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4막 (上) 유학소녀 - 11
“지나갔어.”
“어느 방향으로?”
“우리가 온 방향에서 와서, 그대로 북서쪽으로.”
다시 고개를 쏙 집어넣은 코니가 손 모양으로 슈웅- 움직이는 자세를 취했다. 그 손짓을 이해한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당분간은 안 돌아오겠네. 여기서 한 블록만 내려가도 일방통행 구역이야.”
“응. 그렇지만 이제 이건 못 타겠구만.”
“걸어서 이동하자. 소화도 할 겸, 운동도 되겠네.”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린 올리버는 방수포를 헤쳐 밖으로 나왔다. 그를 따라서 모두가 내리자 운전석에서 잠금장치를 돌리고, 차 열쇠를 재클린에게가볍게 던졌다.
“회수는 부탁할게.”
“알았어!”
재클린은 한 손으로 낚아챈 열쇠를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물었다.
“이렇게 빨리 누군가에게 뒤를 밟히다니, 좀 놀라운데. 오빠는 어떤생각이 들어?”
“빨리 화장실 가고 싶어.”
“그 생각도 놀랍긴 하다. 아야!”
코니는 올리버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면서, 벌게진 얼굴로 그느느- 하고 이를 악물었다.
오늘 하루 나절 동안 이어진 이 연이은 대참사, 누굴 원망하랴.
‘단기 서약. 정말로 성능 확실하군.’
단기로 맺은 게 이 정도라면, 대체 장기로 맺는 서약은 얼마나 오래가는 걸까. 애초에 해제는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코니는 가죽 재킷을 벗어서 차 안에 넣었다.
“로즈도 벗는 게 좋을 거야. 너무 눈에 띄니까.”
“네. 저기, 그런데 여기는….”
딱딱한 얼굴인 로즈의 눈동자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본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골목길은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가 난다.
증축에 증축을 거듭한 연립주택이하늘 높이 치솟아 있고. 마치 나무 기둥에서 자라나는 나뭇가지처럼, 녹슬고 삐그적 거리는 파이프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와, 저들끼리 얼기설기 엉켜 있다.
양 건물 나란히 매달린 밧줄에 매달린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은 흡사 알록달록한 만국박람회의 깃발.
그 벽을 모자이크처럼 꾸미고 있는 합판과 철판의 불법 증축물에서는, 그러나, 박람회의 꿈과 희망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다.
“여기, 슬럼가 맞죠?”
“그렇지. 공화국에서는 비슷한 거 본 적 없어? 그쪽 수도에도 있을 건데.”
작게 물어보는 코니의 말에 로즈는 살짝 움츠러든 어깨로,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 본 적 없어요. 으, 그것보다 이 냄새가….”
“괜찮아. 코는 금방 둔해지니까.”
경험자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남방도시 바트나에서, 로드리와 함께 걸었던 밤의 슬럼가는 바닷가 특유의 물비린내까지 뒤섞여 있었다. 거기보다는 상태가 나은 편이었다.
“왕실과 정부의 감시에서 피하려면 ‘북쪽 거리’가 제일 좋거든. 로즈 너도 나중에 음험하고 비합법적인 일을 꾸밀 때에는 여기로 와.”
“설마요.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저는 그런 나쁜 어른으로 자라지 않을 겁니다!”
“후후… 너 이미 그 ‘나쁜 어른’이 되었다고.”
코니의 말도, 아주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이 퍼지기만 해도, 정부가 암암리에 관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위험인 관리 목록’에 오를 수 있겠지. 이 정도는 로즈도 모르는 게 아니다.
슬럼가.
레인폴의 슬럼가는 도심 중심부와 교외의 경계, 즉 중심가를 감싸고 있는 도넛 형태의 구역에 느슨하게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슬럼화가 된 지역은, 지금 자신들이 도착한 『5번 에비뉴』.
속칭 ‘북쪽 거리’다.
공화국으로 유행하기 전까지, 레인폴에서 태어나고 자란 로즈는 당연히 북쪽 거리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나쁜지도 알고 있었다.
“제가 삼 년 전에 알고 있던 그 북쪽 거리가 맞다면, 그때보다 더 좋아진 건 없습니까?”
“나빠진 건 많지. 좋아질 기미가 없어.”
프리스카 가문과 마찬가지로 레인폴에 자리를 잡은 커빗 가문. 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코니다. 소녀는 나이 든 사람처럼 쯧쯧 혀를 찼다.
“지역 경찰들은 포기한 곳이다. 교구에서도 여기서 누가 태어나고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 확인도 안 하는데 어쩌겠어. 불이라도 안 나는 한, 절대로 안 들어올걸.”
“그렇습니까….”
신랄한 코니의 말에 그녀는 조금 풀이 죽었다.
레인폴 시의 실질적인 관리를 맡은 프리스카 가문의 일원이다. 도시의 어두운 부분에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문의 미래를 꿈꾸는 그녀에게 레인폴의 어둠을 보여준 건, 나쁘지 않다.
딱히 여기까지 코니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트렁크에서 이런저런 소지품을 챙기고 다시 방수포를 꼼꼼하게 덮은 재클린은, 밝은 목소리로 로즈의 팔을 바짝 끌어 붙였다.
“우선은 우리가 감당할 일부터 하는 거야. 지금은 오빠와 관련된 일부터 차근차근히 하자고.”
“네, 네에. 언니.”
살갑게 다가온 재클린 덕분에, 바짝 굳어 있던 로즈의긴장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런 둘을 바라보면서 올리버랑 코니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넷 중에서 가장 위축이 되는 건 로즈 프리스카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재주는, 이 둘에게는 없었다.
올리버가 앞장서서 걸어가는 와중에 이런저런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 재클린은 끊임없이 로즈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가 정확한 위치를 외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빈민가의 침울한 공기에 파묻히지 않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재클린 언니. 술은 잘 마시는지요?”
대화 와중에 꺼낸 로즈의 질문에 재클린은 “으음~” 하고 팔짱을 꼈다.
“마실 줄은 알지. 버번이든 럼주든, 마셔도 별로 취하는 기분이 안 들어서 안 마시긴 하는데, 그건 왜?”
“이제 선술집에 가잖아요. 아, 가서 꼭 마신다는 건 아녜요.”
“하하, 그러고 보니 이제 우리 로즈도 술 마실 때가 다 되었지!”
기분 좋게 말하면서 재클린은 걸음을 멈췄다. 무의식중에 계속 앞으로 앞으로 걷던 로즈도 화들짝 걸음을 멈췄다.
올리버와 코니가 먼저 도착한, 아무런 간판이 없는 반지하 현관문.
“흠흠.” 하고 무게를 잡은 재클린은 특이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쇠문 손잡이를 꽉 쥐고 잡아당겼다. 기름칠을 잔뜩 한 경첩이 소리 없이 부드러이 회전하고, 문이 열렸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분위기.
테이블 위로 의자가 뒤집어 올라가 있는 선술집은 벽에 걸린 등불만이 간신히 물체의 윤곽을 오렌지빛으로 칠해준다.
그 너머 계산대 뒤, 마른 수건으로 잔을 닦고 있는 털북숭이 남자 하나. 그는 이쪽을 힐긋 보더니, 몸을 계산대 아래로 숙였다가 곧장 일어섰다.
“주문은.”
여전히 손은 아래로 내려가 있는 채다. 주인장의 질문에 재클린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커스터드 크림 2개에 진주를 얹어서.”
“여신 이샤카의 긍휼한 빛은.”
“영광의 신민(神民)에게.”
거침없는 재클린의 답에 수염 덥수룩한 주인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산대 아래로 내리고 있던 양손을 올렸다. 그 손에 들려진 걸 본 로즈는 저도 모르게 딸꾹질이 나왔다.
“이쪽의 숙녀분은 처음 보는 손님이군.”
“내 친구다. 곧 동료가 될 사람이지.”
주인장이 쥐고 있는 건 다 큰 어른의 팔뚝만 한 크기의 라이플이다. 안전고리를 다시 거는 주인장에게, 코니는 계산대에 비딱하게 기대어 선 자세로 말했다.
“그런데 당신,여기서 사냥이라도 할 거야? 코끼리도 잡을 수 있겠는데?”
“그래. 코끼리도 잡을 수 있는산탄총이다. 이 코딱지만 한 술집 정도는 빈틈없이 벌집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말한 주인장은 뒤돌아서서, 바닥의 페달을 발로 꾹 밟았다. 술이 가득 채워져 있던 선반이 왼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너머로 숨겨진 쪽문이 드러났다.
“얼른 들어가라. 낮 손님이 올 수도 있다.”
“이 장치도 고장이 나면 큰일 나겠네. 아까운 술병이 다 깨지면큰일이잖아.”
“뭐어… 그렇기는 하다만….”
주인장이 ‘얘 뭐 잘못 먹었냐’ 하는 표정으로 재클린을 바라보았다.
그도 코니는 자주 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면은 익을 정도로는 봤었던 사이다. 평소보다 완전히 다른, 수다스러운 소녀의 모습은 그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정이 좀 있어서요. 기분이 좀 좋아 보이니 이해해줘요♬”
계산대 옆으로 돌아간 재클린은 쪽문을 열고, 먼저 허리를 숙여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서 올리버도 주인장에게 눈인사하고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남은 사람은 둘, 로즈와 코니.
“먼저 들어가시겠습니까?”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로즈는 곧바로 몸을 뒤로 물렸다. 생각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는 본능적인 그녀의 양보에, 코니는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지었다.
“너한테는 엎드려서 부탁하면 아무리 힘든 요구라도 들어줄 거 같아. 못된 남자의 몹쓸 부탁을 조심해.”
“무, 무슨 말씀이에요?”
“거절하는 법을 모른다는 거야. 그게 네 매력이지만 약점이기도 하지.”
뭔가 이상한 말을 하면서 코니는 먼저 앞장섰다. 그다음, 뒤따라 로즈가 쭈뼛 들어갔다.
쪽문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와는 달리.
몇 미터 정도 더 들어가 그 안으로 보이는 공간은 어두컴컴하고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던 선술집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포르톨라노(Portolano, 옛날 해양 지도)가 그려진 양탄자가 깔린 조그마한 휴게실 공간.
넉넉하게 넓진 않아도 서너 명 정도가 가볍게 대화를 나누기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재클린과 올리버는 서 있을 뿐. 소파에 앉지 않았다. 코니는 불이 꺼진 난로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우리 목적지는 선술집이 아니야. 로즈.”
코니가 말을 하는 사이에 올리버는 곧바로 들어왔던 문의 잠금장치를 채웠다. 그리고 재클린이 벽난로 선반에 올려져 있던 빗자루를 들어서 코니에게 건네주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은 아닌지 호흡이 척척 맞다.
자기 키보다도 큰 빗자루를 어깨에 걸쳐 들고, 코니는 로즈에게 말했다.
“옆으로 두 발자국만 걸어줘.”
“왜요?”
“그건 두 발자국 가면 알려줄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수수께끼 같은 소녀의 부탁.
로즈가 물러서자마자, 코니는 그녀에게 곧장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뒤에 가려져 있던 작은 의자를 들어 옮겼다.
“그냥 제 뒤에 있는 의자가 필요하다고 부탁하시죠.”
“내 성격이 원래 비비 꼬여 있어서 그래. 개떡 같은 내 성격을 용서해주길 바래.”
“그, 그렇게까지 자학하진 마세요.”
“미안할 건 없어. 나도 내 마음에 솔직해지는 기분이 싫기만 한 건 아냐. 응.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은 것도 아니야…. 단기 서약, 이젠 싫어….”
이젠 자포자기한 코니는 의자를 양탄자 위에 올렸다. 바닥에 깔린 양탄자에서, 각 배가 나아갈 항해선을 이어주는 나침반 무늬 위로.
“흡!”
그 위로 올라간 코니는, 그대로 빗자루를 쥐어 들고 뾰족한 손잡이 끝을 천장으로 향했다.
전부 몇 세기 전에는 만들어진 듯 중후한 멋이 나는, 나무 타일 천장의 나열에서 코니가 선택한 홈은 단 하나.
주변 테두리가 아주 약간 패여 있는 우드 블록에 빗자루 끝을 밀어 넣고.
있는 힘껏 위로 꾹누르자!
「구구구궁─」
감추어져 있던 천장 입구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유압 실린더로 연결이 된 녹슨 철판 계단이 금세라도 부러질 것처럼 엄청나게 삐걱대며 내려왔다. 이번에는 코니가 앞장서서 올라가고 그 뒤를 올리버가 따라간다. 머뭇거리는 로즈의 뒤에서 재클린이 가볍게 어깨 위로 손을올렸다.
“가파르니까 천천히 올라가자!”
“네.”
계단을 올라가자, 어두컴컴한 천장 위 공간이 보인다.
얇고 굵은 황동 파이프관이 수직과 수평과 직각의 입체적인 베를 짜고 있다. 그 사이로 어떤원리인지는 몰라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켜진 전기 램프가 은은한 연초록 반딧불 색의 빛을 뿌리고 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구형 증기 배관 설비.
또각또각. 그 사이로 걸어가는 코니 일행의 발걸음 소리가 느지막하게 황동관에 울려 메아리로 퍼진다.
어떤 건 어른 몸통만 하게 커다랗고, 또 다른 파이프는 개미도 겨우 지나갈 정도로 가느다랗다. 그 무엇 하나 지금은 그 어떤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시체 같네요.”
로즈가 꺼낸 비유에 “그렇죠.”라고 적극적으로 동의한 건, 올리버였다.
“수석증기기관에서 나오는 중앙증기 배관은 이미 지중화(地中化; 땅에 묻어서 설치)가 끝났으니, 원래 계획이었다면 다 걷어가서 녹였을 거예요. 슬럼가에서도 폐쇄 증기 배관은 거의 다 수거되었을걸요.”
“그러면 이건 어째서 원형을 지키고 있는 겁니까.”
“이쪽 주변은 사유지와 국유지와 시유지가 얽혀서 책임이 애매모호 하거든요. 맞지, 렉스?”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하여간.”
코니가 주먹을 쥔 손으로 황동관을 가볍게 치자, 「터엉─」하는 울림이 퍼져나갔다.
“중요한 건, 여기로 이동하는 건 아무한테도 안 들킬 수 있다는 거지.”
코니의 말대로 한참 걷는 동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라고 해봤자 어디까지나 체감 시간이 그런 거고, 실제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니었겠지만 말이었다.
그렇게 몇 집의 연립주택 천장 공간을 누볐을까.
“로즈가 먼저 올라가.”
“예?”
증기 배관 통로에서 미리 표시된 길로 꺾어 들어간 코니 일행은, 막다른 골목 통로 끝에 둥글게 휘감아 올라가는 철제 계단 아래에 도착했다. 거기서 코니는 여태까지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로즈에게 앞을 양보했다.
“네가 보고 깜짝 놀라는 걸 구경하고 싶거든. 괜찮아, 특별히 무섭거나 위험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못 올라갈 것도 없죠.”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소녀의 말이다. 로즈는 기꺼이 동의했다.
아무리 예전 약혼자라고는 해도, 그녀는 단순하게 코니의 말만 듣고 안전한지 위험한지 판단한 건 아니었다.
재클린이나 올리버의 얼굴에서도 뭔가 『기묘한 두근거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보면 깜짝 놀랄 게 있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둘, 아니 셋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럼, 제가 앞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
로즈는 단화를 신은 발밑으로 「파탕- 파탕-」 소리가나는 철제 계단을 내디뎠다. 일반 건물로 치면 이 층 높이 정도는 올라가서, 꽤 낡아 보이는 철문 손잡이를 잡았다.
살짝 시계 방향으로 돌려보았다.
잠겨있진, 않았다.
망설임 없이 힘을 실어서 앞쪽으로 밀었다. 금속 마찰음과 함께 눈이 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읏—.”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린 로즈.
어느 사이엔가 뒤따라온 코니가 멈출 틈 없이 그녀의 등 뒤를 살짝 떠민다. 가볍지만 무게중심을 기울이는 그 압력에 로즈는 앞으로 두어 발자국 걸었다.
눈앞으로 보이는 풍경이 머리에 인식된 건 그 순간부터였다.
“흐읍, 하─….”
투명한 유리로 가늘게 흩어진 빛이 그녀의 숨을 메운다.
가로세로 대각선으로 선분을 나누는 철골 사이로 이중으로 끼워진, 투명한 유리 벽.
세모꼴로 세워진 천장에 각이 진 파란 하늘이 채워져 있다.
새파란 하늘.
비록 여기보다 높은 주변 건물로 사방은 답답하게 가려져 있어도, 절묘하게 거대한 요철을 그리는 건물의 절묘한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볕이 공간을 덮는다.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건 크고 작은 분재에 담긴 나무와,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자그마한 공간에서 자라고 있는 파랗고 빨갛고 노란 꽃들.
온기가 피부에 따스하게 와닿는, 잘 가꾸어진 유리 정원이었다.
“와… 아름다워…!”
“아, 마음에 들어. 이런 반응이 좋아.”
솔직한 코니의 혼잣말. 이번에는 자기 자신도 납득할 수 있는 고백이었다.
“여긴 정말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우리 멤버 외에 들어온 건 로즈 네가 처음이야.”
“고맙습니다. 공화국에서도 이렇게 가드닝이 잘 된 유리 정원은 본 적이 없어요! 어쩜, 꽃들도 이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로즈의 눈에 정원 구석에 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으음?”
잠깐 눈을 찡그려서 그걸 보던 로즈는, 돌아서서, 자신의 뒤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던 재클린에게 물었다.
“ ‘언니. 언니!’ ”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재클린은 곧바로 팔짱을 풀고, 진지하게 몸을 숙였다.
“ ‘왜. 로즈. 무슨 일 있어.’ ”
“ ‘저기, 저기! 저기에 누가 있습니다.’ ”
안 들키게 작게 말하는 로즈의 말이 무색하게.
“아──!!”
바로 그녀의 옆에서, 코니가 크게 외쳤다!
“슈테린! 오랜만이야!”
쪼르르 달려간 코니는, 정원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있던 자그마한 누군가를 번쩍 들어 끌어안았다. 작다고 해봐야 자신과 그렇게 키 차이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었다.
“이거 봐, 이거 봐! 로즈!”
“에이, 뭐예요. 그냥 여자애….”
말하다가. 말을 멈췄다.
애초에 여기에 이렇게 어린아이가 방치되듯 혼자 있었다는 그것부터가 말이 안 되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
“…가 아니잖아요.”
그냥 여자애가 아니다.
양 머리에 뿔 모양의 예쁜 머리띠를 하고 있는 은발 머리칼의 소녀. 그녀의 허리 뒤로, 뭔가 수상한 게 보였다.
살래살래,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꼬리.
꼬리!!
“인간 아니지 않아요?!”
“오, 생각보다 더 귀여운 반응인데.”
“아니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정신 나갈 거 같은 극도의 혼란. 과호흡 걸리기일보 직전의 가쁜 숨으로 로즈는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꽉 주먹 쥐어서 참았다.
“이거, 드래곤이죠?”
“아마도.”
“아… 아마도…?!”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코니의 말이기에 충격은 두 배였다.
“왜 여기서 여운을 남기는 거예요? 누가 봐도 드래곤이잖아요! 폴리모프한 드래곤!!!”
“아니야.”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나온 건, 코니의 품에 안겨 있는 슈테린의 입에서였다. 은백빛 머리칼보다도 하얀 전기 스파크를 번쩍이면서 슈테린은 말했다.
“나, 사람이야.”
“봐봐. 자기가 사람이라고 하잖아.”
“이 무슨…!”
“너, 방해야.”
화를 내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따지려고 했던 건지. 그 순간의 감정을 로즈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눈앞이 번쩍, 하고.
로즈는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