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루블리에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헤아렸다. 새틴의 기억은 언제부터가 선명할까.
아무래도…… 그날일까.
역시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수업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새틴과 한 쌍으로 붙어 다니던 기요른이 교육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를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 교육실을 찾느라 그 앞을 지나가던 루블리에는 일순 기요른이 왜 그러고 섰는지를 직감했다.
새틴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아카데미는 원래 구조가 복잡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구조물 두어 채로 시작됐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 교육기관으로 건물을 계속 증축하다 보니 내부가 잘 정렬되지 않은 채로 몸집만 커졌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교육실을 잘못 찾은 신입생들이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사과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루블리에는 아카데미에 들어오자마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위치를 외웠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루블리에처럼 미리 위치를 파악하기보다는 다니면서 천천히 익히는 쪽을 택했다.
저 답답한 녀석은 여자 친구가 오지 않았으면 얼른 주변을 뒤져서 찾아와야지, 마냥 얌전하게 기다리고만 있다.
새틴이었으면 진작에 지나가는 아카데미 소속 사용인들을 불러 셀 위오의 도련님을 찾아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다.
루블리에는 곧장 방향을 바꿔 복도를 거꾸로 뛰어갔다.
새틴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마음이 재촉하는 바람에 일단 뛰고 보았다.
부랴부랴 교육실로 몰려오던 학생들이 루블리에를 발견하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곧 시작될 수업에 늦었겠거니,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에는 가능한 한 뛰지 말고 조용히 생활하라는 지침이 있었으나 수업 직전이면 늘 지각을 피해 복도를 전력 질주하는 학생들이 여럿 나왔다.
“어머, 깜짝이야!”
“루블리에님, 수업 늦으셨나 봐.”
학생들이 소곤거렸다. 실상은 새틴을 찾느라 가야 할 교육실에서 시시각각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루블리에는 긴 복도를 단숨에 가로질렀다. 푹 꺾어지는 코너가 가까워졌다.
서서히 속도를 줄여 방향을 휙 꺾으려던 찰나였다. 반대편에서 나타난 인기척이 루블리에와 충돌했다. 새처럼 나풀거리는 하얀 인영이 시야 아래에 얼핏 스쳤다.
부딪힌 순간 누군지 알았다. 아차, 싶었지만 붙잡을 겨를이 없었다.
상대는 루블리에의 힘에 떠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야.”
새틴이 금방 일어나지 못하고 어기적거렸다. 찡그린 얼굴이 저를 향했다.
루블리에는 일순 말이 막혔다.
다행과 불행이 공존했다. 새틴이 제대로 오고 있었던 건 다행이었고, 하필이면 부딪혀 넘어뜨린 꼴이 된 건 불행이었다.
루블리에는 의지할 데를 찾아 허공을 방황하는 새틴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히 쥐고 힘을 주니 가벼운 몸이 스르르 딸려 올라왔다.
“너무 작아서 안 보였잖아. 꼬맹이.”
정말로 안 보였다.
그녀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좀 더 빨리 눈에 들어왔을 텐데.
그럼 넘어지게 두지도 않았을 테고.
손바닥 안에 몽글몽글한 온기가 고였다. 서먹한 표정과는 다르게 새틴의 체온은 천진했다.
새틴으로부터 번져 나온 어색한 기류에 루블리에는 손을 놓아주었다. 잠시간 머물렀던 체온은 삽시간에 부슬부슬 흩어졌다.
이 코너만 돌면 새틴은 교육실을 찾아갈 수 있었다. 혹 지나치더라도 교육실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는 기요른이 새틴을 부를 것이다.
그럼 됐지.
루블리에는 얼른 몸을 틀었다. 새틴보다 더 멀리 가야 하는 그는 이미 지각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 모두가 이미 착석한 교육실에 꼴찌로 들어서고 나서야 뒤늦은 의문이 찾아왔다.
새틴이 길을 헤맨다고 당황해서 울음을 터뜨릴 어린아이도 아닌데 왜 마음이 초조했을까. 그건 대체 무슨 충동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새틴과는 그런 충동이 많았다. 늘 충동적으로 말을 걸고, 충동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때론 충동이 기회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결혼식이 그 결과였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사실 실감이 날 만한 처지도 아니긴 했다. 결혼하자마자 신혼집을 떠나왔으니까.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루블리에가 없는 이 보름 동안 새틴은 혼자 신혼집을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새틴이 데려온 하녀와 사용인들이 상주하고 있지만, 그들은 새틴의 시중을 들어주고 신혼집을 관리하는 고용인이지 집의 주인은 아니었다.
새틴을 정말 오랜만에 만났고, 다시 오지 않을 기회까지 붙잡았는데 그러자마자 두 달이나 떨어져 있는 신세라니.
부재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마음먹고 나왔어도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 바람에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었다.
새틴의 남편이지만 그는 신성 기사단의 수장이기도 했다. 악령의 소행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 흔적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루블리에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고 온 새틴이 보고 싶었다.
* * *
하루하루가 쏜살처럼 빨랐다.
처음 ‘악령의 소행’을 들었던 동네를 시작으로 루블리에는 근처의 대주교구들을 차례차례 순회했다.
그러면서 이후에 만난 대주교들에게 ‘악령의 소행’에 대해 물어보았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사람도 있었고, 전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도대체 무얼 보고 대주교는 이유 모를 괴현상이라고 표현한 거지?
고민해봤자 눈과 귀가 어두운 대주교들 상대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루블리에는 대주교 대신 말단의 주교와 사제들을 만나는 쪽으로 방법을 틀었다.
대주교들도 어차피 휘하의 주교나 사제들을 관리하는 고위 직급의 성직자다.
꼼꼼하고 세심한 사람은 대주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문에 정통하겠지만 성향이 무심해서 성가신 소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법황청이 나무의 기둥이라면 대주교는 가지였고, 주교와 사제들은 잎사귀였다. 루블리에는 저 자잘한 잎사귀들부터 훑기로 마음먹었다.
신성 기사단은 지방의 주교구들을 구석구석 돌았다. 대부분 인구가 적고 한산한 동네들이었다.
수도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밤늦게까지 사교 활동이 많은 수도와 달리 지방의 작은 촌들은 해가 뜨면 하루가 시작됐고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났다.
느리고 어둡고, 대체로 나이가 많은 동네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런 누추한 동네에 법황 성하의 대리자께서 방문하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나마 대주교들은 간혹 수도에 올라와 법황을 알현하기라도 했으나, 사제들은 대부분 평생을 한 동네에 묻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신성 기사단의 수장에 부임한 지 한 해밖에 지나지 않은 파수꾼 가문 출신의 젊은 기사에 관해서는 소문만 들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하여 신성 기사단의 등장 자체가 시골 동네에서는 대단한 이슈가 되었다.
시간이 태부족했다. 목표했던 두 달의 출장 기한은 거의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별 소득이 없었다.
루블리에는 사제관의 사제를 만나 악령과 괴현상에 관해 중점적으로 캐물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 시원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악령이라니…… 팔라딘께서 무엇을 알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악령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의문인데, 그런 게 함부로 돌아다닌다면 큰일 아닙니까? 하물며 우리나라는 신이 돌보시는 신성 교국인데요.”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자가 하나도 없습니까?”
“글쎄요……. 아, 그보다는 언제까지 머무르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는 사제관이 누추해서 기사님들을 모시려면 여관을 따로 수배해드려야 합니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예정대로라면 지금쯤 수도로 출발했을 날짜임에도 불구하고 루블리에는 아깝고 아쉬운 시간을 하루씩 더 소모하고 있었다. 게다가 언제까지 소모해야 할지도 기약이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되었다. 신성 기사단이 법황의 곁을 무한정으로 비워둘 순 없는 법이다.
새틴도 마찬가지였다. 새신부가 너무 오래 혼자 지냈다.
애초 십 년이나 이십 년마다 드물게 보이는 현상이라 했으니 이쯤 했으면 따로 사람을 급파하여 기간을 여유롭게 두고 지켜볼 수밖에.
“숙소는 됐습니다.”
루블리에는 거절했다.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악령의 소행에 관해서는, 법황청에 보고를 올리면서 지방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정도로 내용을 보태야겠다.
다소 미흡하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이때까지는 그럴 줄로만 알았다.
루블리에는 부관이 펼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이쯤까지 온 것 같습니다.”
부관이 흐릿한 지점을 손으로 찍었다.
생소한 경로라 지도에만 의지해 이동한 지 벌써 사흘째였다. 애초 세웠던 계획보다 변두리로 다녔던 까닭에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한참 말을 달리고 달릴수록 외지의 길은 험하게 변해갔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오지의 길은 울퉁불퉁하고 좁았다.
속도가 아무래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루블리에의 말은 한혈마라 거친 길과는 상관없이 밤낮으로 달리는 게 가능했으나, 보통의 신성 기사단이 타고 다니는 말은 한혈마보다 훨씬 힘이 떨어졌다.
자연히 루블리에가 기사단의 속도에 자신을 맞추게 됐다.
“수장님!”
대열의 가장 가장자리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기사 한 명이 기사단의 대열을 정렬하던 루블리에를 소리쳐 불렀다. 루블리에는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야?”
“저기 좀 보십시오.”
루블리에가 말의 고삐를 잡고 방향을 돌려 다가갔다.
풀이 제멋대로 엉켜 자란 야생 들판에 검은 물체들이 툭툭 떨어져 있었다.
루블리에는 손을 들었다. 수장의 신호를 알아들은 기사단이 일제히 말의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기사단을 뒤에 남겨두고서 루블리에는 들판을 건너갔다. 발굽 아래로 야생초들이 버스럭대며 누웠다.
굳이 말에서 내릴 필요는 없었다. 말 등에 올라탄 채로 루블리에는 검은 물체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건 새까만 까마귀 떼였다.
“까마귀 떼가 왜 여기……?”
루블리에를 쫓아 들판으로 들어온 부관이 뜨악해하며 중얼거렸다.
루블리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청명했다. 저 푸른 하늘을 날아다녀야 하는 새들이 왜 들판에서 죽어 있는지, 원인불명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이유 모를 괴현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걸 악령의 소행이라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