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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화 〉4막 (中) 드래곤 레이디 - 1 (111/111)



〈 111화 〉4막 (中) 드래곤 레이디 - 1

유리 온실의 정가운데.

나지막하게 솟아오르는 분수대 옆,  마시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테이블 주위로 둥글게 앉아 있는 사람들.

“피르르르….”

그리고 작은 용뿔 소녀 하나.

의자에 앉아 있는 코니 옆, 아무렇게나 바닥에 앉은 채, 턱을 코니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다. 그런 소녀의 부스스한 은발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코니는, 갓 데운 홍차를 마시며 정신을 차리려는 로즈에게 말을 걸었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인간의 문화를 학습할 수 있었다. 적절한 변명이 있으면 이방인이 나타나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게 어느 순간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단 말이지.”
“인클로저(inclosure) 때문인가 보군요.”
“오.”

그녀의 즉답에 코니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부러워라. 공화국에서는 왕국 근대사도 가르쳐주나 보네?”
“유학 가기 전에 배웠습니다.  정도의 굵직한 사건은 구대륙에서도 상식의 영역이지요.”

증기 문명이 발전하면서 점점 많은 일자리가 도시와  주변의 공장에서 생겨났고, 시골에서 늘어난 인구만큼 도시로 차츰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이끌어나가야  젊은 사람이 고작 한두 세대의 짧은 시간 만에 훅 빠져버린 교외 시골의 사회는 빠른 속도로 쪼그라들기 시작했고, 사람이 드물어진 만큼 더더욱 주민들은 더 많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 삶의 장소를 옮긴다.

악순환의 연속. 연합왕국의 시골이 쪼그라든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도 그 가장  축에 인클로저가 있었다.

“예전의 시골이 느슨한 경계를 따라 풀밭을 쓰면서 마을이 유지되었다면, 지금 농촌은 완전히 달라졌지요. 소수의 자본가가 다수의 농민을 고용하는 식으로.”

각자의 사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선을 긋는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그걸 법으로 강제하게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렇게 농촌 마을이 무너지게 되면서, 예전이었으면 그들 속에서 인간 사회를 배웠어야 할 기회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거군요.”
“거의 맞는 말이야. 그것도 중요하긴 하지.”

코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어.”

호기심이 담긴 로즈의 눈빛을 튕겨내면서 코니는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슈테린도 부스스 기지개를 켰다.

“여기서부터는 좀  사적인 부탁을 해야 할 거 같은데. 로즈, 괜찮지?”
“지금까지도 충분히 사적이지 않나요.”
“아니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건 국가적인 문제거든.”
“예?”

슈테린은 말없이 당근을 깨작깨작 깨물어 먹고 있다. ‘국가적인 문제’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코니.

“이 아이가 몇 살로 보여?”
“외견으로 보이는 건… 아직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네요.”

로즈는 이제 막 어린아이의 풋풋한 티를 벗어나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린 소녀의 연령대에 대한 인식은 올리버보다는 좀 더 멀쩡한 편에 속하리라.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형태로 변신한 모습이지요. 진짜 나이는 짐작하기 어렵네요. 음….”

코니가 물어본 건 '몇 살로 보이냐'는 말. 단순하게만 보면 로즈가 처음 꺼낸 답이 맞다. 그래도 로즈는 한 번  뜸을 들였다.

“—…드래곤의 수명이 대략 이천  정도 되는 거로 알고 있어요. 인간의 생애주기에 그대로 대입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단순하게 나누어서 보면… 250살은 되어야 하겠는데요.”

인간과 영물(靈物)의 시간은 다르다. 우선은 인간 기준대로 말을 하는 로즈의 대답에 “너무 모범적이네~”라고 킥킥 웃는 코니.

“뭐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무난하긴 하지. 그치, 올리버?”
“엉?”

조금 전부터 약간 거리감을 두고 있던 올리버는, 갑작스런 호명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판단을 맡긴 거야?”
“여기서는 그나마 네가 제일 표준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으니까.”
“칭찬하는 거라면 고마운 말이겠지만 아마 칭찬은 아니겠지. 네가  순순히 칭찬해줄 리가 없어.”

머리가 아파 보이면서도, 올리버는 팔짱을 낀  잠깐 생각하더니, 순순히 대답했다.

“나도 로즈의 말이 합리적인 추론인 거 같다. 즉석에서 끌어낸 생각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추론이야. 일단, 정답은 아니더라도.”
“역시 틀렸습니까.”
“응. 정답은 아니야.”

한 손으로 턱을 괸 코니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로즈. 혹시 '마그누스의 딜레마'라는 거 들어본  있어?”
“네? 그야 당연히….”

무심결에 답을 하던 로즈는, 누군가 등에 얼음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아! 설마, 이 아이가?”
“역시 영재 유학생. 생각의 회전이 진짜 빠르네.”

순수하게 코니가 감탄하든 말든, 이미 로즈의 머리를 채우는 건 귓가로 들려오는 친숙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의 경계심은 간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로즈는 슈테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 무릎을 굽혀 앉아서, 머리의 뿔을 쓰다듬었다.

“후으응.”
“와, 우와아….”

짜고 치는 장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진 로즈의 행동거지.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마그누스의 딜레마!

“그게 뭐냐?”
“올리버…. 네가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절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고, 코니는 슈테린을 인형처럼 품에 안으면서 그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연합왕국과는 좁은 해협 건너편에 있는 구대륙. 그 북동쪽으로는 산이 하늘에 박혀 있는 드높은 산맥. 바람조차 넘지 못하는  산 너머에 [마그누스의 숲]이 있다.

그 숲에는 선천적으로 수명이 긴 민족이 살고 있었다. 예로부터 산맥 지역에 살던 몇몇 주민들만이 계곡의 틈바귀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는 지름길을 알았고, 그들은 마그누스의 숲에서 진귀한 공예품과 물물교환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민들은 짐 상자 안에서 숨어있는 아이를 뒤늦게 발견하게 되었다.

고작해야 열 몇 살 정도로 보이던  아이는, 마치 동네에서 가출한 꼬맹이처럼 다루는 주민들을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능숙하게 대륙어를 하는 꼬마는, 주민들이 모셔온 마을의 장로 어른에게 물었다.

‘오랜만이다. 자네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그 질문에 먼저 화를 낸 건 마을 주민들이었다. 아무리 수명이 긴 민족이라고 해도,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장로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걸 그대로 넘기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화를 내려는 주민들을 달랜 건 장로 어른이었다.

‘다시 만나자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장로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동네 주민들은, 이윽고 장로에게 이런 설명을 듣게 된다.

숲의 민족은, 그저 인간보다 오래 사는 것이 아니다. 느리게 성장하고, 느리게 어른이 된다.

‘나는 이 아이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이 진 장로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주민들은 숲의 아이를 다시금 보게 되었다. 그저 어려 보인다고 해서 어린애 취급을 했던 자신들이 얼마나 무례한지 깨닫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가늠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흔히 들을  있는 동화일 뿐이겠지. 문제는, 이 동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란 거야.”

그렇게 말하는 코니가 슈테린을 쓰다듬는 손이, 멈췄다.

“여기까지 말하면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수 있겠지. 올리버.”
“푸하하, 해부학 교수한테 학점 정정 기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제발 학점 올려달라고 싹싹 빌었던 ‘최후의 용사’에게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마치  아니었던 것처럼 말하는 그 뻔뻔함은 마음에 드는걸. 근데 너도 최후의 용사 파티였잖아!”

정말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입씨름이 잠깐 오가고, 코니는 이제 올리버가 아닌 로즈에게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숲의 아이가 나타났던 바로 다음 날. 이번에는 마그누스의 숲에서 먼저, 인간의 마을에 사람을 보냈다.

「숲의 민족은 스스로 숲을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수 백 년간의 관습을 깨고 나타난 여인은, 자신의 마을에서 집을 나온 아이를 찾으러 왔다고 했다. 전날 마을에  어린아이는 그저 부모님과 어른들한테서 들었던 동화를 따라 했던 것이었다.

겉으로 어려 보였던 숲의 아이는, 진짜로 어린아이였다.

오래 사는 영물은 겉만으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어려 보이는 외견 속으로 삶의 연륜을 감춘 노파일 수 있지만, 진짜로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

이것이, 마그누스의 딜레마.

“드래곤이라고 무조건 인간보다 경험이 많고, 인간보다 똑똑하고, 인간보다 영악하며 잔악무도한 건 아니다.”

코니가 슈테린의 턱을 가볍게 긁었다. 기분 좋게 그르렁거리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코니는 말했다.

“이 아이는 아직  살도 채 안 됐어. 진짜 어린 드래곤이야.”
“믿어지지 않아요. 이렇게 눈으로 보고, 만지고 있으면서도….”

마찬가지로 부슬거리는 슈테린의 은빛 머리칼을 로즈는 부슬부슬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코니 씨. 정말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응. 일단 물어봐. 지금  기분이 좋으니까 뭐든 답해줄게.”
“이 아이는, 진짜로 열 살도 채   거잖아요.”

싱글싱글 웃는 코니와는 다르게,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코니는 팔짱을 낀  몸을 일으켰다.

“슈테린은 우리 인간 기준으로도 어려요. 하물며 드래곤의 기준으로 보면, 정말로 어린 영유아인 거나 다름이 없는 거죠.”
“그럴 거야. 이제 한두 살인 거겠지. 드래곤이 보면.”
“그런데….”

눈을 바쁘게 데굴데굴 굴리면서, 로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어린 드래곤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 말을 써낸 순간, 유리 정원의 공기가 잠깐 시간이 멈춘 느낌이 들었다. 피르르르, 잠에 겨운 숨을 내몰아 쉬는 슈테린을 안은 채, 코니는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비스듬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것이다.”
“뭐?”

코니의 말은 사실이다. 어이가 상실되어버린 로즈의 말이 짧아지는 건 신경 쓰지 않고, 단기서약이 풀리지 않은 혓바닥이 소녀의 사상을 읊는다.

“부모도 알 수 없어. 자연종인지 아니면 사육종인지조차도 몰라. 원래 부모를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단서를 찾지 못했고, 슈테린도 나를 따르고 있어. 그러니까 일단은  꺼야.”
“그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코니 씨?!”
“말이 되지. 말이 안  이유가 있어? 로즈?”

어이가 없을 만큼. 지나치게 단순한.

그렇기에 반박할 수 없는 코니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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