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2)

<3화>

“……어, 있지, 새틴. 그게.”

기요른이 입술을 잠시 뻐끔거렸다. 새틴은 딜라일라에게서 기요른에게로 의아한 시선을 옮겼다.

극장에 있어야 할 프리마 돈나가 지금 왜 기요른의 집에 와 있지? 둘이 친분이 있었나?

그렇다기에는 그간 기요른에게서 프리마 돈나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었다.

기요른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도 그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공부에만 집중했다.

부모님끼리의 약속으로 새틴과 태중 정혼을 했던 기요른이다.

기요른도, 새틴도 서로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오래 봐 온 새틴이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기요른은 여자에 관련해서는 숙맥일 정도로 순진했다. 애매한, 그러나 미묘한 침묵이 셋 사이에 자리 잡았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딜라일라였다. 대극장의 유명한 배우답게 딜라일라는 무릎을 접어 먼저 인사했다.

옷깃을 잡느라 살짝 구부린 손끝마저도 마치 춤을 추듯이 우아했다.

“처음 뵙겠어요, 아가씨. 아직 존함을 듣지 못했지만 얼굴만 보아도 어느 가문에서 오셨는지는 짐작이 되네요.”

새틴은 가슴 아래까지 길게 흘러내린 제 은회색 머리카락을 일별했다.

델 마레 가문의 피가 섞인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외모에서 티가 났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집안의 유전인 선천적 색소결핍증 때문에 타고난 색이 엷은 까닭이다.

어릴 적의 새틴은 갓 직조한 천처럼 차르르한 은발을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래서 이름마저 새틴이었다.

그나마 자라면서 조금씩 색이 섞여들어 지금은 은회색이 되었다.

다만 머리나 피부색만 가지고 델 마레 가문의 직계와 방계를 구별하긴 어려웠다.

기요른이 어색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소개했다.

“……그녀는 새틴 델 마레, 제 약혼자예요.”

“아!”

딜라일라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델 마레 가의 적장녀셨군요. 아가씨, 저는 딜라일라라고 불러주세요. 출신이 변변치 못하여 달리 성은 없답니다.”

새틴은 가능한 한 차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차분함, 우아함을 유지하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혼난 까닭이었다.

“그렇군요. 딜라일라 양.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가 여기는 무슨 용건이에요?”

새틴의 질문에 기요른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새틴. 저기 말이야.”

딜라일라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실은 아가씨의 약혼자께서 절 구해주셨어요. 제 후원자가.”

수많은 관중 앞에 서서 노래하고 연기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딜라일라는 표정과 손짓이 풍부했다.

단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도 보이는 면면마다 눈길을 끌었다.

“성격이 좀 다혈질인 분이시거든요. 오늘 절 위협해서 끌고 가려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도와주시려다가 말발굽에 차이셔서요. 전부 제 잘못이니 아가씨께서는 약혼자를 너무 책하지 말아 주세요.”

“그래서 딜라일라 양이 기요른을 데려다준 건가요?”

“네. 제가 마차를 부르고 집으로 모셔다드렸어요. 진통제만 챙겨드리고 곧 돌아갈 작정이었고요. 누군지 몰랐다가 집에 와 보고서 절 도와주신 분이 셀 위오 가의 도련님이신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딜라일라가 미소했다.

“절 도와주신 후의에 감사드려요.”

기요른이 화답했다.

“신사라면 마땅히 숙녀의 위험을 두고 보아서는 안 되니까요.”

발소리를 죽인 고양이 걸음으로 기요른에게 다가간 딜라일라가 진통제를 내려놓았다.

새틴은 기요른이 쓰디쓴 진통제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입에 쓴 약을 잘 먹지 못하던 기요른이 지금은 한 마디도 불평이 없었다.

약 기운이 필요할 만큼 아파서인지, 아니면 딜라일라가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문득 헷갈렸다.

그래도 미간을 어슴푸레 찌푸리는 품새에서 약을 싫어하던 어린 시절의 버릇이 약간 남아 있었다. 새틴은 사람을 부르려 일어섰다.

“잠깐만. 바깥에 아마 토피 사탕이 있을 거야.”

“약그릇 이리 주세요.”

동시에 딜라일라가 빈 그릇을 받았다.

기요른의 입꼬리에 약이 한 방울 대롱대롱 매달렸다. 기요른이 손등으로 슥, 문지르려는 것을 딜라일라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더니 입가를 닦아주었다.

……어?

별 대단치도 않은 광경인데 이상하게 눈에 박혔다.

대극장의 프리마 돈나가 어째서 셀 위오 가의 사용인처럼 시중을 드는 거지?

새틴과 시선이 마주친 기요른이 딜라일라의 손에서 머뭇머뭇 손수건을 넘겨받으려 했다.

“제가, 제가 하지요.”

두 사람의 손이 잠시 겹쳐졌다가 이내 불에 덴 듯한 속도로 떨어졌다. 기요른이 우물거렸다.

“사탕은 괜찮아. 새틴,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잖아.”

그래, 저를 도와주다가 다쳤으니까 미안한 거겠지.

더불어 후원자의 잘못을 피후원자로서 수습하기 위해 집까지 따라왔을 테고 말이다.

새틴은 미묘하게 껄끄러운 감정을 지우고서 딜라일라를 불러세웠다.

“딜라일라 양.”

“네, 아가씨.”

“후원자가 누구예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야 각각의 사정이 있다손 쳐도 다섯 파수꾼 가문 중 하나인 셀 위오 가의 기요른을 다치게 해 놓고 나 몰라라 하다니.

새틴의 기준에 이건 심각한 무례였다. 딜라일라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딜라일라와 새틴을 번갈아 쳐다보던 기요른이 애써 웃으며 중재했다.

“새틴. 애초에 제멋대로 끼어든 나에게도 책임이 있어. 이 일은 그냥 묻자.”

새틴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기요른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것. 나쁜 것도 좋은 것.

사람 속이 암만 유하더라도 정도가 있지, 그는 항상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맹숭맹숭했다.

그러니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아등바등 기요른을 챙기게 되는 것이다.

“새틴.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기요른이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새틴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웨딩 아치를 꾸밀 꽃장식 논의 중이었어.”

결혼은 두 주인공이 가장 돋보여야 하는 순간이다.

하여 결혼식을 어떻게 진행할지 하나하나 같이 의논해야 하는데, 기요른이 참여는커녕 며칠은 드러누워 있어야 할 처지가 된 것도 악재였다.

이를 알기는 알았는지 기요른이 대번에 기가 죽었다.

“미안……. 뭐든 나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새삼스럽기는.”

이미 반쯤은 그렇게 하는 중이다.

기요른은 새틴이 의견을 제시하면 이것도 마음에 들고 저것도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뭘 물어봐도 전혀 도움이 안 됐다.

부모님은 남편의 취향이 너무도 까다로우면 맞추느라 피곤하니 편한 게 편한 거다 생각하라 했지만, 기요른은 의견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결국 대부분의 결정은 새틴의 몫이 되고 있었다.

그래, 장점을 생각해야지. 차라리 의견을 묻고 조율하는 과정이 사라졌으니 시간 단축에는 유리할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빠른 프리마 돈나는 새틴과 기요른 사이에 흐르는 애매한 정적을 알아차렸다.

딜라일라가 분위기를 환기했다.

“오늘 절 구해주신 감사의 표시로, 두 분을 언제든 제 공연의 가장 좋은 자리에 초대해드려도 될까요? 그다지 대단한 공연은 아니지만요.”

딜라일라의 공연은 항상 매진이라 표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고 들었다.

원하는 공연에 들어가려면 암표를 구해야 하는데 그 암표의 가격도 상당하다고 했다.

실제로 만나보고 나니 이 프리마 돈나에 대해 상당히 궁금해지기도 한 참이었다. 새틴은 즉각 대답했다.

“나중에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가지요.”

“두 분께서 와 주시면 저에게도 정말 영광일 거예요. 파수꾼 가문에 대해서는 늘 세간의 소문으로 접했는데, 이렇게 실제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심지어 제 은인으로서요. 다만 아가씨께는 너무나 큰 폐를 끼쳐 드리게 되었네요. 죄송해요.”

이쯤 되니 하루하루가 아까운 이 중요한 시기에 경거망동을 했다고 기요른을 탓하기도 민망하게 되었다.

“기요른의 말마따나 숙녀의 곤경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건 신사의 도리가 아니니까요. 그를 간호해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딜라일라 양도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고요.”

새틴은 가문에서 익힌 완벽한 예의로 딜라일라에게 인사를 남겼다. 뒤이어 기요른을 쳐다보았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푹 쉬어야 빨리 회복할 테니까. 딜라일라 양, 오페라 극장으로 돌아가나요? 마차를 보내 드리죠.”

“호의는 감사하지만 돌아가는 마차는 제가 부르면 되니 더는 마음 쓰지 마세요, 아가씨.”

딜라일라가 거절했다.

“그래, 새틴. 그녀는 내 손님이니 마차는 내가 준비하면 돼.”

기요른까지 거들었다. 새틴도 굳이 두 번 권유하지는 않았다.

“지금 돌아가는 거지? 새틴. 잠깐만.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할게.”

기요른이 팔꿈치로 침상을 디디며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다리로 어떻게 일어나겠다고 그래? 그냥 누워있어. 다음에 다시 올게. 나한테 미안하면 빨리 낫기나 해.”

“알았어…….”

흐트러진 이불보를 바로잡아 줄까 하다가 딜라일라가 먼저 손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서 새틴은 그냥 뒤돌아섰다.

기요른은 침대에 누운 채로 새틴을 배웅했다.

느닷없는 사고가 당황스러웠지만 이왕 벌어진 일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람을 도와주다 다친 거라서 마냥 잘못이라고 하기도 뭣했다.

그러니 이제는 그저 기요른이 결혼식 전까지 무사히 회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아가씨, 많이 놀라셨죠?”

“결혼식을 앞두고 이게 무슨 봉변인지…….”

“두 분이 행복하게 사시려고 미리 액땜이 들었나 봐요.”

셀 위오 가의 사용인들이 대신 배웅을 하러 따라붙으며 새틴을 위로했다.

할 말이 참 많은데 말을 할 수가 없다. 여러모로 기가 막혔다.

저택 입구로 터벅터벅 걸어 나오던 새틴은 잠시 기요른의 침실이 있는 위층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기요른은 어째서 병문안을 온 저를 보자마자 자꾸 돌아가라고 권유한 거지? 아픈 몸으로 손님을 맞기 번잡스러워서? 하지만 저 프리마 돈나는 왜 지금까지도 내보내지 않는 건데?

꼭 저와 딜라일라가 마주치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