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4. 이제 이혼할까요?
“축하해. 하루 사이에 어마어마한 결혼식을 치렀던데? 아카데미 시절에 짝사랑 거하게 하더니만 역시 꿈은 이루어지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델 마레 가의 결혼식에 내가 직접 참석할 걸 그랬지…… 흐윽.”
풋, 흐읍. 웃음을 참느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화려한 금발을 루블리에는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로 휴가는 못 내줄망정 장기 출장이라니.”
“그러게 결혼한다고 미리 좀 알려주지 그랬나…… 아하하하! 그 얼굴, 그 몸뚱이 안 쓰고 썩혀두기에 아깝다 했는데 드디어 써먹을 날이 왔군.”
어깨를 들썩이던 남자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진짜 자네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어!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그 자리에 내가 없었던 게 한이라니까? 세상에, 새틴 델 마레. 자네만 보면 눈가가 새치름해지던 그 아가씨와 자네가 결, 오죽 난리였으면 그 소문이 여기 법황청까지 세 시간도 안 돼서 들어왔, 그나저나 자네 결혼식을 내가 못 본 게 말이 돼?”
웃느라고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늘어놓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이 남자가 바로 현 법황인 디오니시오 3세의 첫째 아들 키리온 대주교로서 훗날 법황이 될 후계자였다.
법황의 자식들은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대주교의 직위를 승계한다.
자식들 사이에 계승 서열은 없었다. 왜냐하면 차기 법황이 될 지도자는 신탁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이나 성별을 가리지 않고, 신탁은 항상 법황에 가장 어울리는 재목을 선택했다. 따라서 첫째로 태어나든 둘째로 태어나든 순서는 중요치 않았다.
그럼에도 키리온을 차기 법황으로 점치는 것은, 키리온의 동생이 형에 비하면 능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좋게 말해 부족하다였지, 눈과 귀가 없는 장소에서는 보다 직설적인 소문이 돌았다. 형은 잘나도 너무 잘났는데 동생은 한참 덜떨어져서 큰일이라고.
그러니 신탁은 반드시 키리온을 지목할 것이다.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키리온은 일찌감치 법황의 손발이 되어 동생 몫까지 공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숨넘어가게 웃던 키리온이 얼굴을 수습하고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려놓았다.
“늦었지만 축하금은 넉넉하게 내지.”
“축하금은 됐고 휴가가 필요하다니까.”
말하는 사람도, 받아치는 사람도 스스럼없이 굴었다. 어떤 농담도 무례가 되지 않는 사이. 격식을 차리면 그게 더 서운한 사이.
루블리에와 키리온은 아카데미에서 만나 지금까지도 연을 이어 온 절친한 친구였다.
새틴에게 기요른이 있었다면, 루블리에에게는 키리온이 있었다.
루블리에, 새틴, 기요른. 아카데미 내에서 가문의 위명이 자자한 이 셋을 상대로 함부로 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르치는 교수들조차 비위를 맞췄으니 말을 다 했다.
심지어 당시 검술이라고는 젬병이었던 기요른과의 시합에서, 가문의 위세에 겁먹어 일부러 져 주는 학생들이 속출했을 정도였다.
기요른이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정정당당하게 겨뤘으면 초반에 탈락하고도 남았을 실력으로 루블리에가 있던 최종전까지 강제 진출했던 데에는 이런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그 시합으로 기요른과 루블리에, 둘 다 피를 봤다.
실력이 모자랐던 기요른은 만인 앞에서 망신을 당했고 루블리에는 새틴에게 미운털이 박혔다.
하지만 루블리에가 마냥 잃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날 루블리에는 키리온과 연을 맺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어질 벗의 연을.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채도 높은 금발. 고위 성직자의 직위를 상징하는 하얀 수단.
눈앞의 남자가 루블리에와의 만남을 청했을 때, 루블리에는 이미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파수꾼 가문 자제들을 고개 숙이게 할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법황의 첫째 아들. 키리온 대주교였다.
십대 초중반의 나이라도 알아야 하는 것은 다 알았다.
“루블리에 카 딜론이 키리온 대주교 예하를 뵙습니다.”
루블리에의 나이가 두 살 어렸는데도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시선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루블리에가 몸을 낮춰야 했다.
“이겼는데도 웃지 않네?”
훤칠하고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던 키리온이 대뜸 던진 첫 마디였다.
“그럴 만도 해. 내가 봐도 아주 시시한 시합이었거든.”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키리온은 루블리에의 첫인상을 이렇게 밝혔다.
날카롭게 솟은 눈썹, 고집스러운 이목구비에서 야생마와도 같은 기질이 보였었다고. 특히 눈매가 건방져서 아주 마음에 들었노라고.
“그대가 바로 현 신성 기사단의 수장이 지목한 후계자로군.”
원래부터 우승자는 루블리에로 점쳐졌었다.
다섯 살부터 검을 쥐고 배운 재능의 소유자를 이길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나는 차기 법황이 될 후계자, 그대는 차기 신성 기사단의 수장이 될 후계자. 신성 기사단의 수장은 대대로 법황의 검이지.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내 검이로군.”
나이 어린 대주교의 의외로 고아한 말투를 구사했다. 동생의 몫까지 기대를 한몸에 짊어진 법황의 첫째 아들인 까닭이다. 나이를 넘어선 성숙함은 어찌 보면 당연히 요구받는 덕목일 테다.
키리온은 유심히 루블리에를 지켜보았다. 그다음, 활짝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고상하던 화법이 또래 소년의 허물없는 말투로 바뀌었다.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나는 내 검에게 주인보다는 친구가 되고 싶은데, 어때? 예하 따위 집어치우고 키리온이라고 불러, 루브.”
그리고 확실히 이쪽이 키리온과 훨씬 잘 어울렸다.
“좋아, 키리온.”
루블리에가 대뜸 키리온의 손을 맞잡았다. 법황의 아들을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시원스러운 속도였다.
경쾌하게 손을 내밀던 어린 키리온의 모습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다섯 파수꾼 가문 중, 키리온이 친구로 둔 사람은 루블리에가 유일했다.
이러니 키리온이 루블리에의 결혼식을 두고두고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 세간의 스캔들은 제쳐놓고서라도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웬만하면 막 결혼한 새신랑을 집에 보내주고 싶지만,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을 누가 감히 대리하겠나. 루브, 자네가 바로 성전의 검이요, 법황의 군대 그 자체 아닌가. 하여간 미안하게 됐어. 나는 당분간 법황청에서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켜야 해서.”
친구 사이라 툴툴거리긴 했어도 루블리에는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을 잘 알고 있었다. 루블리에가 심각하게 물었다.
“법황 성하께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가?”
“안 좋을 정도는 아닌데 아무래도 기력이 예전만은 못 하시지. 걱정이야.”
“다들 걱정이 크겠는데.”
“연세가 연세시니 도리 없지 뭐. 추기경께서 말씀하시더군.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그러게 조금만 일찍 힘내시지, 자식들을 너무 늦게 보셨어. 루브, 자네는 이런 일 없게 미리미리 서두르도록 해. 근데 자네도 카 딜론의 장자고 부인은 델 마레의 외동이지. ……후계자 말 나오면 조금 머리 아프겠는데?”
루블리에가 단호하게 대화를 받았다.
“말이 안 나오게 해야지.”
그리고 그건 아직 성급한 걱정이었다. 지금 루블리에에게는 더 큰 걱정이 따로 있었다.
키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자네가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어. 그리고 나도 그 프리마 돈나에 대한 소문은 진작 들었는데 말이야. 일에 치여 사느라 여태껏 공연 한번을 못 봤었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여잔가 궁금했는데 기요른 셀 위오, 그 샌님인 줄로만 알았던 도련님이 선수를 쳤군. 뭐, 아쉽지만 그 덕분에 자네 결혼식이 성사됐으니 자네를 위해서는 잘된 일이겠지.”
대화 도중 등장한 딜라일라의 존재에 루블리에가 미간을 굳혔다. 그의 친구는 어지간한 부분은 다 괜찮은 남자였으나 아카데미 시절 상당한 여성 편력이 있었다.
루블리에는 즉각 경고했다.
“위험한 여자야, 키리온.”
“자네 입에서 위험한 여자라는 말도 나오나? 신기한데. 어쨌든 그래, 위험할 정도로 아름답고 재능 많은 여자라더군. 그러니 기요른 같은 이도 홀렸지. 자네 표정이 무서우니 일단 이 이야기는 그만둬야겠어.”
키리온이 물 흐르듯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이거 신혼 시작부터 새신부를 한동안 독수공방시키는 셈이 됐으니 미안해서 어쩌지? 어마어마하게 원망 듣는 거 아냐?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어? 신혼집 꾸밀 시간도 없었지 않아?”
신혼집은커녕 가족들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결혼식부터 마쳐버렸다.
준비된 피로연을 한 뒤에 새틴과 루블리에는 일단 각각의 집으로 흩어졌다.
발보다 빠른 소문은 루블리에가 돌아가기 전에 벌써 본가로 도착해 있었다. 가족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루블리에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정확하게는 새틴의 신분이 가족을 강제로 납득시켰다. 델 마레와의 결합은 카 딜론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델 마레라면 명문가 중의 명문가니 최고의 신붓감이지. 델 마레와 셀 위오가 연합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아. 한데 네가 웬일이냐? 별로 결혼 생각도 없다더니?”
“결혼 생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나와’ 결혼 생각이 없었을 뿐이지. 그래서 말인데, 저 독립합니다.”
새틴이 기요른과 살려고 준비한 집에 들어가서 살기는 싫었다. 가구를 채우면서 새틴이 이건 기요른과 같이 써야지, 하고 상상했을 게 아닌가. 남편이 바뀌었는데 당연히 집도 바뀌어야지.
하여 부랴부랴 신혼집을 정해 새틴에게 전달하고서 법황청에 입성했는데 팔라딘에게 내려진 장기 출장이 덜컥 발목을 잡아버렸다.
루블리에는 예감했다. 신혼 생활이 시작부터 장렬하게 망했다.
지금쯤 새틴은 아마 새집에 들어왔을 것이다. 거기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리고 출장을 가게 됐다는 소식을 전하면.
“……오히려 혼자 있게 됐다고 좋아할걸, 새틴은.”
젠장.
그랬다. 후계자를 논할 걱정은 걱정 축에도 못 들었다. 새틴의 기쁨이 곧 루블리에의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