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2)

<7화>

3. 바람난 애인에게 복수하는 방법

아마 그즈음부터였으리라. 셀 위오 가의 막내 도련님이 프리마 돈나에게 반해 오페라 극장을 들락거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시기가.

그래도 새틴은 웬만하면 웃어넘기려 했다.

유명한 배우를 쫓아다니는 사람들이야 길가에 널린 자갈처럼 쌔고 쌨다.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아카데미에 있었던 새틴은 남을 동경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곳에서 파수꾼 가문 출신인 자신과 기요른, 루블리에는 전부 눈에 띄는 입지에 있었다.

특히나 그 어린 나이에도 차기 신성 기사단의 재목으로 점쳐졌던 루블리에의 경우에는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졸졸 쫓아다니는 학생들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법황 성하의 첫째 아들인 키리온도 자신들보다 이년 일찍 아카데미에 입학했었다.

법황의 후계자인 키리온을 봤을 땐, 새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여 경험으로 납득하고 있었다.

높은 직위, 혹은 천부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은 선천적으로 남의 이목을 끈다. 자신이 갖지 못한 직위나 재능이라면 더더욱.

딜라일라는 자신을 드러내는 성향이고 기요른은 스스로 수그러드는 성향이었다.

그러니 정반대의 재능을 가진 딜라일라를 기요른이 동경한다면 그 또한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배우와 관객의 관계에서 그쳤어야지. 그래야 새틴도 약혼자에게 새로운 면모가 있었네, 하고 농담하면서 넘길 수 있는 것이다.

새틴은 조금 전 한 무리의 사람들이 휩쓸고 간 거리를 멍하게 응시했다.

방금 무슨 이야길 들은 건지, 머릿속이 도무지 정리되지 않았다.

‘셀 위오 가의 막내 도련님이 결투 신청을 하셨다잖아!’

‘결투를? 왜?’

‘왜는 왜야, 딜라일라 때문이지.’

‘아아, 그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

잠시 멍해 있던 차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라리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새틴을 흔들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서였구나. 다친 다리로 데이트를 하자면서 장소를 오페라 극장으로 정했던 이유가.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자꾸만 딜라일라의 이름을 언급했던 이유가.

약혼자의 도움 없이 결혼식을 준비하고 드레스를 고를 때, 약혼자는 꽃을 들고 딜라일라의 오페라 극장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끝내 그 여자를 위해 결투를 했다. 약혼녀가 누구인지 만천하에 알려진 사람이, 심지어 결혼식 사흘 전에.

피가 싸하게 식어 내렸다.

라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할까요?”

“……셀 위오 가로 가자.”

지금은 결투하는 장소에 가 봤자 이미 끝났거나, 한창 진행 중이라 할지라도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 없을 것이다.

더구나 뒤늦게 약혼녀가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온 꼴이 되니 남들에게 보일 모습도 아니었다. 차라리 셀 위오 가에서 기요른을 기다리다 대면하는 쪽이 나았다.

새틴은 마차에 올랐다. 이 좋은 계절에 때아닌 추위가 들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 * *

사람들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게 해 달라, 부탁한 복도에 발소리가 조용조용 울렸다.

인기척을 들은 새틴은 허리를 곧게 세웠다.

딜라일라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기요른이 이내 응접실 한복판에 앉아 있는 새틴을 발견하고서 머뭇거렸다.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새틴이 터벅터벅 다가갔다.

“새틴…….”

기요른이 새틴의 이름을 불렀다.

새틴은 즉각 기요른의 뺨을 후려쳤다.

“파혼하자.”

기요른을 기다리면서 마음을 굳혔다. 결론은 쉽게 나왔다.

“잠깐만, 새틴.”

“이러고서도 결혼하면 나도 망신이고 너도 망신이야.”

“내 얘기 좀 들어줘, 새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그제야 새틴은 딜라일라를 잠깐 쳐다보았다. 매력적으로 웃고 이야기하던 가수의 뺨이 웬일로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녀의 사정은 네가 알겠지. 그럼 나까지 알 필요는 없어. 내가 아는 내 사정은, 약혼자가 다른 여자 때문에 결투를 했다는 거야. 그리고 내일이면 이 도시 사람들 전부가 그 소문을 알고 수군거리겠지.”

“새틴. 딜라일라의 후원자가 자꾸 그녀를 괴롭혔어. 말을 듣지 않으면 주먹을 휘두르고, 끔찍한 짓까지 저지르려고 했어. 같은 여자로서 조금만 이해해줄 순 없을까?”

후원자에게 학대를 당했다는 기요른의 이야기가 진실이기는 했는지, 딜라일라는 지금껏 본 중 가장 처연해 보였다.

똑같이 뺨따귀를 얻어맞았어도 기요른의 얼굴은 거의 흔적도 없이 멀쩡한 반면 딜라일라는 얼굴 한편이 퉁퉁 부어 아파 보였다.

그녀의 후원자가 다혈질에 난폭한 사람이라는 말은 저번에도 들었다.

그러나 후원하는 가수나 배우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는 후원자는 새틴이 알기로도 의외로 흔치 않았다.

무대 위에서의 모습은 더없이 화려한 배우라도, 무대 뒤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무언가 사고는 있었겠지. 그랬으니 기요른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결투까지 신청해서라도 딜라일라를 빼 왔겠지.

그조차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결혼을 뒤엎을 처지가 된 자신은 대체 누가 이해해주지? 어째서 나만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해?

새틴은 딜라일라를 일별했다.

“유감이네요.”

그녀에게 할 말은 이뿐이었다.

기요른이 딜라일라를 데려왔으니 누가 봐도 그의 연인은 이제 딜라일라였다.

셀 위오 가의 도련님과 오페라 극장의 아름다운 여가수. 한동안 신나게 입방아에 오르내릴 소재 아닌가.

휘황찬란하던 겉모습과 달리 비극을 안고 있던 배우와 구세주처럼 등장해 그녀를 위기에서 건져 준 귀족 남자.

이건 사람들이 열광하던 딜라일라의 연기보다 더한 현실이었다.

아마 머지않아 이 둘을 모티프로 한 연극이나 소재도 유행할 것이다.

새틴은 그 안에서 발을 빼고 싶었다.

여가수에게 남자를 빼앗긴 비운의 귀족 아가씨라는 오명은 사양이었다.

이런 결혼은 절대 할 수 없다. 결단코 결혼식장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테다.

셀 위오 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새틴은 확고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새틴을 설득하려는 부모님의 마음 역시 확고했다.

“새틴, 결혼식이 삼 개월이 남았니, 삼 주가 남았니? 이미 준비도 다 끝나고 초대장까지도 돌린 결혼인데 겨우 삼 일 전에 어떻게 파혼을 하니? 삼 일 후가 네 결혼식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이 칼데브란카에 없어.”

“그 집에서도 웃더구나. 가수가 암만 노래를 잘 부르고 외모가 뛰어나다 해도 셀 위오 가의 안주인 자리에 가당키나 하냐고.”

딜라일라에게는 신분의 한계가 있었다. 적절하게 좋은 집이면 모를까 파수꾼 가문과 여배우 사이에는 격차가 어마어마했다.

기요른도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녀를 제 정식 부인으로 들이겠다는 각오까지는 없었던 듯했다.

결혼을 작파해 달라는 새틴의 요청을 듣자마자 기함하며 셀 위오 가로 득달같이 달려갔던 부모님은 여유를 한결 되찾은 태도였다. 새틴은 기가 막혀 반문했다.

“기요른은 이 결혼을 하겠대요?”

“못할 게 무엇이 있니. 하겠다고 그러지.”

“그 여자 사정이 딱해서 불쌍한 마음에 구해줬다고 하더라. 이름이 딜라일라라고 했던가? 그 가수. 그 여자도 너를 제치고 결혼하려는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고 했어. 오히려 자신 때문에 네가 상처를 입었다면 무릎 꿇고 사죄하고 싶다더구나.”

“기요른도 당장 갈 곳이 없는 여자니까 잠깐 손님방을 내어주려고 데려온 거지, 당연히 너와 결혼한 뒤에는 내보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더라.”

딜라일라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셀 위오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는 장소에 두겠지.

근처의 남는 집 하나를 얻는 정도야 결혼식에 쓴 비용에 비하면 댈 것도 없었다.

제집에는 새틴을 두고 근처의 집에는 딜라일라를 둔다. 이마가 지끈거렸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구를 바보로 아나?

새틴은 속지 않았다.

“두 집 살림하겠다는 말을 그리 당당하게 했어요?”

칼데브란카는 중혼을 허혼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법적인 배우자를 두고도 간혹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그런 이들이 갖는 이름은 하나뿐이다. 정부.

자유연애의 성행 이후로 정부의 수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 여자는 기껏해야 정부에 불과하고 셀 위오 가문의 작은 안주인은 너야, 새틴. 네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렴.”

딜라일라와 바람난 기요른에게 항의하려고 달려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부모님은 셀 위오 가에서 새틴과 딜라일라의 위상 차이를 합의하고 왔다.

인내심이 바닥났다. 새틴은 울컥했다.

“결혼 전부터 정부를 두는 남자와 어떻게 살아요!”

“새틴. 너는 이제 어린애가 아냐.”

“파수꾼 집안에서 태어나 어떻게 너 한 사람만을 위한 인생을 살려 그래?”

“어린애가 아니면, 파수꾼 집안에서 태어났으면 제가 행복해지는 결혼을 해선 안 되는 거예요?”

평생 기요른과의 사이에선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한 채로 결혼 생활을 하게 되겠지.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정부를 만나러 갔나 보다, 추측하면서.

애초 기요른에게 정부가 생겼음을 알고도 진행하는 결혼이다.

처음에야 기요른이 제 눈치를 많이 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미안한데 새틴, 다 알고 한 결혼이잖아. 너도 받아들인 결혼이잖아. 너만 이해해주면 우리 모두 평화로울 수 있어.’

좋게 표현하면 온유하지만 나쁘게 표현하면 소심하고 내성적인 기요른이 충분히 보일 법한 반응이었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새틴.”

그러나 부모님의 종용은 끝나지 않았다.

“정부가 있으면 뭐 어떠니? 애초에 너도 기요른을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아니잖아. 이번 일로 기요른도 평생 너에게 미안해하며 살겠지. 셀 위오 가에서도 너에게 마음의 빚을 진 거야.”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양 가문의 이익에 기반한 결혼.

그건 그랬다. 부모님의 약속으로 결혼하게 된 사이였으니까.

다섯 파수꾼 가문이라고 아울러 칭하기는 해도, 그 다섯이 권력을 고르게 분배하고 있냐면 그건 또 달랐다.

델 마레와 셀 위오에서는 오랫동안 딱히 걸출한 인재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반면 카 딜론에서는 뛰어난 자손들이 종종 태어났다. 새틴의 대에도 하나 있었다.

루블리에 카 딜론.

처음 검을 쥐었다는 다섯 살부터 범상치 않은 인재가 되리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그 남자.

새틴과 기요른의 태중 정혼은 다섯 가문 중에서 홀로 독주하는 카 딜론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더불어 가문의 세를 불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식들이 태어나고 루블리에가 일찌감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무렵에 새틴과 기요른의 가문은 미리 정혼을 맺어둬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요른을 남자로서 사랑하냐면, 솔직히 새틴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약혼 기간이 길었다고 해서 우정이 하루아침에 사랑으로 둔갑하지는 않으니.

물론 단순한 우정보다는 깊은 마음일 테다.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마음.

그러나 오래 알았기에 정과 의리로 의지하며 살아갈 사이. 이것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이 아니라도 의리와 믿음만 있으면 유일한 인생의 동반자로서 평생을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새틴, 더는 이 문제로 시끄럽게 하지 마라.”

결국 결혼을 엎을 순 없다는 부모님의 강경한 입장만 재확인한 꼴이 되었다.

새틴은 방에 틀어박혔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새틴의 곁을 지키다 라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라리. 남자가 나 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면, 어떻게 해야 제일 좋은 복수가 될 수 있을까?”

물음은 충동적으로 나왔다. 라리가 화들짝 기겁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예? 복수요? 아이고, 아가씨. 그런 무서운 마음은 먹지 마세요.”

“라리.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요’ 하는 말이라면 절대 하지 마. 내가 네 아가씨가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냥 뭐든 말해 봐. 이대로는 결혼식장에 끌려가게 생겼는데 내가 조만간 울화병으로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새틴의 속앓이에 라리가 곰곰이 고민에 빠져있다가 입을 뗐다.

“우리 어머니가 해 주신 이야긴데, 그럴 땐 그 남자의 가장 친한 친구와 뒹굴래요. 그게 가장 충격이 크다고요.”

새틴은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말을 말자. 내가 말을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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