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4막 (上) 유학소녀 - 2
기껏 공화국에서 연합 왕국으로 돌아올 때 입었던 호화로운 의상은 간데없고, 단조롭고 칙칙한 교복 차림.
물론─어디까지나, 로즈의 기준에서 칙칙할 뿐이다.
과장되지 않게 몸맵시를 감싸는 블라우스와 민무늬 스커트 조합의 칼리지 교복은 공화국에서도 가장 첨단에 나서 있는 패션 트렌드다. 거기에 그 옷을 걸치고 있는 로즈 자신의 손짓과 표정, 행동에서 향기처럼 퍼져 나오는 매력은 저택의 홀을 화사함으로 채우기 충분하다.
그렇게 일층 홀에서 로즈가 홀로 존재감을 뽐낸 시간은, 아주 짧았다.
곧이어 수행원들과 함께 따로 부른 짐꾼들이 한가득 짐을 들고 왔다. 거기엔 삼 년가량 소녀와 프리스카 가문의 공화국 생활 물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어디 그뿐이랴. 제각기 동료에게 부탁을 받았던 바다 건너의 이국적인 선물과 생활품도 함께다.
평소라면 고용인 가족이 있는 공간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엄격함과 질서를 지키는 사용인들이지만, 오늘처럼 특별한 날이라면 그 ‘평소’와는 다소 벗어나는 하루가 된다.
몇 년 만에 만나는 친구와 동료와 연인들이 얼싸안으면서 반가움의 뺨 키스를 연신 주고받는다. 그들 무리에서 살짝 빠져나온 로즈의 곁으로, 집사가 다가왔다.
그녀는 벗은 모자를 그에게 건네었다.
“조부님은 어디 계시죠?”
“이 층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와 잠깐 대화를 나눈 후, 로즈는 호화로운 홀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소녀의 발걸음은 2층 복도를 걸으면서 느려지기 시작했다.
등 뒤로 수행원과 사용인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공간에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 발자국씩 멀어지고.
다가가고 있는 곳은 꿈에서라도 나올까 두려운 할아버지다.
‘긴장하지 마. 로즈. 긴장할 것 없어.’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심장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린다.
오늘 아침까지공화국에서 지냈던 삼 년간의 유학은 금세 머나먼 과거처럼 색을 잃고 기억이 묻혀 간다. 그 기억을 뒤덮으며 몰려오는 현실감은 이내 공포로 뒤바뀌었다.
로즈는 느려진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로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고, 내쉬면서, 목을 한 바퀴 돌렸다.
또도독— 하는 염발음이 소녀의 목에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어깨를 펴고 로즈는 곧은 자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복도 끝 서재에 도착한 그녀는 주먹을 쥔 손으로 노크했다.
“로즈입니다.”
묵묵부답.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려고 소녀가 손을 드는 순간.
“들어오거라.”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두꺼운 문과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로즈는 손때가 진하게 묻은 물푸레나무 손잡이를 잡고 곧장 열어젖혔다.
“세 번의 겨울을 겪었지. 어땠느냐.”
창밖 너머 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보는지, 의자는 등을 돌리고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로즈는 가만히 문을 닫았다.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에 귀가 즐거웠습니다. 조부님.”
“보고는 잘 들었다. 오랫동안 단정한 품행을 잘 유지했구나. 오늘 하루 방탕한 모습은 눈을 감아주마.”
“넓은 관용에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채. 로즈는 말을 이었다.
“공화국에서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은 최대한 얻었습니다. 삼 년간의 학습만으로는 아직도 메워지지 않는 결락이 있습니다.”
“로즈. 나의 손녀, 로즈 프리스카여.”
위스키가 찰랑거리는 잔을 든 채로, 바로 돌려 앉았다. 새 둥지처럼 흐트러진 새하얀 머리와는 대조적으로, 코밑부터 턱까지 서리처럼 다듬어져 뒤덮인 새하얀 수염, 주름이 자글자글 진 얼굴로 그는 탁상에 올려진 명패를 쓰다듬었다.
“여기에 적힌 글자를 읽어보렴.”
“예.”
로즈는 지금까지 몇백 번이나 읽었던 할아버지의 명패를 다시 입에 올렸다.
“연합 왕국 제1 행정도시 레인폴 교구대법관. 윌리엄 프리스카.”
교구대법관(敎區大法官).
연합 왕국은 국교회의 관리 행정구역으로 교구를 나눈다. 각 교구는 자그마한 사법 기구를 꾸리고 있는데, 각 교구에 있는 법관은 교구 법정에서 법률과 교리에 따라 유무죄와 선악을 분별한다.
그리고 교구 시민을 좌지우지하는 법관이 오만함에 빠지지 않도록, 중앙 정부에서 순환 파견되는 이들이 『교구대법관』이다.
여왕만큼이나 엄격한 도덕률을 요구받는 그 자리에 바로 눈앞의 노인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로즈. 이 할아비가 너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은 없다. 언제나 부탁을 했지.”
“기만입니다. 어떤 부탁도 거절할 수 없는 저로서 조부님의 부탁은, 명령과 다름없습니다.”
“그렇지. 그 명령들은 모두 너를 위한 부탁이었다.”
“저를 위한 게 아니라 가문을 위한 거겠지요. 조부님.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게 아니신지.”
“우리 손녀가 오늘따라 자신감이 넘쳐나는군.”
“그러잖아도 그 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공화국으로 순례 겸 유학 생활을 하기 전의 로즈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대꾸. 자칫 무례하게 여겨질 법한 손녀의 어투에도 윌리엄은 그저 알 듯 모를 듯,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말씀을 나에게 하려는 건가.”
“조부님. 승낙이 전제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법과 상식과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부탁이라면. 그래, 말해 보아라. 소원 하나 못 들어줄 만큼 이 할아비는 야박하지 않아.”
“커빗 가(家)와의 약혼을 파기하여 주십시오.”
틈을주지 않는 손녀의 부탁에 전(前) 교구대법관의 이마 주름이 살짝 깊어졌다.
가문과 가문 사이에 맺는 약혼이란 건 쉽게 파기할 수 없다는 건 로즈라고 모를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 할아버지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을 요구 사항을 뜸 들이지 않고 밀어붙이는 게, 로즈가 오랜 고민 끝에 떠올린 전략이었다.
“그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습니다. 조부님. 저는—”
“좋아.”
“예?”
“좋다고. 약혼 파기.”
이번에는 로즈가 놀랄 차례였다.
턱을 괸 윌리엄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말했다.
“우선 네 선생에게는 예정 보수의 두 배를 지급해야겠군. 네 용돈도 다섯 배 올려줄 것이야.”
“고, 고맙습니다.”
우선은 감사 인사가먼저였다. 질문은 그다음이었다.
“하온대 어째서… 약혼 파기에 기뻐하는 것입니까?”
“이 할아비가 기뻐 보이는가?”
“놀라거나 슬퍼 보이진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 지금 이 대화야말로 로즈 네가 학업에 집중하였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만약 네가 이 할아비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면 대번에 티가 났겠지.”
할아버지─윌리엄의 말은 로즈도 동의했다.
로즈는 할아버지 앞에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할 자신이 없었다. 약혼을 파기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설득할 수 있는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가정교사를 거기에 끌어들이는 건 좀 미안했지만.
그리고 비록 그걸 미처 털어놓을 틈도 없이, 할아버지가 맥이 빠질 정도로 순순히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지만.
‘할아버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동의하셨을 리가 없어.’
놀란 기색을 드러냈던 건, 로즈가 예상치 못한 부탁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뭔가 일어났어!’
이대로 서재에서 나갔다가는 영영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로즈는 옆머리를 귓등 뒤로 넘기면서 물었다.
“조부님. 제가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결혼을 꺼린다고 생각하세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어. 모든 게 네가 에테르 칼리지에 처박혀 있을 동안 끝난 일이야.”
글라스에 조금 담긴 술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윌리엄은 미소지었다.
“원래는 이번 유학이 네 마지막 학업 과정이었다. 너무 영리한 소녀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삼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었어. 대학에 가는 것도 허락해주지. 대신 약혼은 파기다.”
“조부님.”
아까 했던 말과 똑같은 것 같았는데
같으면서도 뭔가 달랐다.
“제가 말을 꺼내기 전에…저보다 먼저, 약혼은 없던 일로 하려고 하셨던 건가요?”
“그렇다. 소원 하나 이루어주는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으니 아쉽게 되었군. 우리 손녀.”
“제가 유학을 가기 전에는….”
“파기한 건 우리 쪽이 아니다.”
웃는 얼굴인데도 무섭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은 아니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로즈는 슬슬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로즈가 약혼을 퇴짜 놓기 전에, 프리스카 가문은 퇴짜를 맞은 쪽이 되어버렸다.
커빗 가문이 약혼을 파기했다.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프리스카 가문에게는 굴욕적인 일이 벌어졌다. 정작 당사자인 로즈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삼 년이라는 시간에 커빗 가문에서 무슨 큰 사정이 생겼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으음, 그런데 정말로 아무 소식도 못 들었나 보구나. 기특해.”
한 모금 마신 윌리엄은 독한 증류주가 담긴 잔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기라도 하는지 옆이마를 꾹꾹 누르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테드는 융통성이 부족한 게 흠이야. 원래는 이런 소식을 전달하는 건 집사가 해야지, 할아비의 역할이 아니건만.”
아직 영문을 모르는 손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바쁘게 떨리고 있었다. 본인도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불수의적인 움직임이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는 걸 소리를 내 외치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윌리엄은 말했다.
“알렉산드로스 커빗은 금년도 1월 9일 극동 전선에서 전사(戰死)했다. 시체도 수습 못 했다고 하더구먼.”
“전사했다, 전사했다.”
입에 두 어 번 되뇌고 나서야 로즈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죽었다고요?”
“정말 몰랐구나. 우리 가여운 손녀.”
하나도 가엽게 여기지 않는 얼굴로, 깊은 주름이 진 윌리엄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로즈를 꿰뚫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우리 손녀는 슬퍼하지 않는군. 오히려 기뻐 보여. 감정을 숨기는 재능은 정말로 없는구먼.”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게, 좀 당황스러워서….”
“추궁하려는 생각은 아니야. 젊은 아이의 심정을 이 늙은이가 모를 뿐이지.”
윌리엄은 손을 뻗어서 책상 위에 버저 단추를 눌렀다. 거의 동시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들어왔다.
“매캘란 한 잔 더. 그리고 손녀를 방으로 안내해주게. 그렇지, 제일 중요한 인사가 너무 늦었군. 먼 길 오느라 정말 수고했다. 로즈.”
“네. 감사합니다, 조부님….”
더 말할 것 없이 나가라는 신호에 로즈는 할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곧장 서재에서 나왔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어도어가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지만, 로즈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의 집사라고는 해도 원래는 할아버지를 모시던 분이었다.
자기를 모시는 게 아닌, 할아버지가 명령하는 여자애 하나를 보살필 뿐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시어도어.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예. 제가 아는 범위라면 기꺼이.”
이 집사에게 묻는 모든 내용이 할아버지에게 흘러간다. 그 정도는 감수하고 물어볼 만한 질문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씨… 정말로 커빗 가문이야?”
그 말에 집사는 고개를 숙인 채 되물었다.
“실례지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아가씨.”
“당신이 의도를 파악하든 말든 제가 알 바 아니에요. 시어도어, 대답은?”
“커빗 가의 장남인 건 맞습니다.”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에 낀 입장에서 집사가 내놓은 답은 모호하게 도망을 갈 구멍이 있었다. 그게 거꾸로 로즈에게는, 다른 의미로, 집사가 전달하는 메시지로 느껴졌다.
장남인 건 맞다.
그렇지만 내가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이 더 있다.
‘집사는 안 돼. 좀 더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 필요해.’
로즈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멈춰선 소녀는, 팔짱을 낀 자세로 말했다.
“케이트 씨는아직 안 돌아갔지요?”
“저녁 만찬 이후에 돌아갈 계획입니다.”
“그러면 만찬이 끝나고 잠깐만 내 방으로 오도록 해줘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사적인 감사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걸.”
로즈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단지 감사에 몇 가지 부탁을 더 덧붙일 뿐이었다.
* * *
다음날.
로즈는 조찬 자리를 빠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라는 이유였다.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사람도 몇 명 정도는 있었다. 그중에는 어쩔 수 없이 진실을 공유해야 하는 가사 고용인들도 있었다.
“아가씨, 정말 전 아, 아무것도 모르는 거로 해주셔야 하는데요….”
로즈보다 기껏해야 동갑 정도로 보이는 어린 사용인이 손에 먼지떨이를 쥔 채로 벌벌 떨고 있다. 그러든지 말든지 로즈는 검은색 드레스 위로 메이드복 특유의 카츄사와 앞치마, 그리고 탈착이 가능한 하얀 옷깃을 끼웠다.
“그렇게 할게요. 헬렌. 시가지로 나가는 건 분명 여덟 시 정각이라고 하셨죠?”
“예, 예에에…. 보존형 식료품을 사러 가는 데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소녀─헬렌은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저랑 제니퍼랑 둘이서 나가는데요…. 경비 직원들도 저택에서 나가는 마차 짐칸은 확인 안 하니까 거기 타면 되실 거 같지만… 다만 문제가….”
“문제가?”
“힉.”
아무 생각 없이 되뇐 로즈의 말에, 마찬가지로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헬렌은 접시라도 깨뜨린 마냥 소스라치게 놀랐다. 점점 움츠러드는 어깨가 한층 더 좁아지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택에서 나가는 건 몰라도, 시가지 상점 앞에서 내릴 때는 분명히, 무조건, 반드시 들켜요…. 엄청 많다고요…. 이런저런 사람들이….”
“걱정 고마워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 더 부탁할 게 있어요.”
로즈는 여왕의 얼굴이 그려진 지폐를 몇 장을 헬렌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선물’과 함께, 제가 하는 말을 운전사에게 그대로 전해주세요. 벤티 브리지 C번 터널에서 일 분만 멈추면 된다고. 여기서 한 장은 헬렌이 가지면 돼요.”
“히… 흐에엑…!?”
감촉도 느끼기 어려운 초고액권의 지폐에 놀란 건지, 아니면 의중을 알 수 없는 로즈의 이어지는 부탁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 헬렌의 자그마한 비명은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막무가내의 부탁을 헬렌은 무사히 지시대로 시행하였다.
프리스카 가문의 저택에서 나온 허름한 짐 마차는 굽이굽이 들판 길을 헤쳐 지나갔다. 도심에 앞서서 드넓은 철도 플랫폼 밑으로 파고드는 넓고 어두운 다리 아래로 지나갈 때. 마차는 잠시 멈춰섰다.
“「쿠르르르르릉─」”
증기 기관차의 선두 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플랫폼아래는 어두컴컴할 뿐만이 아니라 소음과 진동도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에 멈춰선 짐 마차의 두꺼운 천을 젖히고, 여전히 메이드복 차림의 로즈가 훌쩍 뛰어내렸다.
“가, 같이 내려요…!”
뒤따라서 내리려던 헬렌은 낯선 굉음과 환경에 또다시 “흐이” 하고 놀란다. 그런 소녀가 무사히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고.
로즈는 메이드를 나타내는 하얀 옷깃을 떼어내면서 외쳤다.
“선생!”
“가정교사 계약은 어제 자로 끝났습니다, 아가씨.”
어둠에 서서히 눈이 익었다. 거기에는 케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삼 년 동안 보았던 엄숙미가 느껴지는 종교인 복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둥그런 안경에 갈색 머리칼을 둥글게 땋아 올린 모습은 여전히 케이트였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여느 시민들이나 가볍게 입을 체크패턴 스커트에 도톰한 단색 블라우스.
그 모습을 보면서 로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만 케이트는 선생이라고 부르는 게 제일 편한걸요.”
“그럼 저도 계속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로즈 아가씨, 부탁하신 물건입니다.”
전날 저녁. 남들 눈과 귀를 피해서 부탁을 했던 대로, 케이트는 모노휠(monowheel)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언뜻 보면 터무니없이 거대한 타이어처럼 생긴 모노휠. 다른 자동차나 마차가 ‘사람이 탄 상자를 바퀴로 굴린다’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다면, 모노휠은 ‘사람이 커다란 바퀴 안에 탄다’라는 발상으로 탄생한 물건이었다.
“더글러스 사(社)에서 나온 최신 모델입니다. 이걸 하룻밤 사이에 마련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케이트가 몸을 비켜주자, 엉거주춤 모노휠 좌석에 앉은 채로 로즈는 핸들 옆 레버를 반시계방향으로 돌렸다. 「부우우웅─」하는 힘찬 모터음과 함께, 압축 증기가 작은 구름을 만들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타는 법을 그새 잊진 않으셨겠죠, 아가씨?”
“설마요. 이틀 전에도 탔던걸. 고마워요, 케이트.”
로즈는 일어서서 그녀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얼빠진 케이트의 얼굴에서 안경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정도의 스킨십에 놀랄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드러내놓고 친밀한 행동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헬렌과 제니퍼는 입이 무거운 아이니까요. 그렇죠?”
“네, 네헵!!”
이제는 안쓰러울 정도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헬렌은 ‘난 아무것도 본 적이 없다’라고 외치는 마냥 눈을 질끈 감고 바르르 떨고 있었다. 제니퍼는 아예 짐마차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헬렌. 돌아오는 시간은 오후 1시지?”
“예. 아무리 느, 늦어도 1시 30까지는 오셔야 하는데요…!”
“충분하지. 그 정도면.”
로즈는 손잡이를 힘껏 돌리고, 밟고 있던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마치 대포가 쏘아지는 것처럼, 단숨에 모노휠은 무서운 속도로 쭉 뻗은 가도(街道)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커빗 가문의 저택은, 같은 레인폴 시(市)라고는 해도 서로 끝과 끝에 위치할 정도로 멀리 있었다. 교외 전원주택이 수를 놓는 사유지를 뚫고 철도가 놓여 있을 리는 만무했고,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은 마차나 개인 차량이다.
그렇지만 로즈가 약간의 위험성을 감수하고 모노휠을 사용한 건 이유가 있었다.
반듯하게 닦인 도로든, 울퉁불퉁한 거친 길이든. 모노휠에는, 달리는 바닥을 탓하지 않는 압도적인 ‘속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