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2)

<4화>

“키히히힝!”

난데없는 말 울음소리가 귓전을 후려쳤다. 얼떨결에 상념에서 깨어난 새틴이 시선을 돌렸다.

거리를 빠르게 질주하던 흑마가 셀 위오 가문의 저택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 속도와 기세에 놀라 새틴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신이 빈틈없이 까맣고, 화려하게 나부끼는 갈기를 가졌으면서 몸집이 보통의 말보다 한 배 반은 거대한 한혈마였다.

저토록 완벽한 혈통의 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다섯 파수꾼 가문 중 하나인 새틴의 집에도 저만한 명마는 없었다.

특히나 한혈마 중에서도 흑마를 수여 받는 주인은 이 나라에서 단 한 명뿐이다.

말의 고삐를 쥔 남자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오랜만이다, 꼬맹이.”

순간 멍해졌다. 어안이 벙벙했다.

새틴은 잠시 한 자리에 굳어 멈췄다. 누군지 몰라서는 아니었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람.

이게 얼마 만이지?

여기서 이 남자를 만날 줄이야.

여러 종류의 만감이 한꺼번에 교차했다.

그만큼 오랜만이었고, 그만큼 익숙한 사람인 탓이었다. 뜻밖의 시간에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마주쳤다.

“……아.”

새틴은 눈썹을 찡그렸다. 반가움보다는 놀라움이 컸다. 친근함보다는 당혹감이 컸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러나 몰래 사라지기에는 늦었다. 이미 눈에 띄어버렸다.

그래도 가문의 오랜 예절 교육이 빛을 발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셋을 세고서 새틴은 완벽하게 침착한, 빈틈없는 귀족 아가씨의 얼굴이 되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카 딜론 경.”

동시에 새침하게 대답했다. ‘카 딜론 경’ 에 강세를 담아서.

루블리에 카 딜론. 예전에는 카 딜론이라는 이름 아래 루블리에가 있었다면, 지금은 카 딜론이라는 이름 위에 루블리에가 있었다.

법황을 수호하는 신성 기사단의 수장. 그리하여 성스러운 팔라딘의 호칭을 부여받은 자.

가벼운 색 하나 섞이지 않은 짙은 흑발이 바람에 휩쓸려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기억하고 있던 얼굴보다 선이 더 굵어졌다.

흘러간 시간이 분위기를 가다듬고 음영을 더한 느낌이다. 익숙함과 낯섦이 묘하게 공존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눈이 시렸다.

아냐. 오래 올려다보기에는 목이 아픈 키라서 그래.

새틴은 얼른 고개를 내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남자는 참 컸다. 지나치게 컸다.

예전에도 참 부담스러운 존재감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부딪히니 꼭 막다른 벽에 별안간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다.

“소식이 궁금했는데 이렇게도 보는군. 잘 지냈어?”

“네.”

새틴은 단답으로 답하고 반문했다.

“셀 위오 가에는 무슨 일이세요?”

루블리에의 시선이 옆얼굴을 비스듬히 쫓아왔다. 새틴은 그 눈길을 물 흐르듯 받아넘겼다.

“병문안. 친구가 다쳤다는데 와 봐야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새 소식이 짜하게 돌았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오페라 극장 앞에서 프리마 돈나를 구한다고 파수꾼 가문의 아들이 몸을 던졌으니 목격자만 줄잡아도 수십은 될 터였다.

새틴은 문가에서 살짝 비켜섰다.

“들어가 보세요. 기요른은 침실에 있어요.”

하지만 말에서 내린 루블리에는 새틴을 지나쳐 들어가는 대신, 우뚝하게 서서 한마디 말을 더 붙여왔다.

“기요른은 기요른이고, 나는 카 딜론 경인가?”

“기요른은 약혼자고, 카 딜론 경은 카 딜론 경이죠.”

“아카데미에서는 그러지 않았었잖아?”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루블리에가 피식 웃었다.

“곧 결혼한다는 소식은 받았어.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나 보지?”

“네.”

마침맞게 델 마레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가 도착했다. 새틴은 생긋, 우아하게 인사했다.

“카 딜론 경. 파수꾼 가문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으니 오신다면 제 결혼식 날에나 다시 뵙겠네요. 안녕히 가세요.”

* * *

루블리에는 셀 위오 저택의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올라갔다.

사전에 연락을 넣지 않고 달려왔지만, 셀 위오의 사용인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손님을 정중하게 모셨다.

루블리에의 이름이 가진 위력이었다. 이 세상 어디든 신성 기사단의 팔라딘을 내칠 수 있는 장소가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루블리에는 기요른과 함께 아카데미에서 5년이나 수학한 친구였다.

“이게 누구야, 루브?”

침대에 누워 쉬고 있던 기요른이 루블리에를 마주하고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굳이 일어날 필요 없다는 의미로 루블리에는 손을 짧게 내저었다. 기요른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맙소사. 팔라딘에 부임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잖아. 밖에서 만났으면 엄청나게 놀랐을 거야. 제복이 아주 멋있어. 잘 어울려.”

신성 기사단의 수장을 의미하는 휘장이 가슴께에 위풍당당하게 달려 있었다. 기사단 안에 고립된 채로 루블리에가 버텨낸 노력의 길이와 깊이가 저 휘장 하나에 집약된 셈이다.

루블리에는 그 찬사를 받아넘겼다.

“보내준 축하장은 고맙게 받았어, 기요른. 이왕 만날 거, 건강한 모습으로 보게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병문안으로 만나게 되어 아쉽군.”

“그렇지. 그래도 옛 친구가 좋기는 좋아. 몇 년 만에 봐도 전혀 어색하지가 않고 옛날 기억이 많이 나는 게……. 꼭 어제도 만났던 기분이야. 그런데 다친 건 어떻게 알고 왔어?”

“다 듣는 수가 있지.”

“이거 참 여기저기 소문만 크게 나서 부끄러운걸.”

기요른이 멋쩍어했다.

한데 기요른은 혼자가 아니었다. 기요른 위로 허리를 구부린 여자가 물에 적신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만가만 닦아내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기요른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간지러움에 눈가를 살짝 찌푸리면서도 기요른은 제게 닿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았다.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루블리에는 그 광경을 일별했다. 여자가 조금 늦게 루블리에를 응시했다.

의문에서 놀라움으로, 다시 놀라움에서 반가움으로. 여자의 눈매와 입가에 맺힌 감정의 변화가 기이하리만치 극적이었다.

“신성 기사단의 카 딜론 수장님.”

이런 식으로 루블리에를 아는 척하는 인사들은 수도 없이 겪었다.

“제가 귀한 분들을 오늘 여기서 다 뵙네요. 법황 성하를 지키는 새로운 팔라딘으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을 이리 뵙게 되어 광영이어요.”

루블리에는 무관심한 턱짓으로 그녀의 인사치레를 끊었다. 대신 기요른에게 물었다.

“방금 새틴이 다녀갔더군.”

“아, 새틴과 만났어?”

“저택 앞에 있던데.”

인사를 무시당한 딜라일라의 얼굴에 잠시간 모호한 빛이 스쳤다. 기요른이 한 눈으로 딜라일라를 의식하며 잠시 말을 더듬거렸다.

서로 소개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팔라딘이셔서 과묵하신가 보네요.”

딜라일라가 서두를 끊었다. 그제야 루블리에는 딜라일라를 힐끗 보았다.

“내 친구처럼 모두에게 친절한 성격은 못 되어놔서.”

“두 분의 대화를 방해할 마음은 아니었답니다. 이야기 나누셔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희미하게 미소 띤 표정으로 딜라일라는 기요른의 머리를 괸 베개를 고쳤다. 기요른이 화제를 돌렸다.

“……어어, 새틴하고 마주쳤구나. 맞아. 병문안을 왔다가 갔어.”

“결혼식이 아마 한 달 남았던가.”

“응. 그럴 거야. 우리 결혼식에는 올 수 있어?”

“당연히 가야지.”

루블리에는 입가를 짧게 당겼다.

“새틴도 못 보던 사이 많이 변했어. 특히 인내심이 엄청 늘었나 봐. 더는 꼬맹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는데.”

그녀는 많이 변하기도 했고, 은근히 변하지 않았기도 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카데미에서 만난 어린 새틴이.

아카데미에는 열두 살이 된 명문가 출신 소년, 소녀들이 입학했다.

그중에서도 루블리에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던 해는 교내 안팎으로 화제를 깨나 모았다.

루블리에, 새틴, 기요른이 한꺼번에 들어왔던 까닭이다. 카 딜론 가의 장남, 델 마레 가의 외동딸, 셀 위오 가의 막내까지, 다섯 파수꾼 가문 중 세 곳이나 한해에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장난감 대신 칼을 쥐고 놀았던 루블리에도 장래가 촉망되는 유명인이었으나 새틴과 기요른 역시 입학 전부터 입에 오르내렸다.

부모님 대부터 결혼이 약속된 정혼자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던 날 루블리에는 새틴 델 마레를 처음 보았다.

당시의 새틴은 제 또래보다도 덩치가 훨씬 작았다. 어린 시절부터 타고나기를 장신이던 루블리에에게 유난히 자그만 새틴은 새하얀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독 색이 엷었다.

새침하고 도도한 인상의 새하얀 소녀는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살에 그대로 비산할 듯 보였다.

루블리에는 생각했다.

요정 같은 소녀가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그리고 어렸던 소녀는 어느덧 아름답고 우아한 아가씨가 되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루블리에는 기요른의 근처로 걸어갔다. 상체를 살짝 숙이고서,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기요른. 자네 사람 좋은 거야 뭐 유명하니까 그렇다 치지만 이제부터 자네가 신사로서 지켜야 할 숙녀의 명예는 새틴의 명예가 우선이야. 조심해. 결혼식장 아직 안 들어갔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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