기 힘들 듯한 밤이었다.
* * *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지?’
루블리에도 잠 못 드는 밤이었지만 새틴에게는 더한 밤이었다. 새틴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와, 진짜!
자신이 아는 루블리에는 아카데미에서의 성격과 태도가 대부분이었다. 자연스럽게 옛날의 루블리에가 떠올랐다.
그래, 원래 그런 남자였지.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 성격은 어디로 안 갔다.
물론 못 본 척 돌아서 주기까지 바란 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내내 루블리에를 겪어 왔는데, 그 정도로 사려 깊은 남자였으면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 그는 저만 보면 꼬맹이라고 부르면서 놀렸다. 저만 당한 게 아니라, 어쩌다 잘못 휘말린 사람도 피해를 입었다.
기요른도 아카데미에서 검술 토너먼트를 치르다가, 저 때문에 마음 상한 루블리에가 실력 격차를 무시하고 몰아붙이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으니까.
다만 돌이켜 보니 검술 시합 사건은 속이 좀 시원하긴 했다. 미래의 기요른이 저지른 기만을 과거의 루블리에가 대갚음한 기분이라 할까.
아주 잠깐 과거의 루블리에를 새롭게 보고 있던 새틴이 이내 화들짝 놀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그거 하나 어쩌다가 운 좋게 들어맞은 것을 가지고 루블리에를 편들어줄 마음은 없었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지, 아무렴.
게다가 아까의 루블리에는 열두 살의 루블리에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새틴은 발버둥을 쳤다.
“뭔데, 그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