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12)

<10화>

웨딩 로드 앞으로 걸어나온 루블리에가 새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용은 막장인데 신부와 신부의 남자가 선남선녀라 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하객들은 엉겁결에 탄성을 질렀다.

반면 새틴은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이내 웨딩 아치에 부딪히면서 갈 곳을 잃어버렸다. 웨딩 아치에 꽂혀 있던 꽃잎들이 화르르 떨어지면서 새틴과 루블리에를 장식했다.

하객들에게는 감탄스러운 효과였으나 새틴으로선 억울해서 팔짝 뛸 일이었다.

“새틴 델 마레.”

그가 새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꼬맹이도 아니고 새틴도 아니고 새틴 델 마레. 완벽하게 예의를 갖춘 호칭이었다.

그가 떨어진 부케를 주워 새틴에게 바치며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설마설마했더니 그놈의 설마가 끝내 사람을 잡았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훤한 대낮에 별이 보였다. 새틴은 기요른의 부정을 알게 된 날, 라리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남자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해야 제일 좋은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라리는 대답했다.

‘우리 어머니가 해주신 이야긴데, 그럴 땐 그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와 뒹굴래요. 그게 가장 타격이 크다고요.’

그땐 마냥 헛소리인 줄로만 여겼지.

루블리에와 기요른은 아카데미에 같이 입학해, 같이 졸업한 친구였다.

맙소사. 엉터리로 치부했던 조언이 현실이 되게 생겼다.

새틴은 울컥해서 항의하려다 주변의 눈치를 살피곤 입을 다물었다.

새틴의 반응을 듣기 위해 가족이며 하객들이 죄 제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방금 이 결혼은 안 된다고 깽판을 놓은 직후다. 제 말 한마디에 실릴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살벌했다.

다급하니 저절로 복화술이 구사됐다.

“무슨 짓이에요, 이게?”

하객들을 등 뒤에 두고 새틴과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루블리에는 형편이 좀 더 나았다. 무릎을 꿇고 있던 그가 새틴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어차피 누군가와 결혼을 하긴 해야 하잖아. 그럼 나랑 해.”

“미쳤어요? 남의 결혼식에 이게 무슨 난장인데요?”

“남의 결혼식은 방금 끝났고, 이젠 내 결혼식이지.”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새틴이 여전히 말을 잃고 서 있자, 루블리에가 느긋이 덧붙였다.

“네 독단으로 델 마레는 하루아침에 셀 위오와 척을 졌고, 너는 단짝 친구와 영영 갈라섰지. 후자야 내 마음에 든다만 델 마레 가문의 입지는? 셀 위오를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나? 네 부모님은 아닐걸.”

말투는 태연자약한데 내용은 거침없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따박따박 귀에 박혔다. 새틴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제 현실이었다.

“반면에 기요른은? 기요른 정도 되는 귀족은 정부를 들여도 별문제 안 돼. 오히려 네가 흥행을 시켜준 덕분에 저 프리마 돈나만 이름값을 올릴 뿐이지.”

알고 있다. 자신만 약혼자를 잃고, 뒷감당이란 책임만 지고 끝나는 거다.

“네가 원하는 게 고작 그런 결말이야?”

새틴은 반문했다.

“……그래서요?”

“내가 해결해 준다고. 날 믿어.”

“날 도와서 그쪽이 얻는 이득은 뭔데요?”

“나?”

루블리에가 빙긋 미소했다. 여전히 뜻 모를 얼굴로.

“너와의 결혼.”

이건 또 무슨 수상쩍은 소린지 모르겠다.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새틴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루블리에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했으면 너는 충분히 노력했어, 새틴.”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보다 목소리가 한결 뚜렷했다. 하객들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이 결혼식에 최선을 다했지. 그렇지?”

왜 큰 소리로 이야기하나 했더니만 마지막 질문은 새틴을 떠나 하객들을 겨냥해 있었다. 그제야 새틴은 루블리에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객들이 눈짓을 교환했다. 오늘 처음 듣는 너무 많은 이야기에 깜짝 놀랐던 사람들이 은근한 동의를 표했다.

“누구 좋아하는 게 마음처럼 되는 일도 아니고, 그 와중에 집안 생각해서 감정 정리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도 신부는 전혀 티를 안 냈잖아.”

“그에 비하면 셀 위오는 너무했어.”

이 와중에 누군가 기요른의 흉을 보다가 지레 찔끔하고선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방금 팔라딘께서 하신 말씀이 진실입니까?”

추기경의 질문이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새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섣부르게 대답했다가 어떤 반응을 듣게 될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혹시라도 기요른과 싸잡혀 추궁을 당하는 건 아닐까.

새틴은 잠시 답을 유예하고서 추기경의 동향을 살폈다. 추기경이 화제를 이어갔다.

“두 사람에게 서로 정인이 있었다면, 늦기 전에 각자의 행복을 찾는 것도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그의 선택은 중재였다. 하지만 여전히 새틴은 안도를 해야 하는지, 부정을 해야 하는지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결혼을 한다와 안 한다의 가능성만 생각했을 뿐, 결혼할 상대가 기요른이냐 루블리에냐의 선택지는 여태껏 안중에도 없었다.

이 순간의 선택에 따라 당장 내일이 달라진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반면 루블리에는 확고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언하면서 루블리에는 기요른을 향해 시선의 끝을 흘렸다.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 결혼식이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의문인 건 기요른도 매한가지였다.

새틴이 이 결혼은 무효라고 판을 깨부수고, 추기경의 질책 섞인 눈초리를 받은 순간에는 가슴이 턱 막혔다. 막막하다 못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루블리에가 시의적절하게 등장해 사람들의 이목을 싹 쓸어모으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기요른이라고 새틴과의 결혼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부족한 부분 없는 신붓감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기억조차 안 나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새틴은 기요른의 정혼녀로서 존재했다.

결혼한다면 그 상대는 당연히 새틴이다. 딜라일라를 만나고서도 이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러나 딜라일라의 후원자가 딜라일라를 유린하려 했던 날.

그날을 기점으로 기요른도 생각했다. 새틴과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딜라일라는 정말 위험했었다. 인간으로서도 남자로서도 차마 외면하기 힘들 만큼.

그가 대기실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엉망으로 찢어진 무대 의상 차림으로 후원자의 손에 머리채를 붙잡혀 얻어맞으며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새틴은 그의 해명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뺨부터 후려갈겼다.

새틴의 앙칼진 성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대화를 시도할 마음도 없이 다짜고짜 손부터 올릴 줄은 예상 밖이었다.

아픔보다는 충격이 컸다. 돌이켜보면 볼수록 새틴이 무서웠다. 새틴의 옆에서 숨 쉬며 살아갈 자신이 사라졌다.

심지어 새틴이 집에 가서 일러바쳤는지 델 마레의 가주와 부인이 기별도 없이 달려와 셀 위오 가문을 벌컥 뒤집어 놓기도 했다.

새틴은 델 마레 가의 외동딸이었다. 귀하디귀한 외동딸을 모욕했다며 새틴의 부모님은 펄펄 뛰었다.

‘아가씨를 모욕할 의도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바라신다면 제가 아가씨를 만나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딜라일라까지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울며 사정해서 소동은 간신히 가라앉았다.

게다가 델 마레의 외동딸이라는 신분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기요른이 새틴의 정혼자로 낙점된 데에는 부모님끼리의 친분과 이익도 한몫했지만, 델 마레를 이어받아야 할 새틴의 남편으로 비슷한 가문의 차남이 필요했던 까닭도 있었다.

일종의 데릴사위인 것이다. 결혼하고 나면 셀 위오가 뒤에 있긴 해도 델 마레의 영향력이 훨씬 커진다.

과연 새틴이 딜라일라를 곱게 보아 넘길까.

기요른은 회의적이었다. 델 마레와 겨우 타협을 마치고 난 다음 기요른도 뒤에서 부모님께 솔직히 말씀드렸다.

이 결혼식, 그만두면 안 되겠느냐고.

당연히 기요른의 부모님은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그깟 가수 하나 때문에 델 마레를 버리겠다고? 네가 제정신이냐?’

‘방식이 격해서 그렇지 델 마레 쪽의 항의가 틀린 말은 아니다. 새틴과 같은 아이가 있는데 평민 여자와 결혼식 사흘 전에 스캔들이라니? 네가 어떻게 이렇게 집안을 망신시켜! 델 마레 사람들 앞에서 도무지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그 여잘 내보내라. 델 마레와 불화의 씨앗이 될 여자라면 우리가 내보내는 게 나아.’

결혼식 취소하려다가 본전도 못 찾을 뻔했다. 당연했다. 셀 위오에서도 델 마레를 포기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한바탕 욕을 들어먹고서 기요른은 기가 죽어 딜라일라에게로 돌아왔다.

델 마레와 셀 위오, 양쪽에서 동네북 취급을 당하고서도 딜라일라는 기요른에게 키스하며 그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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