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 진짜. 남 못 큰 거에 보태준 거 있나?
키는 작아도 성깔은 있었다. 새틴이 새치름하게 저를 쏘아보든 말든, 옆의 빈자리에 앉은 루블리에가 새틴의 물잔에 하얀 우유를 가득 따랐다.
“마셔.”
“왜?”
“넌 우유 많이 마시고 키 좀 커야겠더라.”
기요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새틴을 쳐다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냐고 묻는 기색이었다.
기요른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새틴과 루블리에를 흘끔거렸다.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고서 새틴은 우유를 끊어버렸다. 안 먹다 보니 또 거기에 익숙해져서, 그 습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다.
우유를 넣지 않은 진한 홍차를 새틴은 한 모금 마셨다. 루블리에가 입을 열었다.
“나 출장 가.”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좀 오래 걸려.”
“얼마나요?”
“거리가 멀어서 두 달? 두 달 반? 빨리 돌아오려고 노력해볼게.”
희소식이었다. 새틴의 볼에 화색이 반짝반짝 돌았다.
“괜찮아요. 절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끝내고 오세요. 나랏일이니까 신중해야죠.”
예상했던 반응이라 루블리에는 픽 웃었다.
“네 할 얘기는 뭔데?”
기다렸다는 듯이 새틴이 책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루블리에는 표지를 읽었다.
칼데브란카 법전.
법전?
“일단 법을 좀 찾아봤는데요. 결혼하고서 3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이혼이 가능하거든요.”
루블리에는 결혼하자마자 이혼부터 언급하는 새틴을 빤히 쳐다보았다.
새틴을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웃음이 나는 그였지만, 지금 이 말을 듣고는 웃을 수 없었다.
“이혼?”
“합의하는 과정도 있고 재산을 나누는 과정도 있고, 좀 복잡하긴 한데 어쨌든 최소 3개월이에요.”
새틴이 방긋거리며 선언했다.
“3개월 후에 우리 깔끔하게 갈라서요.”
추기경은 결혼 생활이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설교했었다.
그래도 모든 부부가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거쳐 가진 않는다.
사람은 사계를 봐도 다르고, 십 년을 봐도 다르다 하지 않던가. 새틴이 경험자였다.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을 본 기요른도 진짜 끌리는 여자가 나타나니 완전히 딴사람이 되지 않았나.
하물며 애초에 잘 맞지도 않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던 자신과 루블리에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맞춰 사는 일도 어지간해야 가능하지, 안 맞는 사람끼리 억지로 살라고 강제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칼데브란카 법전은 여러 조건을 달아 이혼을 허가했다.
3개월은 무분별한 이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3개월이 지나면 이혼을 하자고?”
루블리에가 되물었다. 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결혼해서 알콩달콩 잘 살 사이는 아니잖아요. 이혼하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연하잖아요?”
마치 사과는 원래 빨간 것이지 빨간 것에 이유가 있냐는 느낌의 반문이었다. 루블리에는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 결혼해서 잘 살 사이가 아니다, 이거지.
“뭐가 당연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그는 등을 깊게 기대며 새틴을 향해 눈길을 길게 흘렸다.
“우리가 못 살 이유가 딱히 뭐가 있지?”
대답 대신 의문이 돌아왔다. 새틴은 당황했다.
우리가 못 살 이유가 딱히 뭐가 있냐고?
꼭 이혼을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렸다. 왜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였다.
“……카 딜론 가에도 델 마레의 이름이 필요해요?”
셀 위오가 그러했듯이, 카 딜론에서도 가문의 격에 맞는 최고의 신붓감을 찾는다면 단연 새틴뿐이었다.
다섯 파수꾼 가문 중 현재 결혼 적령기의 딸이 있는 집안은 델 마레밖에 없었으니까.
나이에 구애받지 않을 시 선택의 여지가 많은 새틴과는 달랐다.
집안끼리의 조기 약혼 때문에 일찌감치 정리가 되었을 따름이지, 원래대로라면 루블리에와 기요른은 새틴을 두고 다퉈도 이상하지 않았을 입장이었다.
“뭐?”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가 안 돼서요. 카 딜론 경이 결혼식에 끼어든 것부터 이혼을 원하지 않는 것까지 다요. 물론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저는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카 딜론 경은 저를 싫어했잖아요?”
순간 루블리에는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너를 왜 싫어했다고 생각해?”
눈을 크게 뜬 새틴이 갸웃거리며 손가락을 꼽았다.
“그야 옛날에도 잘 안 맞았고…….”
루블리에가 부담스럽고 불편해서 피해 다녔다. 언젠가는 기요른에게 대놓고 그의 험담을 하다가 들킨 적도 있었다.
서로 친하려야 친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내가 널 싫어했다고?”
말하다 보니 다소간 표현이 안 맞기는 했다. 루블리에에게 직접적으로 싫다는 말을 들은 기억은 잘 안 떠올랐다.
“……서먹서먹하고 껄끄러운 관계였다고 할게요.”
새틴은 답을 정정했다.
서먹서먹하고 껄끄러운 관계. 루블리에는 새틴의 이야기를 되뇌었다.
“서먹서먹하고 껄끄러운 관계인데도 결혼까지 가게 된 건, 델 마레의 이름값 때문이다?”
“네.”
“결혼이 꼭 이름값으로만 성사되는 건 아닐 텐데.”
루블리에가 되받아쳤다. 새틴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야 가문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은 보통 사랑에 기반한 결혼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루블리에와 새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귀족, 그것도 파수꾼 가문의 결혼에 있어 사랑은 가장 불필요한 조건이었다.
“제 약혼은 부모님의 결정이었어요. 태어나자마자 결혼할 사람이 정해져 있었죠. 기요른이요. 그걸 이십 년이 넘는 동안 한시도 의심하지 않고 살았어요.”
새틴의 입에서 기요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일순 루블리에의 낯빛이 달라졌다.
하지만 새틴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절로 헛웃음부터 나오는 까닭이었다.
“그런데 막상 제 결혼은 사랑 때문에 파탄 났잖아요? 기요른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우린 제각각 엄청난 스캔들에 휩싸였고요. 사랑을 부정하자는 게 아니라, 사랑이 그만큼 위험하단 거죠. 이게 다 무슨 피해예요. 이제 파수꾼 가문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엄청 경계할걸요. 제 부모님도 그러실 테고요.”
“네 말에 따르면 우린 그 위험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반한 결혼도 아니고, 서로 이름값을 얻어 이득만 봤는데 굳이 이혼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 이유는 아까 말했잖아요. 우리는 안 맞아요. 결혼해서 알콩달콩 잘 살 사이가 아니라고요.”
집안이 집안인 만큼 사랑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편으로는 최소한 딜라일라를 만나기 전의 기요른처럼 우정과 의리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정도의 신뢰가 쌓인 사람이어야 했다.
새틴은 꿋꿋하게 주장했다.
“제 스캔들이 적당히 마무리되게 도와준 보답으로 이건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요. 전 이혼하고 다른 파수꾼 가문과 재혼하지 않을 거예요. 보다시피 셀 위오와는 이미 틀어졌고, 얀 실럿이나 콴 테온 쪽으로도 안 가요. 제가 부족한 조건도 아닌데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지도 않구요. 그러니까 카 딜론 가에서 델 마레를 견제할 일은 없을 거예요.”
루블리에는 재잘재잘 쓸데없는 약속을 쏟아내는 새틴의 입술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3개월 후에 이혼해요.”
그리고 새틴이 도달한 귀결은 여전했다.
“……우선 네 말뜻이 뭔지 이해는 했어.”
“네, 다행이네요.”
루블리에는 일단 새틴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영혼이 사라졌던 여자가 이혼을 언급하면서 급격히 영혼이 돌아왔는데, 듣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물론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이대로 포기할 리가.
루블리에의 납득 아닌 납득에 한결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새틴은 긴장이 풀린 자세로 일어섰다.
찻잔을 깔끔하게 비우고 법전을 챙겨 안으며 얼핏 뿌듯한 웃음까지 보였다.
당분간은 저 웃음을 해치지 말아야겠지.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새틴은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가시 아래로 숨어버릴 테니까.
그러나 그냥 편안하게 보내주기에는 루블리에도 속이 꼬였다. 밝아진 새틴의 옆얼굴에 대고 루블리에는 단서를 툭 던졌다.
“그런데 새틴. 옛날 일은 다시 고민해 봐. 내 기억하고는 좀 다른 것 같으니.”
삼 개월. 짧다 하면 짧아도 길다 하면 긴 시간이다. 출장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와서 새틴의 마음을 돌리는 거다.
한 지붕 두 마음이 각자 다른 속셈을 숨기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다음 날, 루블리에는 아침 일찍 떠났다.
집이 멀어진 만큼 법황청 근처의 신성 기사단에 도착해 기사들을 이끌고 출발하려면 평소 보다 서둘러야만 했다.
그래서 저택의 사용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다른 방에서 잠들어 있던 새틴은 인기척을 듣고 눈을 떴다.
본가를 떠나 신혼집에서 보낸 첫날 밤은, 잠자리가 낯설어 내내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종을 울려 라리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도 밖이 분주한데 저까지 손을 보탤 이유는 없었다.
조금 이따가 나가지 뭐. 굳이 루블리에와 이른 아침부터 불편하게 마주칠 일이 있나.
새틴은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라리가 늘 하는 모습을 봐선 쉬워 보였는데, 막상 제 손이 닿으니 모양 좋게 묶이진 않았다.
“지금 출발하신다고 마님을 깨워 말씀드릴까요?”
“됐어.”
졸린 눈으로 상큼한 바람을 맞으며 잠을 쫓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새틴은 눈을 끔벅였다.
루블리에가 서 있었다.
새틴은 얼떨떨해서 계속 눈만 끔벅였다.
루블리에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는 줄 알았는데.”
듣고 나니 더 황당했다.
자는 줄 알았으면 왜 들어와?
루블리에는 출장 준비를 완전히 끝마친 모습이었다. 결혼식에 입고 왔던 휘황찬란한 정복 대신 오늘은 짙은 군청색의 제복 차림이었다.
가슴에 금사로 신성 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것 외에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옷이었다.
그래서 등이 곧고 날렵한 루블리에의 체형이 도리어 더 잘 드러났다.
“다녀올게, 새틴.”
“네.”
손이 불쑥 다가왔다.
새틴이 멀뚱히 내려다보고 있자, 루블리에는 머리를 슥 흐트러뜨리고는 가볍게 돌아섰다.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뒤, 새까만 한혈마에 올라 달려가는 루블리에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가에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새틴은 조금 머쓱해졌다.
그래도 두 달 넘게 걸리는 먼 길을 가는데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정도는 할 걸 그랬나.
다녀오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