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12)

<6화>

“……루, 아니, 카 딜론 경?”

다시 봐도 정말 그였다. 난데없는 손님이었다. 그것도 초대한 적 없으니 불청객이라 할 것이다.

일순 뜨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새틴은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에요?”

설명은 드레스를 가져온 사람들이 대신했다.

“저희가 오면서 길이 엉켜 다른 마차와 사고가 날 뻔했는데 팔라딘께서 마침 지나가시다가 중재를 해 주셔서 별 탈이 없었습니다. 드레스를 보시곤 어디로 가는 짐이냐고 물으시기에 델 마레로 들어가는 짐인데 길을 잃었다고 말씀드리니까 댁이 어딘지 잘 아신다면서 안내해주셨습니다.”

루블리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어.”

“아, 네에.”

새틴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매끄럽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드레스를 무사히 받아보았네요. 안녕히 가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 잔도 안 주나?”

“안 바빠요?”

“이제 바쁜 시기는 다 지났지. 차 한 잔 마실 여유 정도는 있어.”

사람 참 안 변한다. 오랜만에 봐도 저 얄미움이 어디 안 간 거 보면.

새틴은 그에게 보이지 않게끔 입가를 실룩였다.

“라리. 카 딜론 경에게 차 좀 준비해 줘.”

“예, 아가씨.”

라리가 사라졌다.

“한담을 함께 나누기에는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좀 일이 많네요. 그럼 편히 드시고 가세요.”

마음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남기고서 새틴은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곁방으로 도망갔다.

“도안으로 볼 땐 몰랐는데, 직접 입어보니까 생각만큼은 안 어울리지 않아? 옷에 너무 눌리는 느낌이야.”

“그럼 이건 뺄까요? 다음 드레스를 입혀드릴게요.”

라리가 가림막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사용인들은 새틴이 입어보고서 고개를 내저은 드레스를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새 드레스를 들여놓았다. 방이 크지 않아 열두 벌의 드레스들이 다 들어올 수가 없기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두고 아닌 드레스는 내어놓느라 사용인들은 분주하게 방을 들락거렸다.

새틴은 가림막을 열고 나왔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무거운 드레스 자락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볼 즈음이었다.

“그 드레스는 입지 마.”

묵직한 음성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악, 깜짝,”

깜짝 놀랐네!

기겁해 소스라친 새틴이 뒤를 돌아보았다. 찻잔을 든 루블리에가 문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리도 없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뜩이나 큰 사람이 몸을 기울이고 있으니 그림자도 더 길게 졌다.

뭐야?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있어?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당장은 신경을 분산시킬 정신이 없었다. 새틴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흘끔거렸다.

“왜요?”

“허리를 그렇게까지 조였다간 결혼식장에서 숨도 못 쉬고 삼십 분만에 쓰러져서 실려 나갈걸.”

“……라리. 이건 치우고 다음 거 입혀 줘.”

“네에, 아가씨.”

드레스 한 벌을 갈아입는 데에는 시간이 상당히 소모됐다. 가림막 안에서 한참 끈을 묶고 실루엣을 다듬은 새틴이 다시 가림만 바깥으로 나가자 루블리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새틴은 그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로 제 드레스만 점검했다.

괜찮았다.

고르고 고른 드레스들인데 잘 어울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많은 건 당연했다. 다만 이 드레스를 입으려면 목선이 드러나게 머리를 올려야…….

“그건 머리를 올리는 편이 좋겠군.”

루블리에가 쓱 보고서는 간섭했다. 제 생각이랑 똑같아 무심코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줄 알았다.

새틴은 라리에게 눈짓했다.

“……라리, 이건 보류.”

딱 봐서 아닌 건 치우고, 괜찮은 건 보류해서 다시 입어볼 드레스로 남기고 있었다. 새틴은 다음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날씨도 좋은데 왜 답답하게 긴 팔이지?”

그런가? 답답해 보이나?

“라리, 이거 치워줘.”

“그건 치맛단만 약간 수정하면 좋아 보이는데.”

“라리, 이거 보류.”

“옷을 잘못 만들었군. 너한테 너무 커.”

“라리, 치워줘.”

“미카도 실크는 지금 입기는 무겁지.”

“라리, 치워줘.”

어째 진도가 술술 나갔다. 가림막 안으로 들어와 도톰한 미카도 실크 드레스를 벗던 새틴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 남자가 드레스를 봐주고 있는 거지?

무엇보다도 이건 원래 기요른이 와서 해줬어야 하는 일이다. 애매한 찜찜함을 감추고서 새틴은 옷자락을 살짝 들고 걸어나가 거울 앞에 섰다.

음, 이건 조금 키가 작아 보…….

“너는 키가 작아서 머메이드는 아냐, 꼬맹이.”

아, 진짜! 저놈의 꼬맹이 소리!

새틴은 거울 너머로 루블리에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곤 오기를 실어 소리쳤다.

“라리! 이거 보류.”

발목이 아플 정도의 굽에 올라타는 한이 있더라도 소화해내고 말 테다.

그래도 루블리에와 처음 봤던 시기에 비하면 꽤 많이 컸는데, 새틴이 자라는 동안 루블리에는 원래 큰 키에서 더 큰 키가 되었다.

새틴이 암만 커 봤자 루블리에의 눈에는 영원히 꼬맹이로 보일 거라 생각하니 왠지 억울해졌다.

뒤에서 루블리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좀 너답네, 새틴.”

다음 옷으로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새틴의 곁을 라리가 따랐다.

“아가씨, 이게 마지막이에요.”

마지막 드레스를 건네받고서 새틴은 내심 놀랐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어보는 일도 한두 번이어야 즐겁고 재밌지, 열두 벌쯤 되면 기실 고문이다.

그럼에도 결혼식 날 가장 완벽한 신부가 되기 위해 지루하고 피곤한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고 위안을 삼았는데 신기하게도 별로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나갔다.

라리의 손이 가림막을 걷었다. 새틴은 옷자락을 가볍게 들고 사뿐 내려섰다.

시선은 거울을 향해 있는데 귀는 문간을 향해 열려 있었다. 루블리에가 워낙 솔직하게 옷을 봐준 탓일까, 이상하게 긴장됐다.

루블리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잘 어울려 보이는데…… 아닌가? 별론가? 아니, 사람 불안하게 왜 말이 없어?

속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척 흘끗흘끗 루블리에를 곁눈질할 즈음이었다.

루블리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새틴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그의 손이 살짝 뒤집혀서 접힌 드레스 자락을 곱게 펼쳐주었다.

기다렸던 대답은 그다음에 들려왔다.

“예쁘네.”

“……네?”

“너 엄청 예쁘다고. 새틴.”

움찔한 새틴은 거울만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래? 라리가 차에 약이라도 탔나?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남몰래 멎어 버린 새틴의 뒤에 서서 그는 입매가 슬그머니 기우는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행운을 거머쥔 놈인지, 기요른이 그걸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 * *

“어머나, 새틴님.”

틈을 내어 쉬잔 부인의 살롱에 잠시 들렀다가 새틴은 얼마간 안면을 익힌 부인과 마주쳤다.

부인이 반갑게 새틴을 불렀다. 새틴도 옷자락을 가볍게 감아쥐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에클레 부인.”

“오랜만에 뵈어요, 새틴님. 그동안 통 못 뵈었는데, 결혼식 준비는 이제 끝마치셨나 봐요?”

“중요한 일들은 거의 끝났어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기요른 님과 그저께 오페라 대극장에 다녀가셨다면서요. 소문이 자자해요.”

“네?”

새틴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야? 오페라 대극장?

새틴의 당황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에클레 부인이 뺨을 발그레 붉히며 말을 이었다.

“꽃을 든 기요른님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요? 두 분 태중 정혼하셔서 둘도 없는 친구 사이실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세상에…… 지금까지도 데이트에 꽃다발이라니요. 기요른 님이 참 로맨틱하세요. 행복하시겠어요, 새틴 님.”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한 어조였다. 에클레 부인의 앞이라 새틴은 어리둥절한 티도 내지 못했다.

아마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요른 정도 되는 가문의 인물이면 헷갈리는 쪽이 오히려 무례였다.

오페라 극장이면 데이트를 하기도 적절하니까 당연히 그의 유명한 약혼녀를 만나러 나온 모습으로 보였겠지. 이미 한번 방문한 적도 있고 말이다.

문제는, 새틴이 그저께 오페라 극장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꽃다발은커녕 풀 한 포기 구경도 못 했다.

그저께. 내가 그저께 뭘 했더라?

날짜를 가늠하던 새틴의 표정이 일순 얼어붙었다.

그날은 루블리에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고른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