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괜찮아요. 그 자리는 원래 새틴님의 자리죠. 도리어 기요른님의 혼사가 저 때문에 망가지면 전 새틴님을 뵐 면목이 없을 거예요. 저는 제 주제를 잘 알고 있답니다. 화려한 무대 위에서 공주님을 연기하고 있어도 실제의 저는 일개 평민일 뿐이니까요. 제가 욕심낼 수 있는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는 분간하고 있어요.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절 그 남자의 손에서 꺼내주신 것만으로도 기요른님은 제 인생의 구원자세요.’
‘딜라일라…….’
‘그저 저를 버리지만 마세요. 제가 원하는 건 그뿐이랍니다.’
딜라일라의 속삭임이 사근사근 이어졌다. 부드럽고 안쓰러워 귀가 녹을 듯했다. 기요른은 제 가슴에 매달리듯 안긴 딜라일라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은 빠르게 통했다. 고개를 든 딜라일라가 새로이 입을 맞춰왔다.
입맞춤의 달콤함도 딜라일라를 통해 처음 배웠다. 새틴과는 이런 아기자기한 행위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찬란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알고 보면 누구보다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딜라일라였다.
새틴처럼 든든하게 받쳐줄 가문이 있지도 않고, 지금은 유명세가 높다 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인기란 본래 허상과도 같은 것이다.
기요른마저 손을 놓으면 그녀는 정말 갈 곳이 사라진다.
기요른은 입술을 벌리고 어설프게 혀를 움직였다. 딜라일라는 기요른의 뒤통수에 손가락을 찔러넣으며 소곤거렸다.
‘입술의 힘을 빼고 가만히 계세요.’
그녀는 능숙하게 기요른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머릿속이 뭉근해지는 와중에도 기요른은 딜라일라를 단단히 붙들었다. 이 감각을 놓칠 수가 없었다.
그는 약속했다. 절대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평생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오래전 정해진 운명을 거부할 순 없었다. 그는 등 떠밀려 웨딩 로드에 섰다.
신부인 새틴도 죽을상으로 결혼식장에 끌려온 티가 역력했다.
신랑과 신부, 둘 다 원치 않는 결혼이었지만 취소하기에는 이미 강을 건넜다.
양가 부모님은 끝끝내 자식들을 추기경 앞에 세웠고 하객들은 새로운 부부를 구경하기 위해 모였다.
그야말로 바늘방석이었다. 얼굴이 뜨끔거리도록 하객들은 기요른을 주시했다.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기요른은 가능한 한 빨리 이 결혼식을 끝내고 싶었다.
그랬는데.
‘저는 못 하겠습니다, 이 결혼.’
뺨에 이어서, 새틴이 장렬하게 기요른의 뒤통수마저 후려치고야 말았다.
그녀의 한마디에 딜라일라와 기요른을 엮어 수군대지 않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실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다시.
‘그녀는 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달리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성혼 서약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루블리에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실제로 새틴이 루블리에와 연인 관계가 아님은 기요른이 가장 잘 알았다.
루블리에만 나타나면 새틴은 일단 정색부터 했으니까. 오히려 둘 중 루블리에와 친한 사람은 기요른이었다.
친구로서 이 사달을 적절히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나보다고 기요른은 내심 짐작했다.
이제는 이 엉망진창인 결혼식이 어떤 식으로든 한시바삐 정돈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새틴은 제 부모님과 기요른의 부모님을 곁눈으로 살폈다.
이게 뭔 사태인가, 싶어 멍해 있던 양가의 부모님은 서서히 계산을 마쳐가면서 아까보다 훨씬 여유를 찾았다.
특히 새틴의 부모님 얼굴에는 꽃분홍의 화색이 돌았다.
어차피 터버린 결혼이다. 한데 다 망한 사위 자리에 꿩 대신 닭도 아니고, 루블리에 카 딜론이라는 공작새가 날아들어 왔다.
어차피 셀 위오와의 동맹 노선은 날아갔다. 이런 판국에 카 딜론은 노선을 바꿔서라도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손님인 것이다.
셀 위오 측도 마찬가지였다. 아들을 일방적으로 망신시킨 새틴이 마음을 바꿔먹고 며느리로 들어온다 해도 예쁘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루블리에가 새틴과 기요른에게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헤어진다는 핑계를 만들어 정리를 해줬다. 덕분에 이 많은 하객들 앞에서 기요른의 집안도 최소한의 체면은 차렸다. 그러나 여기까지일 뿐이다.
이 결혼이 엎어져도 기요른은 절대 딜라일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지 못한다.
델 마레를 놓치고 델 마레와 카 딜론이 연합하는 꼴을 눈앞에서 봤는데 몸뚱어리 빼곤 가진 게 없는 딜라일라를 며느리로 들이기에는 배가 너무 아프니까.
카 딜론 가문에서는 루블리에가 대표로 참석하는 바람에 이 난데없는 결혼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추기경은 결국 결혼식 하나를 성사시켰으니 다행이고, 하객들이야 누가 어떻게 결혼하든 간에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결혼식은 이전에도, 이후로도 다신 나오지 않을 터였다.
가문 사이의 세력 다툼에 낄 일이 없는 하객들은 보도듣도 못한 일련의 소동에 웃겨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새틴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가문의 수치가 될 뻔한 상황에서, 본인의 명예를 최대한 지키면서도 보란 듯이 바람 핀 정혼자에게 파혼을 선언한 결과가 되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었다.
단 하나. 새틴이 루블리에와 결혼한다는 전제하에.
“새틴 델 마레.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루블리에가 다시 청혼했다. 이 청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이중 삼중으로 새틴을 짓눌렀다.
어쩌지? 이제 어쩌지?
새틴은 거절하고 싶다는 심정을 담아 부모님의 눈치를 보다가 찔끔했다.
루블리에의 청혼을 걷어차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 송곳처럼 번뜩였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가능한 거야, 이런 결혼이?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새틴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머뭇거렸다. 이때였다. 기요른의 시선이 새틴을 언뜻 스쳐 갔다.
기억났다. 조금 전 추기경의 축사를 들으면서 딜라일라와 애틋한 감정을 주고받던 그였다.
새틴을 사이에 두고 저들은 서로가 안타깝고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 이성을 찾자. 어떻게 해야 기요른 셀 위오에게 복수가 될지 잘 계산해야 해.
정신이 돌아오자 뒤편으로 밀어두었던 분노가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었다.
파혼에 대한 뒷감당을 홀로 지기는 억울하다. 새틴은 손을 내밀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부케를 받아 안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절반은 오기였고, 절반은 뒷수습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청혼부터 결혼까지 역대급의 속전속결이었다.
쓰레기 치우려다가 더한 남자를 주워가는 이 기분은 과연 착각일까…….
“기요른. 결혼식에 들어간 셀 위오 가의 비용은 카 딜론에서 상계 받도록 하지.”
루블리에가 기요른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요른이 얼떨떨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
“천만에.”
루블리에가 기요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지.”
일순 묘한 기분에 휩싸인 기요른이 루블리에를 뒤돌아보았을 때, 루블리에는 그새 새틴에게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마침내 새틴은 루블리에와 나란히 추기경을 마주했다.
갑작스럽게 서게 된 자리인데도 신성 기사단의 정복이 기요른의 예복 뺨치도록 휘황찬란해 결혼식 복장으로 손색없었다.
“루블리에 카 딜론. 그대는 이 자리에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섰습니까?”
루블리에가 대답했다.
“네.”
“루블리에 카 딜론. 그대는 그대 유일한 부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네.”
두 번의 대답 모두 깔끔했다. 이번에는 추기경이 새틴을 응시했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이 자리에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섰습니까?”
아까와 같은 질문, 그러나 아까와는 다른 대상이었다.
“……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그대 유일한 남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
새틴은 한숨을 숨겼다.
“……네.”
영혼을 잃은 대답이 멍하게 흘러나갔다. 새틴의 대답이 늦어지자 잠시 긴장했던 추기경이, 마침내 완성된 결혼식의 끝에서 뚜렷하게 안심했다.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합니다.”
성혼이 공표되었다. 새틴과 루블리에의 결혼이었다.
새틴은 아득해진 안색으로 루블리에의 팔에 손을 얹고서 웨딩 로드를 천천히 걸어 퇴장했다.
수습하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해도 그렇지, 대체 이게 무슨 막장이야?
신랑이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라져 버렸다.
하물며 남편이 루블리에,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이다. 기요른의 결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파급력이 일 것이다.
새틴은 당분간 극장이나 살롱에 발길을 끊기로 결심했다.
그야말로 환장의 결혼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