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아가씨,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말실수를 그만……. 마님, 차 한 잔 드려요?”
라리가 새틴의 안색을 살폈다.
“악!”
마님이라고?
일순 소스라친 새틴이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치고 나니 제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다만 완전히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참, 결혼했지. 맞아, 결혼했다. 이게 결혼을 한 건지, 결혼을 당한 건지 의아하지만, 어쨌든.
새틴은 이마를 짚었다. 몇 시간째 테이블에 앉아 두꺼운 책만 넘기고 있느라 머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팠다.
하지만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새틴은 깨알 같은 글자를 읽으며 드문드문 밑줄을 긋고 어떤 구절은 베껴 쓰기도 했다.
“아냐, 괜찮, 아니다, 차 줘. 마실래. 마음이 안정되는 종류로.”
얼렁뚱땅 엉망진창 결혼식이 끝나고서 새틴은 잠도 못 잤다.
이 위기를 어떻게든 타개해야만 했다. 그나마 라리가 계속 새틴의 시중을 들 사용인으로 따라와서 다행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곁에 있으면 안정을 찾을 수…….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평생 살던 본가에서도 안정을 못 찾고 이사 나온 마당이다.
그나마 온갖 수단을 뒤져 방법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 이 방법을 놓고 논의해야 하는데, 루블리에가 여태 연락이 없었다.
법황청에서 신성 기사단의 수장에게 입성하라는 전령을 보내서, 가는 김에 결혼도 보고하겠다는 말까지는 전해 들었는데 생각보다 그 용건이 많이 늦어지고 있었다.
초조해서 시계만 흘낏거리던 와중이었다.
“마님, 팔라딘께서 도착하셨대요.”
라리가 루블리에의 귀환을 알렸다. 새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만큼 루블리에를 기다린 날도 드물었다. 결혼 후 첫 대면이었다.
루블리에를 보면 어떤 첫마디를 꺼내게 될까.
새틴을 보면 어떤 첫마디를 꺼내게 될까.
둘 다 나름대로 고민했다. 어쩌다 보니 세상에서 제일 먼 부부 사이가 됐다. 평범한 인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루블리에보다는 새틴의 막막함이 컸다.
‘안녕하세요?’
그야 저보다는 안녕했겠지.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성사시킨 사람이 누군데.
‘오랜만이네요.’
며칠이나 됐다고 오랜만은 오랜만이야……. 더 오랜만이어도 되는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새틴은 신혼집이 예상과는 달리 훨씬 빨리 정해져서 놀랐다.
역시 세상에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었다. 집에 뭐라도 흠이 있었다면 그걸 핑계 삼아 좀 더 각자 집에서 살자, 했겠지만 카 딜론 가에서 별장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저택은 쓸데없이 완벽했다.
방의 벽면에는 쉬잔 부인의 살롱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어느 유명한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가구에는 장인의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카 딜론 가에서 온 사용인들도 빠릿빠릿하고 꼼꼼하게 새틴을 챙겼다.
그뿐일까. 원래 새틴과 기요른이 마련했던 신혼집은 부유층의 저택들이 모여 있는 구시가지 구역이었다.
기요른은 책을 좋아하고 공부가 낙인 사람이라 집을 꾸미면서 서재에 많은 공을 들였다.
기요른의 키와 잘 맞는 높이의 책상, 의자, 질 좋은 나무로 짠 책장과 만년필, 잉크병, 독서대, 문진에 이르기까지 도구들도 전부 최고급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탓에 후천적으로 눈이 약해 너무 강한 빛이 들어오지 않도록 얇은 커튼을 겹겹이 달았다.
실내 생활이 주를 이뤘기에 외부보다는 내부의 인테리어에 치중했다. 구시가지 내는 교통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어차피 마차를 타고 다니는 새틴에게는 그리 엄청난 이득이라 할 순 없었다.
그런데 카 딜론 가에서 준비한 신혼집은 교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책보다 운동을 좋아하고, 집 안보다는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쓰는 루블리에에게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커튼을 치며 빛을 섬세하게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이 집은 가리고 감출수록 죄악이었다.
전면의 창들을 활짝 열면 생동감 넘치는 자연경관이 창틀을 화폭 삼아 가득 담겼다. 호수와 자연림, 목장이 한눈에 펼쳐졌다. 구시가지 내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용인들 말로는 근처의 농가에서 갓 수확한 신선한 식재료들을 조달받기도 좋다고 했다.
신성 기사단과 법황청을 부지런히 다녀야 하는 루블리에가 다소간 불편해지겠지만, 그에게는 잠 한숨 안 자고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사흘을 달린다는 한혈마가 있었다.
이 정도의 거리는 아마 산책하는 수준일 터였다,
그러니 집도 마음에 들고 일하는 사람도 마음에 들고 환경도 마음에 드는데, 남편이 문제였다.
다시 생각해도 선 채로 꿈을 꾼 듯했다.
그날은 마치 뭔가에 홀린 양 결혼식이 진행됐었다. ‘응?’ 하는 사이 속전속결로 성혼 서약이 끝났고 재차 ‘응?’ 하는 사이 피로연에서 하객들에게 축하 인사를 듣고 있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에서 들러리로 전락하게 된 셀 위오 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식장에서 사라졌다.
기요른과 딜라일라가 언제 떠났는지는 아예 기억에서 삭제됐다. 돌이켜 보니 루블리에에게 고마운 점이 하나 있긴 했다.
기요른과 딜라일라에 대해 싹 잊게 해줬으니 말이다. 결혼식 축혼 성가를 부르려 나타난 옛 정혼자의 내연녀에 울화가 솟아 결혼식을 확 엎어버린 것 치고 의외로 충격은 크지 않았다.
둘이 잘 먹고 잘살든 못 먹고 못살든 그건 남의 문제고, 새틴은 앞으로 이 결혼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리하기에 바빴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새틴은 귀를 쫑긋 세웠다.
“오셨습니까.”
일렬로 도열한 사용인들이 루블리에를 맞이했다.
“새틴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들어오자마자 루블리에가 새틴부터 찾았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만 들어도 루블리에는 보폭이 넓었다.
그는 삽시간에 나타났다. 새틴은 책을 끌어안은 채로 엉거주춤 루블리에와 마주쳤다.
엄마야!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만 새틴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당황할 까닭이 뭐가 있어, 피차 결혼하고 만나는 건 처음인데.
지는 기분은 싫다. 새틴은 표정을 태연하게 바꾸고서 고개를 들었다.
“또 보네요, 카 딜론 경.”
루블리에가 피식했다.
“왜 아직도 카 딜론 경이야?”
“그럼요?”
무심코 입에 붙은 대로 카 딜론 경이라고 루블리에를 부르던 새틴이 아차 했다.
그래, 결혼했지.
자꾸 잊어버리는 건지, 잊어버리고 싶은 건지 제 마음을 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젠 루블리에가 남편이었다.
“고마워. 결혼하고도 날 팔라딘이라고 굉장히 공경해줘서 말이야.”
거리감의 표현이 공경의 표현으로 둔갑했다. 새틴은 샐쭉해졌다.
“법황청에 다녀왔는데, 할 얘기가 있어.”
루블리에가 먼저 화제를 꺼냈다. 결혼하자마자 출장을 가게 됐다는 법황청의 명령을 새틴에게 알려야 했다.
“저도 할 얘기 있어요.”
준비한 용건이 있었던 새틴도 동의했다. 습관처럼 라리를 찾다가 새틴은 그냥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용인을 불러 지시했다.
“여기 차 좀 준비해 줘.”
“네, 마님.”
사용인이 새틴의 다 마신 찻잔을 치우고, 새로운 차를 두 잔 우려 가져왔다. 곁들일 설탕과 데운 우유도 함께였다.
“마님, 따뜻한 밀크티로 드셔보세요. 근처의 목장에서 매일 새로 짠 우유를 가져오거든요.”
새틴은 조그만 은잔에 담긴 우유를 노려보았다.
라리가 있었다면 우유를 가져오지 않았을 텐데.
“됐어, 나는 우유를 안 먹어서.”
생우유는 맛이 없어 안 먹었어도 우유를 넣고 달콤하게 우린 밀크티는 좋아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냥 모든 우유가 보기도 싫어 아예 안 먹게 됐다.
‘넌 우유 많이 마시고 키 좀 커야겠더라.’
눈앞의 이 남자 때문에.
처음부터 루블리에가 짜증 났던 것은 아니었다.
파수꾼 가문 내의 미묘한 세력 다툼을 이해하기에, 당시 새틴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에 불과했다.
열두 살은 보통 첫사랑조차 겪어 보지 못한 나이다. 그 어린아이에게 집안끼리의 세력이 이렇고 저렇다고 가르쳐줘 봤자 어른들의 사정이구나, 싶은 것이다.
다만 부모님이 카 딜론과 거리를 두라고 하니 어느 정도 경계하는 마음은 있었다.
고만고만한 신입생들 안에서 루블리에는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먼발치에서도 삐죽 솟은 검은 머리가 보였다. 새틴은 생각했다.
저 애가 그 ‘카 딜론’이구나.
시작은 사소했다. 아카데미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수업을 듣는 교육실, 학생들이 매일 기도를 드리는 교당, 마지막으로 기숙사까지 용도를 나누자면 대략 이러했다.
하지만 자잘한 부속 건물들이 많아 신입생 시절에 길 한 번 안 헤매 본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새틴도 몇 번 길을 잃었다. 집에서는 사용인을 부르면 편의를 다 해결해 주지만, 아카데미는 집만큼의 편의를 바랄 수 없었다.
교육실을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조금 헤매다 복도를 총총걸음으로 지나가고 있는데, 하필 90도로 꺾이는 모퉁이에서 뛰어오던 사람과 맞부딪혔다.
상대는 별로 힘들지 않게 중심을 잡고 섰다. 다만 몸이 가벼운 새틴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쿵 넘어졌다. 체격 차이가 커서 더 아팠다.
“……아야.”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려는 새틴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엉겁결에 올려다보니 아는 얼굴이 있었다.
루블리에.
눈썹과 눈매가 날카로워 첫인상이 센 소년은 한 손으로 새틴의 손을 덥석 붙잡아 벌떡 일으켰다. 검술의 귀재라더니, 진짜로 악력이 엄청났다.
“너무 작아서 안 보였잖아. 꼬맹이.”
그러고서 루블리에는 달려가 버렸다. 카 딜론 출신이기에 눈치 보지 않고 건넬 수 있었던 장난 섞인 놀림이었다.
더불어 작은 키에 가뜩이나 콤플렉스가 있던 새틴에게, 그가 사소하면서도 확실한 밉상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였다.
이후로 종종 마주칠 때마다 루블리에는 새틴을 향해 늘 같은 인사를 했다.
“꼬맹이, 왔네?”
“…….”
처음에는 새틴이 피해 다녔다. 유난히 키가 작아 남들을 다 올려다봐야 하는 새틴에게 인상과 덩치 모두 남다른 루블리에는 위압적이었다.
수업이 겹치지 않으면 다행이었고, 수업이 겹치면 멀리 떨어져서 앉았다. 어차피 새틴은 늘 기요른과 붙어 다녔다.
오히려 학생들이 죄 무서워해 혼자 다니는 쪽은 루블리에였다.
하지만 루블리에는 새틴이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종종 말을 걸어왔다.
더는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어떤 날 루블리에는 저녁 만찬이 차려진 홀에서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 편식하고 있는 새틴에게 참견했다.
“깨작대지 말고 먹어. 그러니까 남들 클 때 혼자 못 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