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12)

<5화>

* * *

“데이트? 웬일이야?”

기요른에게서 일주일 만에 사적인 용건을 담은 편지가 날아왔다. 내용을 확인한 새틴은 고개를 갸웃했다. 결혼식 전에 시간을 내서 데이트를 하자는 이야기였다.

어디서 잔소리라도 들었나? 아니면 다리를 다쳐 결혼식 준비를 죄 떠밀어버린 게 미안했나?

그러고 보니 기요른이 다리를 다친 뒤로는 어떻게 회복하고 있는지 뜨문뜨문 소식으로만 접했다.

예비부부인데도 이렇게 얼굴 한 번 못 마주치고 결혼하는 커플도 드물 것이다.

그래, 데이트. 하면 좋지.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오후에는 시간이 좀 남을 듯도 했다.

새틴은 오후에 만나러 가겠다는 답장을 써서 기요른에게로 돌려보냈다.

원래는 기요른이 델 마레 가로 새틴을 데리러 와야 했지만, 아직 다리가 다 낫지 않은 사람을 힘들게 오라 가라 할 순 없었다.

새틴은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셀 위오 가에 도착했다.

기요른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걸음이 많이 불편한지 발을 저는 모습이 다소 위태로웠다.

그는 사용인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새틴도 기요른의 팔을 붙들고 지팡이를 옆에 갈무리하게끔 도와주었다.

“좀 더 누워있어야 하는 거 아냐?”

“괜찮아. 그리고 너무 누워만 있는 것보다는 조금씩 걷는 편이 치료에도 좋대.”

기요른이 부드럽게 웃었다. 새틴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그럼 어디로 갈까?”

데이트를 하자는 제안만 들었을 뿐 어디로 가자는 말은 못 들었다. 새틴의 물음에 기요른이 곧장 대답했다.

“오페라 대극장.”

“응?”

“저번에 만난 그 프리마 돈나 말이야. 공연을 보러 오라고 박스석 입장권을 보내줬거든. 내가 오래 걸을 수 없으니 오늘은 공연을 보자. 끝나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제게는 전혀 얘기가 없어 몰랐는데, 그 사이 딜라일라가 초대권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켰던 모양이었다.

대극장의 공연이라면 데이트 장소로 제법 적절하니, 기요른의 선택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뭔가 찜찜한 이 기분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새틴은 쨍한 붉은 머리를 가진 가수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짙은 인상을 남기는 여자였다.

표정, 목소리, 말투, 몸짓.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물어보면 하나하나 남김없이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무심코 기억을 더듬다가 새틴은 저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 웃었다.

결혼을 앞두면 사람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는데,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집안끼리 의논한 정혼이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도. 이게 바로 결혼의 위력인가 보다.

“그래, 오페라 극장으로 가자.”

참 쓸데없는 고민을 했다.

유명한 배우의 공연을 보고, 맛있는 밥 먹자는데 기분이 찜찜하기는. 좋아해야 할 일이지.

새틴은 마부에게 목적지를 지시했다. 델 마레의 휘장을 단 마차가 차도를 달려갔다. 오페라 대극장은 그리 멀지 않았다.

딜라일라의 인기가 드높다는 말이야 익히 들었으나, 실제로 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극장 앞에는 암표라도 구해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부르는 가격도 시시각각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새틴과 기요른은 딜라일라가 선물한 초대권을 제시하고 안으로 안내를 받아 입장했다.

기요른의 집에서 보인 겸양이 무색하게, 딜라일라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의 표를 보내주었다.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2층의 박스석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비밀스러운 공간에 두 사람을 위한 푹신한 의자와 오르되브르,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가볍게 먹고 마시면서 공연을 즐기라는 배려였다.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만큼 좁고 밀폐된 공간은 드물었다.

더욱이 어느 정도 자라고부터는 주변 사람들부터가 둘을 남자와 여자로 의식하는 바람에, 갑자기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피할 겸 일부러라도 열린 공간에 머물곤 했다.

박스석은 누군가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모를 곳이었다.

어둑어둑하고 좁은 공간에, 게다가 술까지 있으니 왜 연인들이 일부러 가격 비싼 박스석을 선택하는지 좀 이해될 것 같았다.

단둘이라는 긴장감. 노래와 술과 감성이 고조되는 시간.

그러나 감정에 휩쓸리기엔 자신과 기요른이 너무나도 친한 친구 사이라 문제였다.

지금도 긴장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공연에 대한 기대가 더 클 것이다.

“곧 시작하네. 새틴.”

기요른도 덤덤했다.

새틴은 무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뒤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강조하는 화장을 하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걸친 딜라일라가 무대 위에 올랐다.

무대 위에는 이미 여러 명의 배우가 올라와 노래를 한 후였다. 그러니 새로운 배우의 등장이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팔을 극적으로 벌리며 높은음을 내는 순간 극장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딜라일라는 사랑을 좇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릴 수 있는 공주의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남자 배우들은 딜라일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결투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녀의 발아래 무릎 꿇으며 사랑을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를 원하는 남자들은 그녀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딜라일라는 때론 애절하게, 때론 화려하게, 때론 유혹적으로, 때론 체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사의 구절구절마다, 기교 섞여 오르내리는 음률의 사이사이마다 딜라일라가 품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새틴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외모와 목소리 외에도 확실히 그녀는 지닌 능력이 많은 배우였다.

“……굉장하다. 그렇지? 기요…….”

놀라운 마음에 기요른을 돌아보면서 말을 걸려던 새틴이 입을 다물었다.

공부 외에는 딱히 흥미가 없던 남자가 넋이 나간 얼굴로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새틴이 제 옆에 앉아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듯 보였다.

이곳이 박스석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무대에 달려 올라갔을 듯한 자세로, 딜라일라에게서 아예 눈을 떼지 못했다.

새틴은 괜히 머쓱해져서 얼굴을 돌렸다.

이해했다. 그럴 만한 연기였고, 그럴 만한 노래니까.

그렇다지만 기요른에게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모습이기에 어색한 기분 역시 공존했다.

처음으로 기요른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대단하다. 사람이 연기와 노래를 가지고 그만큼 감동을 줄 수 있는 거구나. 살면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

“진짜 엄청난 공연이지? 난 내가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그녀를 경배하는 사람들 속에 섞인 기분이었어.”

“…….”

“다행이야.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되어서. 그녀와 연이 안 닿아서 오늘 공연을 못 봤으면 평생 후회했을 텐데.”

“…….”

“안 그래, 새틴?”

“……응. 대극장의 프리마 돈나라고 해도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을 텐데, 과연 유행을 선도할 만하더라.”

딜라일라에 대한 칭찬이야 당연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공연 끝난 직후부터 시작해 마차에서, 또 식사를 하는 시간까지도 이어지면 듣는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다.

새틴은 떨떠름하게 고기를 썰었다.

이상하지는 않았다. 딜라일라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많다. 골목마다 옹기종기 모여 결투를 하는 사람들도, 또 세레나데를 부르는 사람들도 그 시작은 전부 다 딜라일라였다. 기요른도 그런 추종자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남성의 비율이 높아서 그렇지 여자들 중에서도 딜라일라를 꿈꾸는 사람은 많았다.

다만 남자들이 딜라일라의 상대인 남자 배우에게 몰입을 했다면 여자들은 딜라일라 본인에게 이입했다.

연인에게 먼저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니까 서로 죽이 잘 맞으면 그들은 자신들만의 무대에 배우가 되어 오른 기분일 터였다.

“기요른.”

새틴은 기요른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는 딜라일라가…… 응?”

기요른이 조금 늦게 반응했다.

무슨 말을 해도 딜라일라로 시작해 딜라일라로 끝난다. 그 점을 지적할까 하다가 새틴은 그만두었다.

“아냐, 아무것도. 나 다음 주에 드레스 제작한 거 오는데 괜찮으면 그날 와서 좀 봐줄래? 뭐가 제일 어울릴지 몰라서 열두 벌을 제작했거든. 도안은 한 오십 벌 정도 있었는데 거기서 추리고 추려도 열두 벌이나 나오더라. 결국 다 만들어서 입어보겠다고 했지 뭐야.”

“응. 다리가 괜찮으면 갈게. 그래서 말이야, 딜라일라가…….”

이럴 수가.

새틴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랐던 기요른의 모습을 봐서 낯설기도 한데 이쯤 되면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 상태가 조금 이상하지만 멋진 공연을 본 여파로 잠시 마음이 들뜬 거겠지.

나중에 딜라일라를 향한 열정이 어느 정도 식으면 한 일 년쯤 놀릴 거리가 생긴 거라고, 새틴은 그렇게 생각했다.

* * *

열두 벌의 웨딩드레스가 마차에 실려 델 마레 가로 들어왔다.

한 벌 한 벌이 보석 장식까지 다 세심하게 제작된 드레스라 끈 하나도 상하지 않게끔 가져오려다 보니 짐을 실은 마차가 여러 대였다.

저택의 사용인들이 우르르 달려나가 드레스를 운반했다. 새틴은 응접실에 서서 옷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다리의 컨디션이 좋아지면 와서 드레스를 같이 골라주겠다던 기요른은 오늘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신부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고르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더불어 신랑 눈에도 가장 예쁜 드레스였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새틴은 뭘 들이밀든 ‘네가 좋으면 나도 좋다’로 일관하던 기요른을 떠올리고서 기대를 비웠다.

“이쪽이에요. 옷 망가지면 큰일이니까 다들 조심!”

사용인들이 드레스를 차례차례 전시했다.

드레스는 모양이 죄 달랐다. 치마가 풍성하게 부푼 것, 허리를 세게 조이고 등허리에 커다란 장식을 달아 부풀린 것, 네크라인을 깊이 판 것, 치맛단을 길게 덧대어 베일처럼 치렁치렁하게 늘어지는 것.

온갖 종류의 드레스를 지켜보고 있던 새틴은 마지막 드레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루블리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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