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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화 〉4막 (上) 유학소녀 - 7 (106/111)



〈 106화 〉4막 (上) 유학소녀 - 7

‘하긴. 믿는  더 이상하긴 하지.’

오히려 순순히 믿는 쪽이 더 의심스러울 법도 하다.
자기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여자애가 자신을 ‘죽은 줄 알았던 약혼자’라고 소개하는  상황이.

“하하.”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가볍게 웃음으로 털어내고.
코니는 재클린이 가져왔던 종이봉투를 열었다.  안을 한참 헤집은 끝에 머리끈을 꺼냈다.

‘진짜 틀려먹었구나, 나….’

습관적으로 머리끈을 입에 문 코니는, 아직 습기에 젖어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칼을 뒷머리 위로 올려 묶었다.

어떤 상황인지 어렴풋하게는 깨닫고 있었다.
로즈를 속이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찰나의 오해를 이용해야만 정체가 들킬 위기를 간신히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로즈는 아무렇게나 말 몇 마디로 속일 수 있을 만한 아이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코니의 혼잣말은 재클린과로즈에게도 똑똑하게 들린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던 재클린은, 소녀의 각오를 알아차렸는지, 그대로 입술을 다물었다.

먼저 찾아온 로즈의 앞에서 코니는 가짜 신분으로 거짓말만 줄줄 늘어놓을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소녀의 몸이 되고 나서부터 여태까지의 자신이, 언제나 남에게 자신을 숨기면서 이루어지는 삶이었다고 해도.

그 지난날의 기억은 변명이 될지언정 해답이 될 순 없다.

‘로즈는 피해야 할 사람이 아니야. 함께 해야 사람이다.’

길었던 머리칼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 코니는. 각오를 다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맞은 편에 앉아서 그림자가 내려진 얼굴로 이쪽을 계속 노려보고 있던 로즈 앞으로 다가갔다.

“뭐예요.”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약혼녀의 시선.
이 눈빛을 더는 피하지않았다.

“로즈.  들어”

손을 뻗어서, 코니는 로즈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녀가 뿌리친다면 버텨낼 자신은 없었지만 어디까지나 진지하다는 의지 전달의 제스처였다.

“단기서약은 잘 통하고 있어. 내가하는 말은 처음부터 전부 사실이야.”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바로우 양.”
“아니야.”

고개를 가로저은 코니는,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로즈에게 얼굴을 바짝 다가갔다.

“로즈. 바로 내가 네 약혼자야. 이렇게 말해도 네가 못 믿는다는 건 알지만 이게 사실이다.”
“후, 후후…. 이렇게 놀린다고 제가 당황할  알았어요?”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그림자가 얼굴로 로즈는 미소를 흘렸다.

“아무리 절 우습게 여기셔도 이건  너무했네요. 장난할 게 있고 안 할  있는 거예요!”
“정말이야. 장난이 아니야.”
“오랜만에 여기에 올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요.”

어딘가 어두운 웃음을 짓는 로즈의 눈꺼풀이 아주 조금 떨린다.

“이 북적이는 별관에 사용인들이  명도 없어요. 그리고 처음 보는 꼬마애가 우리 추억이 담긴 곡을 연주하면서 아는 척을하잖아요. 재클린 언니도 그렇고, 지금 저를 우습게 보고 있는 거지요?”
“나? 나는 왜?!”

갑자기 불똥이 튄 재클린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붕붕 흔들었다.

동생으로서는 억울한 오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즈의 퉁명스러움이 풀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여튼 논리적으로 전혀 믿을 수 없어요. 갑자기 방문한  잘못도 있으니 당신들만 탓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잘못했네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로즈는 아직도 자신에게 가까이 바짝 서 있는 코니를 피해서 비켜섰다. 몸을 밀어내지는 않았어도, 명백한 ‘거부’였다.

“정말, 정말 제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에 왔는지─”

살짝 상기된 얼굴에, 달아오른 시선을숨기지 못하고 그녀가 뭐라고말을 하려는 찰나에.

「쿵쿵!」

좀 전에 재클린이 들어오면서 굳게 닫았던 응접실 문. 그 문에서 뭔가 둔탁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윽고 「쾅─」하고 또 힘껏 발로 차여서 문이 열렸다.

“하하, 이거 참! 늦어서 미안!”

시야가 방해될 정도로 방대한 책을 품에 안고 들어오는 한 사람.

대체 앞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산더미 같은 책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청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왕립 도서관이 어제 공사로 쉰다고 해서, 사정사정해서 가져왔다고! 렉스가 부탁한 것도 가져왔…는데.”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 아래, 싱글싱글 실눈으로 웃는 흑발의 청년. 그의 말이 멈춘 건 이유를 물어볼 것도 없었다.

“어라. 오늘 외부인이 온다고 했던가?”
“네가 깜빡한 거 아니야. 그런 말은 한  없다.”

렉스, 아니, 코니는반들반들한 턱을 습관적으로 엄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실수하면 안 되겠지. 들어오자마자 주위 확인도 안 하고  이름을 크게 부른다거나.”
“후, 그러게 말이다. 이거 참.”

낯선 방문객에 눈이 동그래진 로즈를 보며, 청년은 이마를 긁적였다.

“내가 헛것을 보는  아니라면 엄청난 사고를  거네?”
“괜찮아. 적절하게 좋은 실수다. 올리버.”

코니가 한 말은 괜히 기를 살리기 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때마침, 지금 막 들어온 친구─올리버가 맡아줘야  역할이 있으니까.

“이 아이가 진실을믿지 않거든.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나쁜 아이네. 어느 쪽 진실을 말하는 거지?”
“내 쪽.”
“아, 그건 믿는 쪽이 더 이상하긴 하지.”

머리 위에 올려진 이국적인 빵모자를 비스듬하게 고쳐 쓰고. 안경알 너머로 둥글게 웃는 눈매로, 그는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리버 네이선입니다. 그냥 올리버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저 꼬맹이랑 의학원 동기입니다.”
“로즈입니다. 저, 그….”
“압니다. 프리스카 가문의 영애님이시죠.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올리버는 로즈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 그를 조금은 흘기듯 보면서 코니는 말했다.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으면 얘한테는 작업 걸지 마라.”
“아무렴. 친구의 약혼녀에게 손을 댈 만큼 쓰레기는 아니라고. 그리고 이젠 그런 나이도 아니니까.”

웃음을 흘리는 올리버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나처럼 맨날 길 잃은 양도, 길이 한 번 정해지면 주위 둘러보지 않고 일직선 인생길 걷거든. 지금의 나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아!”
“후후,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란다.”

흘려 웃는 코니의 웃음에는 비아냥이 남겨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정말이니까 믿어줘.”라고 말하는 올리버는 딱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서로 이런 성격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가능한 대화다.

올리버가 가져온 책무더기를 기웃거리며 코니는 말했다.

“로즈, 이 사람 본 기억 있지? 브라이턴 백작가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만났었거든.”
“아, 예. 기억나네요.”

물 흐르듯 던지는 소녀의 말. 잠깐 놀랐던 로즈는 실눈으로 웃는 낯인 올리버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도 바로우 아가씨와 아는 사이인가요?”
“응?”

어딘가 타이밍이 이상한, 로즈의 어수선한 질문.

올리버는 스르륵 코니 옆으로 가서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 인마, 너 약혼자한테도 네가 누군지 말 안 해줬어?”
“알려줬는데 안 믿는다고.”

살짝은 기가 죽은 코니.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나랑 동생이 짜고 놀리는 건  아는가 봐. 네 도움이 필요해.”
“그래. 그런 상황이군.”

가볍게 흘러갈수 없는 화제. 조금 전까지의 경박한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은 웃으면서도 얼굴은 웃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올리버는 팔짱을 꼈다.

올리버 네이선.

렉스 휴크레이가 왕립의학원을 다닐  알게 된 친구이자.

올해 초 렉스가 부교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옥에 성공, 힘든 재활 치료를 보낸 후 『코넬리아 B.』라는 경의사 신분으로 활동하는 걸 알고 있는 몇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자신과는 다르게 수도에 있는 의학국에서 별 탈 없이 근무하고 있었다. 앨버스에서 일하면서도 이렇게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와서 도와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샘의 도시 아르샤에서 자신과 재클린이 난처한 상황에 빠졌을 때. 그때 오밤중에 보낸 부탁을 수도에서 밤샘으로 도와주었던 올리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초조해하지 마. 렉스. 내가 도와주지.”

여느 때처럼 올리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대답을 하였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다.”
“너도 조심해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말을 하면 네 동생이 정말 섭섭해할 텐데.”
“에이~ 뭐 이 정도로 그럴 것까지야~”

아하하 웃는 코니의 뒤통수로 얼음이 닿는 기분이 들었다. 그 차가운 눈빛이 누구한테서 쏘아지는 건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후아.’

철렁 내려앉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으면서. 코니는 뒤돌아서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진심 알지? 동생?”
“어. 잘 알  같기도 하고.”

동생의 시선과 표정만 싸늘해진 게 아니었다.

말투마저 차가웠다!

히익- 하고 코니가 바짝 질려버리기 전에 먼저 활짝 웃은 건, 재클린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이번에는 진짜 농담!”

여름날처럼 밝게 웃는 재클린은 좀처럼 셋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로즈에게 말을 걸었다.

“로즈 양, 조금 당황스러운 건 알아. 그렇지만 먼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있어.”

오른손으로 재클린은 검지 하나를 치켜세웠다.

“첫째. 이 별관에 다룬 사람들이 없는 건, 커빗 가에서 널 쌀쌀맞게 대하려는 게 아니야. 얼마 전부터 여긴 사용인들이 거의안 닿는 곳으로 바뀌었거든.”
“응응. 그렇지.”

동생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코니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재클린이 말한 그대로였다. 별관은―정말 필요한일이 아니면―예전처럼 사용인들이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다만 별관 출입에 엄격한 조건을 붙이면 거꾸로 여러 사람으로부터 불필요한 호기심을 살 수 있기에, 재클린이 자신의 아지트로 삼아서 아는 사람만 초대한다는 식으로 적당하게 둘러대었고.

경비원 처지에서는 로즈도 ‘재클린이 부를 법한 높으신 영애분’이라 알아서 별관으로 모신 거였다.

어떻게 보면 거짓말과 오해가 만들어  결과가 바로 지금의 기묘한 모임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몸을 살짝 숙인재클린은 왼팔로 코니의 가느다란 허리를 옆으로 둘러 안으며, 오른손으로는 브이를 그렸다.

“오빠가 만든 팬케이크는 정말 맛있다는 거지!”
“예, 예에…?”
“잡담 시간을 가지자는 뜻이야. 로즈.”

에휴, 하고 한숨을 쉬면서 코니는 넝쿨처럼 감아오는 재클린의 팔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일 층 휴게실로 먼저 내려가 있어. 나는 옷 갈아입고 바로 내려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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