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 *
델 마레 본가에서 전갈이 도착했다. 시간이 나면 본가에 들러 달라는 이야기였다.
루블리에와 저 사이의 스캔들을 가지고 수군거릴 사람이 많아, 신혼집에 칩거하며 당분간 만남을 피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남아돌던 중이었다.
“라리, 집에 다녀와야겠어. 마차 좀 준비해 줘.”
“네, 마님.”
루블리에가 없어도 이 집에서 새틴은 계속 마님이라 불렸다. 결혼했으니 그게 당연하기도 했다.
마님, 마님. 매일 듣다 보니 전처럼 소스라치는 날도 많이 줄어들었다.
딱히 적응할 마음이 없었음에도 절로 적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듣고 넘기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서 새틴은 사뭇 놀랐다.
나중에 이혼하게 될 날을 생각하면 이리 쉽게 적응해선 안 될 텐데.
아가씨. 한때 델 마레의 새틴 아가씨였던 자신이 어느덧 마님이 되었고, 새틴 부인이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스며든 호칭이 새삼스러웠다.
“이혼하면 또 한동안 헷갈리겠네.”
그런 점에서는 루블리에가 부러웠다. 그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더불어 나중에도 여전히 카 딜론 경일 테니까.
“마님, 지금 출발하시겠어요?”
마침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알림이 들려왔다. 새틴은 잡념을 지우고 일어났다.
교외를 벗어난 마차가 시가지의 대로로 접어들었다. 마차에 드리우는 휘장은 델 마레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파수꾼 가문을 알아본 다른 마차들이 먼저 길을 양보한 까닭에, 마차는 거침없이 달려 델 마레 본가 앞에 멎었다.
새틴은 휘장을 젖히고 내렸다.
내리자마자 무심중에 집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희한했다. 신혼집에서 며칠 지냈다고 평생 살았던 본가가 그새 생소해졌다.
저택의 크기만 봐서는 본가가 훨씬 넓은데, 목장과 들판을 정원 삼고 호수를 연못 삼은 신혼집에 살다가 담벼락으로 구역을 총총 갈라놓은 시가지를 보니 답답하고 좁아 보였다.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시골 체질이었어?”
내내 복작복작한 사람들 틈에서 살았으니 지금의 새로운 환경이 흥미로운 거겠지, 뭐.
그래도 생활이 달라졌는데 생각보다 불편한 점이 많지 않다. 왠지 파혼하고 시골로 쫓겨났어도 잘 적응해서 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에이.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본가에 들어가자 사용인들이 새틴을 보며 반색했다.
특히 신혼집으로 이사 가기 직전까지 넋이 나가 있던 새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새틴을 위아래로 확인하며 안도했다.
“아유, 얼굴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래?”
“루블리에님과 잘 지내고 계시나 봐요? 역시 괜한 걱정이었네요.”
“잘 지내기는 무슨. 그 사람 장기 출장 갔어.”
루블리에는 딱 하루 봤고 쭉 혼자 지내는 중이다. 잘 지내고 말고 할 기간이 없었다.
“그 사람이요?”
한데 엉뚱하게도 새틴이 입에 담은 호칭에 주목한 사용인들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새틴은 갸웃거리면서 고쳐 불렀다.
“카 딜론 경……?”
“예? 카 딜론 경이라니요?”
“직업이 기사잖아. 법황청이 인증한 카 딜론 경이지.”
“결혼하신 분이 어쩜 그렇게 서먹서먹하게 부르세요? 한창 깨가 쏟아져야 할 시기에요.”
“내가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래? 그리고 출장 가서 혼자 있는데 깨가 쏟아지기는 뭘.”
“왜 이상한 데서 낯을 가리고 그러세요. 팔라딘께서 아시면 서운하시겠어요. 그나저나 깜빡 잊고 있었네요. 신성 기사단이 법황 성하 대행으로 지방 주교구들을 쭉 돈다고 하더라고요.”
“응? 그래서 두 달씩 걸린다고 했나 보네.”
“세상에, 여태 모르셨어요?”
“무슨 임무인지 말을 안 하고 갔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당연히 모르지.”
“결혼하셨으니까 이제 그러시면 안 돼요. 부부라면 서로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셔야죠. 하나하나 물어보시고, 챙길 게 있으면 챙겨주셔야 해요.”
아니, 금방 이혼할 사이라 안 그래도 되는데…….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새틴은 꾹 참았다. 아직 굳이 밝힐 필요는 없는 일이다. 대신 화제를 돌렸다. 부모님의 전갈을 받고 온 길이니, 오늘의 용건은 부모님에게 있었다. 새틴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셔?”
한집에 지낼 때는 부모님이 어디에 있는지,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딸로서 왔는데 꼭 손님으로서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용인이 대답했다.
“응접실에요. 오늘 오신다는 소식을 받고서 주인님과 주인마님께서 많이 기다리셨어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금방 마실 것을 준비해 드릴게요.”
“알았어.”
응접실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새틴은 벽면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동안 델 마레의 본가는 아주 소소하게 변했다. 가구의 위치라든가, 복도에 둔 장식품이라든가, 테이블보의 색 같은 부분들. 집에 오래 살았던 사람만이 알아볼 수 있을 아주 작은 변화였다.
한데 응접실은 다른 곳보다 더 허전해 보였다.
뭐가 변한 거지?
그러나 세세하게 관찰할 시간은 없었다. 부모님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새틴을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새틴은 맞은편에 앉으려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벨벳으로 감싼 자그마한 상자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부르셨어요?”
“새틴. 잘 지내고 있나 보구나.”
“네, 뭐…….”
“그러게 그 청혼을 놓쳤으면 얼마나 큰일일 뻔했니.”
누가 보면 원래부터 카 딜론과 호의적인 관계였던 줄 알겠다.
왜 응접실이 허전했는지 새틴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방 안에는 셀 위오와 주고받았던 선물들이 싹 사라진 상태였다.
새틴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마찬가지로 셀 위오 가에는 델 마레에서 보낸 선물들이 모조리 치워졌을 터였다.
루블리에가 적절히 정리를 했다 해도, 두 가문이 다시 예전만큼의 동맹을 맺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 부르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네가 마침내 결혼을 했으니 전해줄 것이 있어 불렀다.”
새틴은 곁눈으로 상자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치 않게 되었다.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이다.
아주 어렸을 적, 부모님은 새틴을 불러 상자를 열어 안을 보여주었다.
약 한 뼘짜리 작은 상자 안에 든 물건.
그건 부러진 검의 조각 중 하나였다.
“카 딜론 가는 자식이 셋이나 되어 우리처럼 후계가 급하진 않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너 하나뿐이지. 델 마레에는 너밖에 없어. 그러니 이제 네 혈통을 통해 후계가 이어져야 해. 이 성물은 오늘부터 네가 보관해야 한다.”
부러진 토막의 끝이라 효용도 없을뿐더러, 금이나 보석으로 치장되지도 않았다.
단순하게 값어치를 셈하자면 당장 내다 버려도 모자랄 오래된 고철에 불과했다.
그러나 새틴은 저 성물이 짊어지고 있는 무게를 기억했다.
저 시커먼 강철 조각은 이 신성 교국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칼데브란카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이 세상은 암흑과도 같았다 한다.
시절의 혼돈은 마귀의 흉행을 불러왔고, 마귀의 흉행은 더한 혼돈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악순환이었다. 하나 하 수상한 시대 속에서도 빛을 갈구하는 사람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에게 신탁이 내려졌다.
네 뜻과 맞는 사람들을 모아 세상을 구하라.
지독한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속속 모여들었고, 아주 오랜 시간이 들었지만 그는 신의 계시와 부하들의 충성에 힘입어 마귀와 끈질긴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귀의 봉인에 성공했다.
그가 사용하던 검은 마귀에게서 승리를 거둔 순간 생명을 잃고 다섯 조각으로 부서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디오니시오로 명명하고 황폐하게 바랜 땅 위에서 칼데브란카 신성 교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더불어 자신을 열심히 도왔던 다섯 충복에게 부러진 검의 조각을 하나씩 나누어주며 당부했다.
「우리의 전쟁은 끝났다. 우리는 땅을 되찾았고, 하늘을 되찾았다. 마귀는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귀가 여기에 있었음을 안다. 마귀의 피가 이 검에 묻어 있다.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을지라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마귀의 증거가 여기 있으니, 너희는 언제나 마귀를 경계하고 오래도록 신탁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이 나라를 수호하라.」
이것이 현재까지도 명문으로 이름 높은 다섯 파수꾼 가문의 시작이었다.
새틴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모든 파수꾼 가문은 가문을 잇는 후계자에게 대대로 가보를 전해주게 되어 있단다. 선대의 가르침에 따라서 지금까지는 우리가 보관하고 있었으나 이제 네가 결혼했으니 너에게 물려줄 차례가 되었지. 너도 이 조각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꼭 네 자식에게 물려주렴.”
가보를 지금 새틴에게 물려주려는 의도는 명백했다. 후계자 압박이었다.
서둘러 자식을 가지라는 암시였다.
“새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은 다른 가문에 비해 유난히 자손이 귀하지. 그래서 네 결혼을 내내 염려했었는데, 네가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으니 이제야 한결 마음이 놓인다.”
“저, 제가 이걸 받기에는 아직 시기상조 아닐까요……. 미래가 어찌 될지는 한 치 앞도 모르는 거고요.”
“얘는, 결혼한 애가 어쩜 이리 태만한 소리를 하고 있니? 빨리빨리 집안을 안정시킬 생각을 해야지!”
사용인들부터 부모님까지, 아까부터 새틴의 결혼으로 야단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삼 개월 지나면 이혼하기로 했는데요?
사용인에게도 못한 말을 부모님 앞에서는 어찌 한단 말인가. 식은땀이 다 났다.
이렇게 다들 기대하는데, 나 무사히 이혼할 수 있을까? 있겠지?
환장하겠다. 새틴은 막막해졌다.
간만에 본가로 왔으니 하룻밤 자고 가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만류하고 새틴은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저 무수한 잔소리를 내일까지 듣고 있을 순 없었다. 차라리 일찌감치 집에 들어오는 게 낫지.
새틴은 침대에 앉아 품에 조심스레 품고 온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를 열려다, 끝내 열지 못하고 손가락이 테두리를 배회했다.
‘너도 이 조각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꼭 네 자식에게 물려주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은 다른 가문에 비해 유난히 자손이 귀하지. 그래서 네 결혼을 내내 염려했었는데, 네가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으니 이제야 한결 마음이 놓인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다.
맙소사. 자식이라니, 아이라니. 그것도 루블리에와의 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