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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16/112)

<16화>

“와, 나 어떡해?”

그…… 아이라면 아무래도 뭔가 많은 과정이 필요하지? 아이는 혼자 생겨서 낳는 게 아니니까.

상상도 불가능했다. 새틴은 몸서리를 쳤다. 아카데미에서는 투닥거리기나 했을 뿐, 그마저도 대부분 루블리에가 먼저 시작했다.

기요른처럼 붙어 다닌 시간이 길어 우정이라도 깊었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선 같은 파수꾼 가문인 만큼 살면서 어쩌다 한 번씩 만날 자리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크게 생각을 안 해 봤다.

그는 그대로 알아서 잘 살고, 저는 기요른의 부인으로 알아서 잘 살고.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결혼식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더니만 결혼식장을 나올 때는 루블리에의 손을 잡고 나왔다.

꿈에도 나온 적 없는 루블리에의 부인이 되었고, 집에서는 크게 기대하면서 벌써 후계자 얘기를 꺼냈다.

“……미치겠다.”

루블리에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었다. 새틴은 다시금 루블리에의 장기 출장에 감사했다.

‘거리가 멀어서 두 달? 두 달 반?’

그래, 두 달에서 두 달 반이면 길다. 그가 돌아오면 약속했던 이혼이 코앞이다. 그럼 괜히 사서 걱정할 이유가 없겠지.

어차피 지금은 혼자 난감해하고 있어 봤자 답이 안 나온다.

새틴은 상자를 푹신한 베개 아래에 밀어 넣고서 그 위에 덜렁 누웠다. 루블리에가 이 집에서 딱 하루 자고 떠났던 날에도 둘은 각방을 썼다.

그의 태도를 봐서는 앞으로도 딱히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됐지, 뭐.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새틴은 잠을 청했다.

이혼까지 이제 두 달하고도 이십여 일.

지금도 시간은 착실하게 하루하루 흐르고 있었다.

* * *

루블리에는 지방의 대주교가 통솔하는 주교구에 들어섰다.

짙은 남색 제복을 차려입은 신성 기사단의 방문에 사람들이 끔벅끔벅 고개를 돌려가며 관심을 표했다.

법황을 수호하며 수도에 머무는 신성 기사단은 먼 지방에선 만나기 힘든 귀한 손님이었다.

대주교구의 교당 뒤에는 대주교가 머무는 주교관이 있었다. 주교관은 법황을 대리하는 손님들을 위하여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백발이 성성한 대주교는 여든이 넘은 노인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대주교가 루블리에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루블리에의 나이가 훨씬 어렸으나, 파수꾼 가문과 고위 성직자 양쪽에 발을 걸친 루블리에는 어지간한 대주교보다 위상이 높았다.

“환대, 감사합니다.”

“최근에 결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말로 달려도 상당히 먼 거리인 데다가 왁자지껄한 수도와는 사뭇 다른 한적한 동네였다.

이런 동네까지 제 결혼 소식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루블리에는 내심 놀랐다.

“벌써 소문이 다 났습니까?”

“당연하지요. 사람의 입은 발보다 빠르니까요. 델 마레 가는 예부터 법황 성하에 대한 충성심이 깊고 책임감이 뛰어나기로 이름났던 명문이었지요. 카 딜론 가는 팔라딘께서 이미 제일가는 위세를 세우셨으니 훌륭한 집안끼리 좋은 결혼을 하셨습니다.”

진심 어린 태도였다. 뜻밖이었다.

수도에 있는 사람들은 델 마레를 놓쳐 버린 셀 위오가 많이 아쉽겠다느니, 이제 가문의 세력이 어느 쪽으로 기울겠다느니, 조금씩 차이는 났어도 다섯으로 나뉘어 있던 힘의 평형이 깨어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는 식의 견해를 내놓곤 했다.

이토록 아무런 계산속이 보이지 않는 축하는 드물다. 루블리에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가 말을 이었다.

“사실 많이 기다렸던 소식입니다. 이제나마 다섯 파수꾼 가문 중 두 곳이라도 결속했으니 안심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도리어 저는 더 나아가 다섯 가문이 계속해서 두루두루 혼사를 맺거나 동맹을 맺었으면 싶습니다. 마치 한 집안처럼 말이지요. 정략적인 결혼이라고 해도 혼인은 힘을 합칠 수 있는 제일 쉬운 방법이니까요.”

나이 든 대주교는 잠시 몸을 틀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힘을 합친다…… 라. 지금의 파수꾼 가문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백여 년 전, 가문의 선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마귀에 대적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시절에는 다섯 가문이 마치 친형제와도 같은 사이였다고 했었다.

하지만 칼데브란카가 평화로워지고, 파수꾼 가문에 점점 부귀와 명예가 쌓여가면서 대를 거듭한 지금은 모든 가문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서로 도와 발전할 시기가 지나면 견제로서 남의 힘을 뺏어오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형제의 마음은 사라졌고 라이벌의 감정만 남았다.

“다섯 가문이 한 몸처럼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듣고 있던 루블리에가 되물었다. 묻고 나니 조금 더 분명해졌다.

“방금 그 말씀은 대주교께서 꼭 뭔가를 걱정하시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대주교가 대답했다.

“아마 수도나 수도 주변에서만 평생을 사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운으로 활기찬 도시를 벗어나, 이런 궁박한 벽지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보면 마주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아주 드물게 마주치곤 하지요.”

루블리에는 대주교의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았다.

“건국 전설에서, 마귀는 그 자체로도 두려운 존재지만 마귀가 있는 곳에는 악령이 떠돌았다고 합니다. 그 악령들은 마귀가 봉인되고서 대부분 소멸됐으나 극히 일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지요. 그래서 아주 가끔, 이유 모를 괴현상을 보게 되면 우리는 그걸 악령의 소행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무런 증거가 없는 데다 평범한 사람들을 괜히 불안하게 할 순 없으니 침묵할 뿐입니다만, 십 년에 한 번, 이십 년에 한 번, 잊을 만하면 보게 되는군요.”

루블리에는 불현듯 아카데미에서 들었던 가르침을 기억해냈다.

그냥 전설이었고, 여전히 전설이었고, 앞으로도 그냥 전설일 거라고 생각했던 교수의 첫마디를.

‘마귀는 사람이 방심하는 틈을 타고 스며들어. 이 그림자와도 같지. 어느샌가 발치에 붙어 있거든. 어두운 곳에서는 티가 나지 않지만 빛 아래선 무엇보다 선명해.’

어쩐지 의례적인 기분으로 시작하게 된 출장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확실히 수도에 있으면 평화에 안주하게 되었다.

법황이 있고, 신성 기사단이 있는 수도는 안전했다. 그러나 대주교의 말에 따르면 외지에는 십, 이십 년에 한 번씩 ‘마주치지 않아도 좋을 것’이 나타난다고 했다.

악령의 소행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루블리에는 제복을 벗어 정리하고서 말끔하게 정리된 침대에 누웠다.

다른 기사들은 둘, 셋이 한방을 배정받았으나 팔라딘인 루블리에는 방 하나를 혼자 사용했다.

그러니 지금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상상하든 남에게 방해받을 일은 없었다.

“일찍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출장이 늦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역시 가장 먼저 기억 속에서 솟아오르는 얼굴은 새틴이었다.

‘괜찮아요. 절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끝내고 오세요. 나랏일이니까 신중해야죠.’

너무나도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루블리에는 입매를 당겼다. 귀엽지 않은가. 새틴은 아카데미 시절에도 귀여웠고, 지금도 여전히 귀여웠다.

열두 살의 새틴과 기요른은 언뜻 봤을 땐 비슷한 애들끼리 뭉쳐 다닌다는 인상을 풍겼다.

둘 다 작고 하얀 탓이다. 기요른은 아슬아슬하게 평균 신장을 맞추기는 했어도 당시 워낙 깡말랐던 까닭에 실제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게다가 전형적인 책상물림 스타일이라 희멀건 분위기가 돌았다. 유전적으로 색이 엷은 새틴이야 말할 것도 없이 새하얬다.

하지만 조금만 더 지켜보면, 그 둘의 기질이 다르다는 사실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기요른은 순했고 새틴은 야무졌다.

동갑내기 나이에, 언뜻 봐서는 더 동생처럼 보이는 새틴이 종종 기요른을 붙들고 챙겼던 것이다.

새틴은 아침 기도 시간에 기요른이 졸고 있으면 흔들어 깨웠고,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고 있으면 약을 챙겨 먹었다.

심지어 새틴은 쓴 약을 싫어하는 기요른 때문에 항상 토피 사탕을 소지하고 다녔다.

환경과 주변 사람이 한꺼번에 바뀐 스트레스로 신입생들은 입학하자마자 돌림병처럼 감기를 앓았다.

기요른도 걸렸고 새틴도 걸렸다. 루블리에도 똑같았다. 아무리 건강하다 한들, 사방팔방에서 콜록콜록 병균을 옮겨대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열이 오르면 수업을 쉬었지만, 기침 정도로 결석하기에는 시험이 걱정이었다.

다들 어지간히 아픈 게 아닌 이상 수업에 나와 자리를 지켰다. 새틴은 아예 큰 잔에 물을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옆자리의 기요른은 새틴만큼의 준비성이 없었다.

수업 도중 기요른이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입을 틀어막아도 소리만 약간 줄어들 뿐 기침이 멎지는 않았다.

그때 새틴이 주머니에서 토피 사탕 하나를 꺼내 몰래 기요른의 손에 쥐여주었다. 기요른이 다급히 사탕을 까 입에 넣었다.

하나 기침은 전염성이 있었다. 똑같이 감기에 걸린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콜록대기 시작했다. 기요른의 뒷자리에 있던 루블리에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자 새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루블리에의 책상 근처에 사탕을 톡 내려놓았다.

먼 자리의 학생들까지 챙겨줄 수는 없어도 바로 뒷자리 학생 정도는 도와줄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평소 잘 먹지도 않던 사탕을 감기와 새틴 때문에 먹었다. 새틴이 준 사탕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달콤했다. 그래서 조금 현기증이 났다.

그게 사탕 탓인지, 감기 탓인지, 새틴 탓인지 루블리에는 헷갈렸다.

아마 그녀는 그 행동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감기로 고생하는 친구를 보살펴주다가 주변에 사탕 하나를 더 나눠주는 정도는 새틴에게 있어선 정말로 별것 아닌 선의였을 테니까.

주고도 바로 잊어버린, 무의식중에 행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루블리에는 수업 내내 새틴의 은색 머리카락을, 꼿꼿하게 앉아 앞만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여러 번 쳐다보았다.

보통은 시각, 후각, 청각으로 사람을 기억한다는데 그에 아울러 미각으로도 기억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 줄 루블리에는 처음 알았다.

새틴을 떠올리면 입이 달아졌다. 지금도 사탕 맛이 떠올랐다. 제 기억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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