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4막 (上) 유학소녀 - 6
코니와 비교해보면 로즈가한 뼘은 더 컸지만, 재클린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일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둥기둥기 로즈를 들었다 놨다 한 재클린은 그녀를 다시 카펫 위로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일단 갈아입을 옷 가져왔어♪”
조금 두툼한 종이봉투를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리고, 재클린은 로즈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재클린의 긴 다리를 감싸고 있는, 주름 없이 골반을 따라 달라붙은 회색빛 스커트는 무릎 위로 짧게 둥그런 품을 그린다. 다른 웃옷은 없이 심플하게 하얀 와이셔츠 위로, 스커트와 같은 색상인 회색빛 조끼 차림.
얼핏 보기에는 블레이저나 재킷을 벗고 잠깐 외출을 온 타이피스트 같은 차림이었지만. 재클린의 팔뚝에는 어딘가 이질적인 검은 완장이 채워져 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건—속이 채워지지 않은—보랏빛 선으로 그려진 원 하나.
로즈는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눈동자에 의문 부호를 흘리는 로즈는 못 본 척하고. 재클린은 손수건을 꺼내서 끈적한 타액이 묻어 있는 로즈의 머리칼을 닦아주었다.
“공화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여기에 와줘서 고마워. 로즈 양.”
“괜찮아요. 저, 저야말로 이렇게 반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약간 헝클어진 머리를 급하게 다시 매만지면서, 로즈는 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그걸 조용히 지켜보던 코니는 마음속으로 끄응, 하고 고민에 잠겼다.
유학을 가기 전 로즈는 약혼자의 동생이었던 그녀─재클린과 제법 대화가 통하는사이였다. 친하다면 친한 사이이기는 해도, 이렇게 친밀한 신체 접촉은 로즈 입장에선 매우 당황스러울 법하긴 했다. 코니는 꿍얼거리듯 말했다.
“전에는 정말 어린 아이였는데, 3년 사이에 몰라보게 자랐다니까.”
“맞아. 정말 몰라볼만하네♬”
“그래서 진짜 못 알아봤어….”
“응? 그건 좀 잘못한 거 같아!”
말로 만들고 어투로 다듬은 몽둥이로 경쾌하게 코니를 두들겨 패고.
재클린은 로즈의 어깨를 붙잡고 거의 반 억지로 응접용 소파에 앉혔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 로즈 양. 예전에는 키도 작고 머리카락도 훨씬 짧았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길어졌는걸?”
“그건 제가 언니에게 할 말이에요. 재클린씨도 저보다 머리 훨씬 길지 않았어요?”
로즈가 기억하는 재클린의 머리칼은, 느슨하게 묶어도 허리까지는 넉넉하게 내려올 정도로 찰랑거리는 기다란 머리칼이었다. 새벽하늘에 낮게 깔리는 구름을 한 움큼 베어온 듯 빛나던 은발 그 자체만큼은 변함이 없었지만.
“언니는 그 머리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으셨잖아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뭐어, 사정이 있어서 잘랐어. 그치, 오…”
재클린은 기분 좋게 재잘거리려다가.
“오, 오오- 오~”
“음?”
코니는 이상하게 말을 이어가는 재클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바로 코니는 별거 아닌 척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내 정체는 말 안 했어. 로즈는 내가 렉스라는 걸 몰라.’
“─오래전에 잘랐어. 그래도 지금은 좀 자라서 이 정도야, 응♬”
그렇게 얼버무리고 재클린은 옆에 조금 뻣뻣하게 앉아 있는 로즈와 어깨동무를 하는 마냥 어깨 위로 팔을 휘감았다.
“그래서 우리 로즈 양, 공화국 유학은 잘 갔다가 왔어?”
“예. 저도 언니처럼 열심히 공부했어요.”
에헤헤, 하면서 쑥스럽게 웃는 로즈. 그녀의 부드러운 차 빛 옆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재클린은 다리를 꼬았다. 몸에 붙는 스커트 아래로 까만 스타킹의 길쭉한 다리가 위험한 각도를 그리자, 코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안 아프고 건강하게 다녀와서 다행이네. 로즈 양. 어디의 누구는 몸이 성할 날이 없는데♬”
“바로우 양 말씀이신가요?”
재클린의 시선이 코니를 향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로즈는 고개를 약간 저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재클린의 몸에 바짝 붙었다.
“제가 오늘 본바로우 양은 흠집 하나 없는 예쁜 공화국 제(製) 인형 같은데요. 몸이 성할 날이 없다니, 상상이 잘 안 되네요.”
“그치? 나도 그래. 저 아름다운 몸을 왜 그렇게 험하게 굴리려고 하는 건지~”
“어, 어라…? 둘이 원래 이렇게 친했던가…?”
누군가에게 뒷말을 당하는 건 원래의 렉스였을 때에도 별 타격을 입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누굴 욕할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앞에서 까이는 건 경험치가 없었다.
코니는 원래의 자신이었을 때에도 본 기억이 없던 광경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수십 초 후 자신에게 찾아올 파국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코니는 둘의 맞은편 자리인 일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래, 그러면 아까 했던 대화를 이어서 해볼까.”
짝, 가볍게 손바닥을 맞부딪히고, 코니는 소파에 기대어 턱을 괴었다.
『알렉산드로스 커빗』이 삼 년 전에 왜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는지. 또, 그가 어째서 『렉스 휴크레이』로 의원이 되었는지.
또, 대체 어쩌다가 렉스는 반국가적 중범죄자가 되었는지.
이걸 로즈에게 설명하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지금 코니는 바로우 가문의 일원이지만,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왕국을 떠나 있었던 유학생보다 사정이 밝다고 해서 의심을 살 건 아니니까.
그러니, 어디까지나 지금은 외부인으로서.
그리고 얼마 전까지는 약혼 관계였던 사이로서.
코니는 로즈보다는 조금 더 커빗 가문의 속사정을 잘 아는 수준으로 적당히 말할 생각이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으니, 위험한 진실보다는 안전한 거짓말을 해야 할 때였다.
‘음. 그래. 지금은 전에 할아버지랑 같이 짰던 그 시나리오를 꺼내야겠어.’
원래 렉스였을 때부터 암기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다행히도 어린 아이의 몸으로 변했어도 그 사고 능력이 크게 낮아진 것 같진 않았다.
“큼큼.”
헛기침하고, 코니는 입을 열었다.
“내가 알렉산드로스 커빗이야. 삼 년 전부터는 위장 신분인 렉스 휴크레이로 살았어.”
“예?”
똑딱. 똑딱.
똑딱.
그 순간.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벽시계의 흔들리는 시계추 소리가 안 들려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흡을 멈춘 셋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 침묵 사이로 로즈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라…?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텐데요…?”
“응. 거짓말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야. 전부 진실이야.”
생각과 다른 말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말을 할 생각도 없었는데 입이 멋대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뭐지? 내가 지금 뭐라고 말을 하는 거지?’
원인 모를 일에 당황스러웠지만, 원인 파악보다 지금은 수습이 먼저다. 급히, 방금 자기가 꺼낸 말을 부정하기 위해 코니는 입을 열었다.
“지난해 12월 24일 반국가적 중범죄를 저질렀다는 죄로 수감되었고, 증기형을 당하기 전 애뮬럿 교수님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했지. 최근까지 경의사로 활동하고 있었어.”
머리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장이 술술 튀어나왔다.
그것도 절대,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될 단어까지 뒤섞여서!
“경의사?”
천만다행으로 이 어휘 자체가 처음 듣는 단어인지 로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지금은 그 경의사란 걸 안 하는 건가요?”
“그렇다. 주부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결혼했지. 여기는 신혼여행 겸으로왔어.”
“어머. 바로우 양은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 벌써 하셨어요?”
“살기 위해 결혼을 했거든. 나이는 상관없어. 결혼 안 하면 내가 죽는 상황이었으니까. 결혼과 개죽음의 양자택일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 그건 좀 위험하신 거 같은데….”
‘아~ 진짜 뒤죽박죽이야~!!’
도저히 막을 수 없이 폭주하는 입놀림. 막을 겨를도 없이 터진 둑처럼 쏟아지는 말에 코니는 거의 공황 상태였다. 놀란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만! 그마아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클린은 양팔을 활짝 펼쳐서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오, 오빠! 미쳤어? 왜 그러는 거야?!”
재클린이 놀라서 내뱉은 그 말조차도 실수였다!
“오빠라고요?”
“핫!”
이제 재클린은 자기 입을 양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와장창 엎어버린 물이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언니, 지금 이 바로우 아가씨에게 ‘오빠’, 라고 하셨지요?”
“어, 아니, 그게~”
천하의 재클린도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필사적으로 변명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예전보다는 제법 자란 앞 머리칼 사이로 돌고 도는 눈동자가 나선을 그리는 동생.
그 동생과 함께 남방도시 바트나를 떠나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 레인폴로 돌아온 건, 지금으로부터 2개월 전.
그때부터 오늘까지 집에서 편하게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코니는 자기가 생각하더라도 좀 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직무수행 중 부상」 때문이었고. 일단 재클린은 엄청나게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경의사 대역으로서.
그것만큼은 정말 밖으로 퍼져나가면 안 되는 비밀이다. 하지만 그걸 에두르는 정보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어? 내가 미친 건가? 이런 식으로 미치는 예도 있던가?’
현실적인 고민인지, 아니면 현실회피를 하는 고민인지 모를 생각을 하는 사이에!
“로즈가 나한테 단기 서약? 이라고 하는 걸 맺었어. 재클린.”
이번에도, 생각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재클린이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조금 전 재클린이 했던 말은 코니에게 던진 ‘질문’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저 놀라서 내뱉은 말에 더 가까웠지만.
“『단기 서약』? 로즈 양이?”
그 단어를 들은 재클린의 눈이, 곧바로 날카롭게 변했다.
“어디에다가 맺었어?”
“입안—…”
“혀와 연구개와 경구개, 입천장궁내부 15센티미터.”
자세한 대답을 해 준 쪽은 코니가 아니었다.
로즈는 약간 재클린에게서 한 뼘 정도 멀어지게 엉덩이를 움직였다.
“사정이 있어서 했습니다. 약식으로 맺어서 그리 길진 않아요.십 분에서 십 오 분 정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할 수 있도록 하였어요.”
“공화국에서 재미난 걸 배워왔구나. 로즈 양, 공학 아카데미로 간 거로 알았는데.”
“에테르 아카데미입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어째서죠?”
“어째서냐니, 어떤 걸?”
재클린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다.
코니가 생각하기엔 그랬는데, 그런 부분도 뭔가 로즈의 마음에안 드는 모양이었다. 한쪽 눈만 살짝 찡그리면서 그녀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바로우 가문의 영애에겐 서약이 통하지 않잖아요. 뭐예요, 이 사람?”
“아.” “아!”
마치 화음이라도 넣는 것처럼 둘은 사이좋게 입을 떡 벌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 재클린과 코니 사이에서 눈빛이 허공에 반짝 튀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