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눈을 뜨고서 똑바로 반복했다.
“그럴 자신 없습니다.”
저질렀다.
“신의 성전에서 거짓을 고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못 하겠습니다, 이 결혼.”
기어이 저지르고야 말았다.
“신의 이름으, 허억?”
새틴이 네, 하고 대답할 거라 지레짐작하고서 성혼을 선언하려던 추기경이 기묘하게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하객들도 귀를 의심했다. 새틴의 부모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무의식중에 성혼 선언을 기다리다 눈을 껌뻑이고는 일제히 경악했다. 기요른은 아예 입을 떡 벌린 채 자리에 못 박혔다.
내내 딜라일라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던 아련한 눈빛이 이제야 오롯이 제게로 향했다.
새틴은 기요른의 눈길을 태연히 받아넘겼다.
어쩔 건데. 이제 와서.
일단 지르고 시작한 선언이라 주워 담을 길도 없다. 작정하니 차라리 편해졌다.
아까만 해도 딜라일라의 스캔들을 소곤소곤 속닥거리던 하객들은 더 이상 눈치도 보지 않았다.
“어떻게 되는 거야? 결혼하자마자 이혼이야?”
“이혼은 무슨. 성혼 선언을 안 했으니 파혼이지.”
“이혼이든 파혼이든 말이 돼? 결혼식장에서…….”
“뭐 어때. 우리야 재미있으면 됐잖아.”
“기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델 마레 가에서 열 받을 만은 했어.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빼도 박도 못할 때 스캔들이었으니. 치사하게.”
여론은 은근히 새틴에게 호의적이었다.
스캔들이 좀 더 진행되고, 기요른과 딜라일라 사이에 좀 더 많은 일화가 있었다면 신분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피어난 사랑으로 포장됐겠으나 당장은 외기러기 신세가 된 새틴의 처지가 더 부각되었다.
이 기세를 잘 타야 했다. 새틴은 추기경에게 단언했다.
“신의 대리자 앞에서 거짓된 언약을 할 순 없습니다. 그는 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추기경의 면전에서 새틴은 대놓고 기요른과 딜라일라의 관계를 암시했다.
얼굴이 퍼렇게 질린 기요른의 부모님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틴의 부모님도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천하의 딜라일라도 하객들이 모조리 저를 쳐다보며 웅성거리는데 계속 미소 짓지는 못했다. 조금 놀란 듯 새틴을 쳐다본 그녀는 이내 태도를 가다듬고서 시선을 단속했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애처롭기 그지없을 모습이었다.
기요른도 딜라일라와 비슷했다. 난처함, 낯부끄러움, 당혹함에 얽매여 눈동자가 길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추기경도 눈과 귀가 어둡지는 않았다.
속세에서 다소 멀어 거리의 소문에 어둡다 해도, 하객들의 수군거림과 교당 내의 분위기가 이리도 뚜렷한데 눈치는 애저녁에 챘다.
하지만 파수꾼 가문끼리의 결합을 축하하기 위해 법황이 직접 명한 주례였다.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러 온 자리였지, 결혼식의 파탄을 지켜보라고 온 자리가 아니었다.
추기경은 곤혹스러움을 감추고 일단 새틴과 기요른을 중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자, 나이 든 사람의 지혜라 생각하고 들어보십시오. 사랑이란 쉽게 단정을 내릴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마다 그 의미와 형태가 다르기에 현재의 단편적인 감정만으로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됩니다. 보통은 불길처럼 열렬하게 타오르는 사랑을 염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잔잔히 오래 가는 감정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떨리는 감정이 사랑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든든하고 믿음직한 감정이, 또 누군가에게는 한결같은 편안함이 사랑이기도 합니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사랑을 결론짓기에는 아직 어립니다.”
부르기는 새틴의 이름을 불렀으나 추기경은 기요른을 더 많이 응시했다. 무언의 책망에 기요른이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더라도, 신의를 다해 살다 보면 곁을 지켜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서약은 당장의 감정을 넘어, 앞으로 계속해서 상대를 사랑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추기경에게서는 어떻게든 이 결혼식을 무탈하게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마저 엿보였다. 이 결혼식 하나에 너무 많은 사람들의 체면이 달려 있었다.
새틴은 가족을 향해 짧게 눈길을 흘렸다. 추기경과 하객들이 지켜보는 앞이라 차마 소리를 내어 부르지는 못하고, 부모님이 입술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새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취소해!
가족석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건너편의 셀 위오 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틴이 기요른의 부정을 폭로하면서 법황의 대리인 상대로 대놓고 망신을 당하게 된 그의 부모님은 도끼눈을 뜨고 새틴을 노려보았다.
배 속 자식들을 태중 정혼으로 묶어가며 만들었던 두 집안의 유대가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단순히 결혼 하나 무효로 만들고 끝날 사태를 넘어섰다. 부모님끼리 하하 호호 웃으면서 우리 아이들이 서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네요, 하고 평화롭게 협의할 관계도 넘어섰다.
기요른과 단짝 친구로 지냈던 시간도 오늘로서 끝이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마주할 날도 없으리라.
본가로 돌아가면 부모님의 분노가 쏟아질 터였다.
뒷일이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당분간 꼴도 보기 싫다며 저 먼 시골의 어딘가로 보내질지도 몰랐다.
결혼식에 치른 비용을 정산하면서도 큰소리가 나겠지. 애당초 정부를 데려온 잘못이 크네, 당일에 결혼을 뒤집어엎은 잘못이 크네, 상대 자식들의 탓을 하면서.
……와, 나 배짱도 좋네.
새틴은 내심 저 스스로에게 탄복했다.
하지만 이럴 줄 알면서도 결혼을 포기했다.
그래, 후폭풍이 무서웠다면 터뜨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있는 남자와 잠자코 결혼해서, 딜라일라와 남편을 반씩 나누며 살아갔겠지.
새틴은 각오를 다졌다.
까짓거 혼나면 혼나는 거고 시골로 쫓겨나면 쫓겨나자. 신의를 저버린 자식을 친구로, 남편으로 믿고 살며 평생 속앓이를 하느니 지금 좀 괴롭고 마는 게 낫다.
어쩌다 보니 기요른과 번갈아 가며 사고를 한 건씩 치게 됐다. 그리고 경중을 따지자면 새틴이 저지른 사고가 훨씬 더 컸다.
물론 이 결혼식장에도 무조건 억울한 사람은 하나 있었다. 좋은 마음으로 주례를 서러 왔다가 파행을 수습하게 된 추기경은 이 결혼식의 피해자였다.
“새틴 델 마레. 노력조차 해 보지 않고 포기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기요른 셀 위오. 그대는 결혼을 앞둔 신랑으로서 성스러운 결혼 서약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기요른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예에.”
혼이 나간 기요른은 지금 무슨 질문을 하든 무조건 ‘네’라는 대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 곤란한 시간들을 네, 네, 하면서 대충 넘겨 버리고 결혼식장에서 탈출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기요른에게서 확답 아닌 확답을 들은 추기경이 새틴에게도 같은 질문을 시도하려 했다.
하지만 새틴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렇지만 노력해야 할 상대가 잘못되었다면요?”
부모님이 정해 준 정혼. 사랑이 아니어도 오랜 우정으로서, 손 붙잡고 가문을 지탱해 갈 파트너로서 믿음과 의리를 지킬 사람.
둘이 함께 그런 인생을 산다면 견딜 만했다. 괜찮았다.
하지만 기요른의 마음에 딜라일라가 들어온 순간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사랑은 딜라일라와 하고 실리는 저와 찾겠다고?
이미 기요른의 가슴이 딜라일라를 향해 열려 있는데, 명목뿐인 부인을 위해 평생 사랑하겠다는 결혼 서약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있을 리가. 뻔뻔한 거짓말이다.
“새틴, 제발…….”
기요른이 속삭였다. 새틴은 기요른이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지 눈치챘다.
제발 이 자리를 조용히 벗어나게 해 줘. 이 이상으로 시끄럽게 만들지 말아 줘. 나를 괴롭히지 말아 줘.
그의 속말이 상상 속에서 어룽졌다.
옛날부터 그랬다. 기요른은 다툼을 싫어했다. 경쟁을 회피했다.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새틴과는 달리, 그는 루블리에와도 친구로 지내려 노력했다.
남에게 싫은 소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천성이 약하고 온순하여 곤란한 순간을 버텨내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틴은 더 안 될 결혼이라 생각했다.
평소 회피하는 성향이 심한 남자가 처음으로 회피하지 않고 용기를 낸 여자가 딜라일라였기에.
약하게만 느껴지던 기요른도 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이만큼 달라질 수 있구나, 싶어 내심 놀라웠다. 깨달음은 씁쓸했다.
여기서 아무도 상처 입지 않고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이미 되돌릴 길은 사라졌다.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였다.
“맞는 말입니다.”
하객석으로부터 뻗어온 시원한 음성이 두 가문의 날 선 대립을 뚫고 메아리쳤다.
꿋꿋하게 하객을 등지고 있던 새틴은 무심결에 몸을 틀었다.
단번에 사람들의 주목을 자신에게로 끌어온 루블리에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지간한 예복보다 강렬한 신성 기사단의 정복, 훤칠하게 큰 키,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 긴장하지 않는 여유, 거기에다 팔라딘이라는 존재감까지 합쳐져 교당 내에는 때아닌 침묵이 자리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달리 있는데 신성한 교당에서 다른 사람과 평생을 언약한다면 그건 법황 성하를 비롯해 이 자리에 참석한 모두에게도 기만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딜라일라를 사랑하면서 자신과 결혼을 언약하면 그건 기만이지.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루블리에라는 점이 의아했다.
새틴은 눈썹을 좁혔다.
루블리에는 웃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뭐 잘못 씹은 듯 인상을 쓰고 있더니만 지금은 유쾌해서 견딜 수 없다는 미소가 만면에 그득했다.
새틴은 부케를 움켜쥐었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저 미소가.
설마.
설마?
모두가 다 아는 스캔들이라곤 하지만, 기요른의 치부를 이토록 낱낱이 고발할 계획까지는 아니었는,
“그녀는 이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달리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건 성혼 서약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데?
듣고 있던 새틴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째 내용이 좀 이상했다. 곰곰이 뜯어 짚다가 새틴은 한 박자 늦게 기함했다.
뭐? 이 남자가 대체 뭐라는 거야?
어리둥절하기로는 하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신랑 말고 신부에게도 따로 정인이 있었어?”
“그, 그런가 봐……?”
“성전의 검인 팔라딘께서 거짓을 고할 린 없잖아.”
아냐, 거짓말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잘한다고!
새틴은 아까 소리도 못 지르고 입만 붕어처럼 뻐끔거리던 부모님의 심정을 이해했다. 뒤통수가 너무 얼얼하면 말문이 막힌다.
가족들만 있는 자리면 모를까, 결혼식장은 공식 석상이라 체통을 지켜야 하니 성질대로 버럭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홀라당 얼이 빠진 나머지 새틴은 부케를 떨어뜨리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기요른에 이어 새틴까지 폭로의 대상이 되자 반쯤 자포자기한 기색으로 추기경이 물었다.
“그게 누굽니까?”
루블리에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바로 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