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12)

<2화>

2. 어디서부터 이 결혼이 잘못된 걸까

“……꽃은 리시안셔스가 좋겠어요. 리시안셔스와 줄리엣 로즈를 섞어서 거대한 웨딩 아치를 세우는 거죠. 크림색에 분홍색과 보라색 꽃을 드문드문 섞어 화려하게 강조하면 어떨까요? 너무 잔잔한 색보다는 약간 강렬한 색이 보기에 심심하지 않을 거예요. 어때요, 괜찮,”

“시언, 숙녀의 명예를 지키는 신사로서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래! 나도 바라던 차였다!”

악, 깜짝이야!

일순 쩌렁쩌렁한 고함들이 열린 창문을 타고 방 안으로 날아들며 새틴의 목소리를 덮었다.

거리가 제법 먼데도 어찌나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새틴은 그만 나누고 있던 이야기를 깜빡 놓쳐버렸다.

“네, 아가씨. 리시안셔스와 줄리엣 로즈를 섞은 웨딩 아치요. 요즘은 화사한 꽃들이 유행이니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옛날에는 잔잔한 꽃장식을 선호했지만 지금 아가씨들께서는 화려한 스타일을 더 좋아하시니까요. 그러면 부케는 어떤 형태가 마음에 드십니까?”

참, 그래. 결혼식에 쓸 꽃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새틴은 얼른 화제를 되살렸다.

“물론 하얀색이죠. 클래식은 영원하잖아요? 당연히 신부의 드레스와 부케는 반드시 하얀,”

색이어야만 해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이번에는 세레나데가 울려 퍼졌다.

“그대여, 창문을 열어다오오오…….”

한밤도 아니고 대낮부터 대체 무슨 세레나데람.

그것도 비밀리에 연인을 부르는 세레나데가 아니라 세상 들으란 듯 요란하게 내지르는 세레나데였다.

후. 새틴은 한숨을 쉬고서 라리에게 창문을 닫으라 눈짓했다.

바깥에서 온갖 소음이 끼어드는 통에 도무지 이야기가 진척되지를 않았다.

결혼식까지는 이제 겨우 한 달이 남았다. 더구나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두 가문이 만난 만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결혼식이다.

이 단 하루를 위하여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더는 창밖의 소란에 방해받을 시간이 없었다.

“창문을 닫으면 답답하고 더울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아가씨?”

라리가 걱정스럽게 묻다가 아이쿠, 혀를 차며 창문을 닫았다. 때맞춰 시작된 채앵, 챙, 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자칭 신사들의 결투와 연인을 위한 세레나데. 참으로 소설이나 연극에서 나올 법한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청년들이 골목마다 결투를 벌이다 칼을 맞아 실려 가고, 아침저녁으로 음치의 소음공해에 시달리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자유연애?

그놈의 자유연애!

다 좋다. 다 좋은데,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냐.

예전에는 길거리 예술가나 방랑자들 사이에서나 유행했던 단기간의 짧은 연애가 갑자기 신분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성행하게 된 이유에는 오페라 극장의 새로운 프리마 돈나가 있었다.

새틴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

아마 ‘딜라일라’라고 했던가. 장미처럼 정열적인 붉은 머리카락과 옅고 투명한 푸른 눈을 가졌다는 여자.

외모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들려오는 풍문으로는 노래를 한 번만 들어도 그 목소리에 빠져든다고 했다.

그녀가 오페라 극장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후부터 사람들은 딜라일라가 노래하는 낭만적인 연애에 열광했다.

심지어 귀족들도 다르지 않았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광장에서나 들렸던 사랑의 세레나데가 이제는 귀족 자제의 창가에서도 울렸다.

정원 한쪽에서 티 파티를 열고 있으면 후원에서는 결투가 벌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제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새틴은 아직 그 유명한 딜라일라가 누군지 보러 가지 못했지만, 하도 사방팔방 들은 이야기가 많아서 상상만으로도 프리마 돈나의 미모가 충분히 그려질 정도였다.

그녀로 인해 이 주변 남자들 절반이 상사병을 앓았다.

딜라일라의 공연이 있는 날에는 대기실로 선물이 속속 쌓이고 사랑을 고백하는 꽃길이 극장 앞에 깔린다고 하니 가히 어마어마한 인기였다.

“하얀 부케는 신부님들의 영원한 로망이죠. 다만 아가씨께서는 피부가 하얗고 머리카락도 색이 밝으니 귀 옆에 부케와 같은 꽃을 한 송이 꽂아도 잘 어울리실 겁니다. 분홍색이나 푸른색으로요. 색이 상반되면 더 눈에 띄게 마련이거든요. 그다음은…….”

이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세상에, 이걸 어째? 새틴 아가씨 지금 어디 계세요?”

창밖의 소란을 잠재웠더니 이번에는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새틴은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엔 또 뭐야? 결혼 한 달 남은 신부에게 아직도 안 끝난 결혼식 준비만큼 중요한 문제가 뭐가 있어서?

어쨌든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새틴은 라리에게 눈짓했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하녀는 방해꾼을 잠시 잠재우러 나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라리가 더 요란하게 굴러들어왔다.

“큰일 났어요, 아가씨!”

진짜 큰일인가 보다. 새틴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기요른 님께서 다치셨대요!”

새틴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한 달 후면 결혼하는데 약혼자가 다쳤다고?

놀란 새틴이 다급하게 재우쳤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데? 어쩌다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걷지 못하고 마부에게 업혀서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대요.”

“맙소사…….”

아침부터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싶더니 지금 들은 소식이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새틴은 손을 흔들어 자리를 파했다.

“결혼식 논의는 다음에 계속해요. 나는 기요른에게 가봐야겠어, 라리, 당장 마차를 준비해 줘!”

“네, 아가씨.”

라리가 허둥지둥 뛰어나갔다.

새틴은 거추장스럽게 다리에 엉겨드는 치맛자락을 휘감아 쥐고서 화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걱정 끼쳐서 미안해, 새틴. 그 정도로 심한 부상이 아닌데 우리 집 하인들이 호들갑을 떨었던 모양이야.”

허리 뒤에 쿠션을 괴고서 침대에 반쯤 기대어 있던 기요른이 창백한 얼굴로 빙긋 웃어 보였다.

안색이 조금 좋지 않을 뿐 상상했던 끔찍한 몰골은 아니었다.

다행이다.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풀려, 새틴은 근처의 안락의자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정말 괜찮아?”

“괜찮다니까.”

“하지만 마부에게 업혀 들어왔다고 하던데? 다리를 다친 거 아냐?”

그래도 아직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는 듣지 못했다. 새틴은 이불로 손을 뻗었다. 기요른이 팔로 이불 옆을 꽉 누르며 방비했다.

“어디 봐 봐.”

“신경 쓰지 마, 새틴. 이미 의사가 보고 갔어.”

“상태가 어떤데 벌써 의사가 보고 가?”

“그냥 별로 안 다쳤어.”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얘기하잖아. 무조건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요른. 내가 약혼녀야. 약혼자의 상태가 어떤지는 의사가 아니라 약혼녀인 내가 제일 잘 알아야지. 새신랑이 결혼식장에 발을 절면서 입장하면 그땐 어떡해?”

그제야 기요른이 머뭇머뭇 팔에서 힘을 풀었다.

새틴은 이불을 걷어내다가 비명을 질렀다.

“악! 이게 다 뭐야!”

치료를 위해 다 뜯어 놓은 바지 아래로 드러난 종아리가 온통 시커멨다.

얼룩덜룩한 멍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흉도 찍혀 있었다. 언뜻 눈으로 보기에도 꽤 큰 상처였다. 이만하면 뼈와 근육에도 당연히 충격이 갔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말에게 조금 걷어차여서……, 그래도 보기만 사납지 별거 아냐. 결혼식장에는 내 다리로 걸어서 들어갈 수 있어. 의사도 움직이지 말고 며칠만 잘 쉬면 문제없다고 했거든.”

“고작 며칠 쉰다고 싹 나을 상처가 아니잖아? 말에는 왜 걷어차였는데?”

“우연히 좀 사고가 생겨서…….”

기요른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새틴은 캐물었다.

“사고? 무슨 사고?”

“새틴. 정말로 결혼식에는 지장 없게 할게. 일단 돌아가. 내가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응?”

“지금 결혼식이 문제야?”

말에게 걷어차였으면 큰 부상이다. 정말 제대로 걷어차이면 뼈도 부러진다.

이제 보니 이마며 목덜미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꼴이, 놀라서 달려온 약혼녀에게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통증을 참는 중인 듯했다.

“기요른. 너 함부로 사고당할 만큼 조심성 없는 성격은 아니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없었어. 정말로 우연이었다고. 새틴, 나 환자야. 조금만 조용히 쉬면 안 될까?”

“아무래도 의사를 다시 오라고 해야겠어. 대체 어떤 돌팔이가 이런 상처를 보고 며칠만 잘 쉬면 된다는 진단을 내린 거야?”

사람을 부르려 새틴이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두 번의 노크가 들렸다.

새틴과 기요른은 실랑이를 멈췄다.

문이 열렸다.

“진통제를 가져왔어요. 어머, 손님이 계셨네요?”

낭랑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귓전에 박혔다. 새틴은 문가를 향해 몸을 틀었다.

홀릴 듯한 여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붉은 머리카락에 다소 날큰한 눈꼬리를 가진 여자였다.

비스듬히 뻗은 눈매 때문에 눈빛까지 묘해 보였다.

윗입술에 비해 아랫입술이 도톰하게 튀어나온 것도 시선을 끌었다.

다만 오른쪽 볼에 찍힌 조그마한 점이 그녀를 의외로 앳되어 보이게 했다.

숙녀와 소녀가 공존하는 외모였다.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 대부터 이어진 오랜 인연이었기에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새틴은 기요른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따라서 새틴은 이 집 사람들을 속속들이 다 알았다. 그 어떤 자질구레한 잡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모르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저 여자는 오늘 처음 보는 여자였다.

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 지나치게 기억에 낯익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소문을 들었던 사람인 까닭이다. 눈을 감고도 어떤 느낌인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무수한 이야기를 접해 왔었다.

그리고 실제로 맞닥뜨리고 보니, 그 어떤 소문도 실물에 비해 결코 넘치지 않았다.

이름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새틴은 금방 알아차렸다.

딜라일라. 바로 오페라 극장의 프리마 돈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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