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4막 (上) 유학소녀 - 8
재클린이 앞장서서 셋이 나란히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몇 분 후.
“반죽은 오늘 아침에 만들고 남은 걸 그대로 쓸 거야.”
머리띠로 앞머리칼을 뒤로 바짝 넘긴 코니가 바짝 기합을 넣은 얼굴로 돌아왔다. 동그란 이마가 그대로 드러난 소녀는, 남색이 살짝 감도는 검은색 원피스 위로 하얀 앞치마와 카추샤를 쓴, 작은 치수의 하녀 차림이다.
겨우 두 달 전, 총에 맞기 전의 자신에게 ‘넌 네 몸에 맞는 하녀복을 입고 요리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믿어줬을까.
그럴 리가 없다.
아무리 외형이 어린이로 바뀌었어도 그 자신은 어엿한 성인. 스스로도 코웃음을 칠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과거의 자신이 보면 비웃음을 퍼부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집중하자. 렉스.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양 뺨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린 코니는, 허리 뒤로 묶은 에이프런의 끈을 질끈 동여매었다.
“핫뜨뜨.”
그리고 바로 이상한 의성어를 중얼거리면서 코니는 증기 밸브를 돌렸다. 「퓌이이─」하며 나오는 고열의 증기에 섞인 미세한 가연성 가스에 스파크가 튀고, 이내 증기레인지의 왕관형 화구(火口)에 푸른빛 불꽃이 붙었다. 그 위에 무쇠 주물 프라이팬을 턱 올렸다.
그 자세 그대로 손을 쭉 뻗어서, 미리 반죽과 함께 꺼내두었던 버터를 쥐어 들었다.
“큭큭… 이런 건, 이렇게 하는 게 딱이야….”
범죄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소녀는 나이프로 큼지막하게 버터를 베었다. 그걸 옆에서 슬쩍 보던 로즈가 기겁을 했다.
“팬케이크가 아니라 쿠키라도 구울 셈인가요?”
“내가 아침에 반죽을 만들 때 넣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
“피아노 연주하기 전부터 힘 많이 쓰셨네요. 바로우 아가씨.”
“코니라고! 아, 아니지. 난 렉스라고.”
발끈하면서도 소녀의 자그마한 두 손은 능숙하게 팬을 빙그르르 돌린다. 달아오른 프라이팬 위로 올려진 버터는 고소한 향내를 풍기며 나선 모양으로 자글자글 녹아내린다.
그 위로, 미리 만들어뒀던 반죽을 뭉툭한 나무 국자로 천천히 프라이팬에 동그랗게 퍼지듯 부어 올린다.
「치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하얀빛이었던 반죽이 금세 익어가기 시작했다.
“좋은 향기야.”
등받이가 없는 둥그런 스톨 의자에 앉은 올리버는 흰색 와이셔츠 긴소매를 몇 번 위로 접어서 올린 시원스러운 옷차림이다. 그 옆에서 마치 보호자처럼 연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코니를 바라보는 재클린도, 가슴을 답답하게 조였던 조끼의 단추를 풀어헤친 편안한 차림.
등은 벽에 기댄 채로 어딘가 불안하게 다리를 꼬았다가 풀었다가 하는 건, 평소에 입던 바지가 아니라 몸에 바짝 붙는 치마가 약간은 거슬리는 탓일까.
동생이 그러든 말든.
“으음, 끄응….”
가슴팍 높이의 증기레인지 위로 팬케이크를 다듬던 코니는 뭔가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역시 그게 부족하군. 재클린!”
“응!”
언젠가 떨어지리라 기대하고 있던 코니의 명령이다. 마음속으로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재클린이 ‘그걸’ 제자리에 가져다주었다.
코니는 몸을 숙이고 있던 재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동생이 준비해준 『발판』을 딛고 위로 올라섰다.
작고 둥근 검은색 단화가, 계단 하나 높이의 나무 상자를 콩콩 디뎠다.
“아, 좋아! 이 높이가 좋아!!”
만족스러운 코니의 기쁨에 찬 웃음소리가 별관1층 조리실에 가볍게 울려 퍼졌다.
하하하하!
하하….
하….
“저기. 그런데 이게 뭔가요, 지금?”
“뭐냐니, 팬케이크 싫어해? 공화국에서 질리게 먹었어?”
아무 생각 없이 프라이팬 나무 손잡이를 한 손으로 들려고 했다가, 빠르게 포기하고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런 코니를 한심한 눈초리로 보는 로즈 또한 집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하녀복 차림이다.
“제가 질문을 잘못 꺼냈네요.그러니까 지금 왜 요리를 하는 거죠?”
“아까부터 배고프니까. 헙!”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
코니는 마치 아저씨 같은 기합 소리를 내면서 힘껏 손목에 힘을 실었다. 매끈거리는 프라이팬 바닥에서, 반쯤 익은 반죽이 절묘한 손목 스냅에 휘둘러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설익은 팬케이크는 아름답게 공중으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이윽고, 얼마 안 있어서.
사용인들이 쓰는 허름한 식탁에 둘러앉은 각자의 자리 앞으로, 엉망진창 찌그러진 팬케이크가 수북하게 쌓인 접시가 나란히 놓였다. 플레이팅을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괴이한 오브제를 내려다보는 로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진짜… 진짜 못 만들었어…!”
“맛이 중요한 거야. 맛. 못생겨도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어떻게 보면 조리실 안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는 로즈의 경악. 그녀의 거부 반응을 보던 코니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파닥파닥 두드렸다.
“곱게 빻은 밀가루와 미분말 설탕과 베이킹파우더의 세심한 조합! 환상적으로 빚어낸 나의 팬케이크에 약점은 없다고. 그렇지, 올리버?”
“물론이지. 정말 맛있어.”
포크와 나이프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올리버는 메이플 시럽이 담긴 유리병을 열심히 자신의 접시 위로 흔들어서 뿌리면서 말했다.
“올해 초까지 부엌은커녕 일체의 가정생활과는 담을 쌓았던 의원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맛이네. 신부 수업을 끝마친 숙련된 귀족 아가씨다운 훌륭한 요리야.”
“야이 씨… 오해를 풀어준다고 말한 사람이 할 말이냐 그게?.”
“있는 그대로의 소감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미스 코니.”
“이따가 한판 싸우자는 거지? 어? 진짜 싸워?”
팔뚝을 걷어 부처올리는 시늉을 하는 코니를 향해, 올리버는 웃으면서 양 손바닥을 보였다.
“장난이야. 렉스. 그치만 진짜 맛있는 건 사실이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고 나 혼자서 먹고 싶을 정도라고.”
“진작 그렇게 말해야지.”
상투적이지만 진심이 담긴 올리버의 찬사에 의기양양해진 코니는 코밑을 쓸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부지런히 먹고 있는 동생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클린은 어때?”
“응! 마히어! 어하!”
정말 행복한 얼굴로 재클린은 꿀꺽 삼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빠가 만든 건 숯덩어리라도 맛있어!”
“참고가 안 되네요. 두 분 모두.”
고개를 저은 로즈는 대충 나이프로 썬 팬케이크 조각을 집어삼켰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에 봄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돌았다.
“맛있어….”
“그치? 맛있지?”
우물우물 팬케이크를 먹는 로즈를보며. 깍지 낀손으로 턱을 괸 코니는 기분 좋게 씩 웃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함께 즐겨주는 건, 언제나 행복한 기분이 들어. 네가 행복하니 나도 좋아.”
“남들 앞에서 자, 잘도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아직 단기 서약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군요….”
살짝 뺨이 빨개지면서 로즈가 시선을 피했다. 그 도망간 시선으로 올리버가, 신선한 우유가 든 유리잔을 건네주었다.
“같이 드시면 더 풍미가 깊어집니다. 로즈 아가씨.”
“감사합니다.”
사양치 않고 감사히 우유를 받아 꿀꺽꿀꺽 삼킨다. 그런 그녀는 지켜보는 올리버의 반짝거리는 안경알 아래로, 여느 때처럼 능청스러운 초승달이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조금 전에는 서약에 걸린 걸 믿지 않는 듯보이셨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마음이 바뀌셨는지?”
아까 코니가 요리에 집중하는 동안, 바쁘게 움직이는 소녀를 뺀 나머지는 이런저런 대화를 계속 나눴다.
그 내용을 전부 엿들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셋—재클린, 로즈, 그리고 나중에 온 올리버—사이에서 오전에 일어났던 사정의 자초지종을 같이 알게 된 거 같기는 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 들려왔던 단어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지금 올리버가 로즈의 가벼운 말실수로 흘려듣지 않았던 것도, 그가 오기 전에 터졌던 해프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믿어줄 수는 있어요. 재클린 언니랑 네이선 가(家)의 차남이 보증하는 내용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해도 믿어야죠.”
로즈는 달그락, 접시 위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제 약혼자가 저보다도 어린 여자애가 되었다는 걸 가슴으로는 못 믿겠어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그럴 만도 해.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그녀의 불신감을 코니는 순순히 인정했다. 최대한 낮게 깐 목소리로 심각한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해도, 자기가 앉은 의자보다 조금 높은 테이블에 팔을 올려 팬케이크를 썰어대는 모습에서 진지함을 느끼긴 어렵다.
“네가 어떤 기분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로즈. 나도 내가 이런 몸이 된 걸 알아차렸을 땐 내가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
“여기가 사후세계 나고 물어봤었다고, 오빠♪”
“지옥인지 천국인지, 아니면 그사이의 어딘가인지 도통 정신이 없었지~”
후물후물. 연갈색으로 잘 구워진 겉면 안의 속은 촉촉한 팬케이크 조각을 입에 넣고 흐물거린 코니는 손을 내밀었다.
“우유!”
“예이, 예이.”
올리버는 새 유리잔에 우유를 따라서 건네주었다. 그걸 꼴딱 마신 코니는 무슨 밀맥주라도 한 잔 걸친 탄성을 흘린다.
“크으. 아무튼, 너무 잘 아는 얼굴이 보여서 깜짝 놀랐었다고. 그땐 정말—“
“렉스 씨.”
처음으로 렉스라고 불렀다.
“남들 귀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름이니, 지금 여기에서만 이름으로 부를게요.”
“어, 어어….”
“렉스 씨.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코니처럼 분위기를 억지로 끌어내려는 건 아니었다.그런데도 그녀에게선 말 한마디, 숨결 한 조각마다 숨겨지지 않는 기품이 흘러나온다.
여태까지 코니가 애써 이끌었던 밝은대화는 여기까지였다.
“저와 렉스 씨… 아니, 프리스카 가와 커빗 가 사이의 약혼은 없던 일이 되었어요. 알렉산드로스 커빗은 극동전선에서 죽은 신분이 되었고, 그리고 당신은, 지금은 새로운 사람과 결혼하였죠.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어떻게 하겠냐면, 하나밖에 없지.”
진지한 질문에는 진지한 대답을.
코니도 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회복이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겠다고요?”
“그것만을 하기 위해서면 이런 고생을 하진 않겠지.”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로즈가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코니는 순식간에 웃옷을 벗어젖히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당황한 로즈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당연히 소녀의 기이한 행동을 막아주리라 기대하면서 그녀는 재클린과 올리버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조금도 움직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로즈.”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돌려 피하려는 그녀의 이름을.
코니는 나지막하게 불렀다.
“나를 바라봐.”
그 맑은 목소리에 로즈는 시선을 코니에게로 돌렸다.
거기에는, 보는 사람이부끄러워하는 게 죄를 범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게, 정면 방향으로 앞을 다 드러낸 소녀가 있다.
극동국 도자기처럼 새하얀 피부에 엷은 색소가 첨착된 가슴은 조금 전 로즈 자신이 꺼냈었던 ‘인형’이라는 비유에 걸맞았지만.
그 소녀의 좁다란 배꼽 좌측으로 커다란 흉터가 있다.
찢어진 피부와 얼키설키 기워진 봉합 자국은, 말라서 살짝 드러나는 올록볼록한 갈비뼈 아래까지 길게 그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