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부모님의 말씀 중에는 맞는 구석도 있었다. 이미 사방팔방 광고한 결혼식을 무위로 되돌리기에 사흘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결혼식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의 의지는 마치 견고한 옹벽과도 같아서,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새틴으로선 반항할 힘이 역부족했다.
결혼식 당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새틴은 아침 일찍 울적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고르고 고른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는데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해 이 옷을 입고 꾸며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가씨, 웃으세요.”
웃음기 하나 없이 싹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더니 하녀가 붓을 들고 난감해했다.
새틴은 억지로 웃었다. 하녀가 금방 볼 위로 분을 톡톡 두드렸다. 뺨에 분홍색 물이 들었다.
평생 보아온 아가씨의 모습 중 오늘이 제일로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라리의 호들갑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칭찬은 원래 신랑에게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랑은 결혼식 준비 내내 저 멀리 물러서 있다가 마지막에 덜컥 정부를 들여왔다.
“아, 머리야.”
골이 다시 지끈거렸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아냐.”
새틴은 기운 없이 일어섰다. 결혼식은 아직 시작조차 안 했는데, 이 하루가 벌써 어마어마하게 길 전조가 느껴졌다.
오늘만큼은 교당의 인기가 오페라 극장을 뛰어넘었다. 하객들이 타고 온 마차가 교당 앞에 속속 집결했다. 새틴이 고심해서 배치한 하객석이 차곡차곡 채워졌다.
의미가 불분명한 웅성거림은 가끔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새틴은 웨딩 로드의 입구 근처에 설치한 대기실에서 들썩이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정확한 내용은 안 들려도 무슨 뒷말이 돌아다니는지 다 알겠다.
저 하객석에 앉아 있는 하객들 전부가 기요른과 딜라일라의 소문을 들었으리라고, 새틴은 제 모든 것을 걸고 장담할 수 있었다.
학업에만 열중하던 셀 위오 가의 막내 도련님이 배우에게 빠져 그녀를 정부로 들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식이 깨지지 않은 걸로 보아선 두 가문의 결속이 의외로 튼튼한가 보다, 혹은 신부가 감언이설에 넘어갔거나, 뭐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이겠지.
루블리에도 하객석 맨 앞에 앉아 있었다.
결혼식이 시작되면 신랑, 신부가 가장 잘 보일 자리였다. 가문의 영향력을 고려해서 배치한 자리였지만 새틴은 저 자리를 정한 제 손을 때려주고 싶어졌다.
“그때는 미처 몰랐지…….”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나 보지?’
루블리에의 물음에 도도하게 끄덕이고서 돌아섰던 제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선명했다.
지금 벌어진 이 꼴이 그의 눈에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 새틴은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대기실에서는 하객들의 뒷모습만 보였다. 그러나 새틴은 단박에 루블리에를 분간해 냈다.
어지간한 예복보다 수려한 신성 기사단의 정복에, 남들보다 월등한 체격을 지닌 남자의 뒤통수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가씨, 곧 예식 시작한대요.”
라리가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 더불어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부의 시중을 들어줄 시종들도 들어왔다.
새틴은 부케를 움켜쥐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기요른과 담판을 짓더라도, 일단 이 결혼식 안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웨딩 로드를 걸어가야만 했다.
세상의 모든 신부는 그날의 주인공을 꿈꾼다.
새틴은 오늘의 주인공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고, 또 가장 아름다운 부케를 들었다.
가장 아름다운 치장도 마쳤다.
이대로 단 위에 올라 추기경의 주례 앞에 엄숙한 결혼 서약을 맺으면 그려왔던 결혼식 풍경 그대로였다.
그런데 걸음걸음 밟아가야 할 이 붉은 융단이 축복받은 꽃길이 아니라 불구덩이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이내 입장을 알리는 장엄한 성가가 들려왔다. 신의 축복을 노래하는 맑은 목소리가 교당을 청아하게 채웠다. 새틴은 노랫소리에 맞추어 천천히 입장했다.
기요른은 융단의 중간에서 새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새틴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은근히 회피하는 기미였다. 새틴도 파혼하자, 냅다 터뜨리고서 뛰쳐나온 뒤 이 자리에서 기요른과 다시 처음 마주했다.
한데 하필이면 그 자리가 결혼식이라니.
피차 난감하고 어색한 자리였다.
새틴도 앞만 보며 걸어갔다. 신랑을 외면하고 있으려니 하객들의 면면이 더 시야에 들어왔다.
신랑과 신부를 흥미롭게 주시하는 눈빛들이 사방팔방 가득했다.
스캔들에 대한 호기심으로 비죽이는 입매들, 웃음을 억누르느라 우스꽝스러워진 표정들이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다.
다 때려치우고서 도망가고 싶다, 진짜.
일면식 없는 하객들도 이리 재미있어하는데 루블리에에게는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울까. 카 딜론 가문을 견제한답시고, 스캔들이 났는데도 결혼을 강행하는 저와 기요른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까.
추기경에게 가까워질수록 하객석 맨 앞에 앉아있는 루블리에와도 가까워졌다. 그의 옆을 가까이 스쳐 지나가면서 새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라도 더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옆얼굴이 따가워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문득 루블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어……?”
이 어리석은 결혼을 두고 비웃음을 보일 줄 알았던 루블리에는 웬일로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간에 잡힌 짜증이 미묘하게 드러났다.
뭘까. 스캔들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거행하는 결혼식에서 신부와 신랑이 겉으로는 제법 태연하게 굴고 있으니 그런 걸까.
물론 이 결혼 자체가 마음에 들지도 않을 것이다. 카 딜론 가를 견제하느라 치르는 결혼식인데 당사자가 모르려야 모를 리 없으니.
새틴은 기요른과 나란히 추기경을 마주 보고 섰다. 축혼 성가는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새틴은 머리를 갸웃했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유독 귓전에 맴돈 까닭이었다.
순수한 아이처럼 목소리를 맑게 내고 있었지만, 발음과 울림이 기이하게 익숙했다.
새틴은 하얀 커튼으로 가려진 성가대를 주시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청소년이라 해도 믿겠는데, 커튼 안에서 길게 일렁이는 그림자는 분명 성인의 것이었다.
“식 중에 죄송하지만.”
새틴의 옆에는 신부의 작은 불편을 바로바로 듣고 처리해줄 시종이 바짝 붙어 있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조절하느라 새틴은 애를 썼다.
“커튼을 치우고 성가를 불러주신 분을 제가 볼 수 있게 해 주시겠어요?”
의아한 요청이었으나 굳이 들어주지 못할 요청도 아니었다. 새틴의 시종이 성가대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내내 완벽하게 울리던 노래의 음정이 일순 흔들렸다.
모두가 다 눈치챌 만한 실수였다.
그래도 상대는 능숙하게 성가를 이어 불렀다. 프로다운 솜씨였다.
무대에서 예기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능력. 대극장의 프리마 돈나이기에 가능한 대처였다.
딜라일라. 성가를 부르고 있던 사람은 딜라일라였다.
하객석을 등지고 있어 다행이었다. 새틴은 지금 제 표정이 멀쩡한지 어떨지 하나도 자신 없었다.
딜라일라와 기요른이 시선을 교환했다. 눈빛 속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치 비운의 연인이라도 되는 양 언뜻언뜻 오가는 신호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미안함, 안쓰러움, 난감함.
이를 옆에서 뻔히 지켜봐야 하는 새틴은 속에서 천불이 타오를 지경이었다.
이 둘이 비운의 연인이라면 나는 뭐지? 들러리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가 왜 축혼 성가를 불러?”
남들에게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게 깔았지만, 그 안에 실린 분노는 충분했다.
“……내가 저번에 청했어. 다리 다쳤던 날에…….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성가 아래로 기요른의 변명이 나직나직 이어졌다.
“너는 결혼식의 모든 과정을 최고로 하고 싶어 했으니까,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가 깜짝 등장해서 성가를 불러주면 놀라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서…….”
놀라고 기뻐해?
아, 그래. 정말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차라리 결혼식에 아무런 기여를 안 한 게 낫지, 그나마 하나 한다고 한 이 일이 기요른이 저지른 모든 짓 중에 단연코 최악이었다.
하객들 대부분이 딜라일라의 얼굴을 알았다. 남자가 오랜 정혼자와 결혼하는 자리에서 정부가 축혼 성가를 불러주고 있다.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새틴은 눈앞이 캄캄했다.
침착하게 노래를 마친 딜라일라가 성가대 자리에 앉았다.
추기경이 강론을 시작했다. 법황이 배려한 결혼인 만큼 분명 대단히 훌륭한 설교일 텐데,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틴은 기요른을 노려보았다. 딜라일라도 노려보았다.
이 둘 사이에서 우스갯거리가 된 느낌이 사라지질 않았다. 이 많은 하객들 앞에서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설교가 지나갔다.
머릿속에 폭풍이 있었다. 새틴은 멍하게 아까의 장면만 되풀이해 떠올렸다.
제 결혼을 축복하던 성가와 커튼이 젖혀진 순간의 딜라일라를.
커튼을 열어보지 않았더라면 새틴은 성가를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로 이 결혼식을 끝냈을 것이다. 정체를 알게 된 것도 소름이 돋는데, 몰랐다고 생각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러던 중, 기요른의 대답이 느닷없이 들려왔다. 새틴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네.”
무슨 질문을 한 거지?
내용이 뭐였는지 듣지도 못했다. 이미 놓친 질문은 어쩔 수가 없다. 새틴은 추기경이 다음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렸다.
“기요른 셀 위오. 그대는 그대 유일한 부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어느새 성혼 선언 직전이었다. 새틴은 화드득 놀랐다.
언제 여기까지 진행된 거야? 너무 오래 넋을 놓고 있었나 보다.
기요른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는 건너편의 딜라일라를 짧게 바라보았다. 새틴은 추기경의 질문을 되새겼다.
‘그대 유일한 부인을 존중하며…….’
그대 유일한 부인을 존중이라. 그럼 네, 하고 대답하면 안 되지. 이 결혼의 처음부터 끝까지 새틴은 존중받지 못했다.
“네.”
기요른이 대답했다. 새틴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번에는 추기경이 새틴을 응시했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이 자리에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섰습니까?”
“……네.”
“새틴 델 마레. 그대는 그대 유일한 남편을 존중하며 생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하겠습니까?”
새틴은 기요른을 의식했다.
신부를 열렬히 바라봐야 할 신랑이 정부를 애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너에겐 이 결혼이 아무 의미가 없구나.
이를 깨달은 순간 새틴은 순식간에 하나의 결론으로 도달했다.
……도저히 못 해 먹겠다. 이 결혼.
나도 뒤통수를 맞았는데 나라고 뒤통수를 치지 말란 법 있어?
새틴은 눈을 딱 감았다.
“……아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