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9화 〉막간 / Intermission (99/111)



〈 99화 〉막간 / Intermission

변장은 본디 모습을 바꿔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한다.

방문하는 곳마다 타인의 시선을 끌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 눈에 안 띌 정도로 수수하게. 여태까지 코넬리아와 재클린이 다른 도시에 들릴 때마다 옷을 바꿔 입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재클린의 변장은 독보적으로 이목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레드우드 터미널에서 비행선에 탑승했을 때부터 바트나 동부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까지, 그녀가 화려하게 변장한 모습은 여러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물어보아도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은 몇 가지 특징으로 잡히겠지.


금발에 키가 크고.
뭔진  몰라도 사치스러운 복장의 여성.


원래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인상을 모두에게 남기는 것. 이것이 바로 재클린이 기대하고 있는 변장의 목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기실로 뛰어가서 당장 코넬리아를 만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재클린은 일반 대기 줄이 아닌 다른 라인으로 향했다. 자신을 비롯한 몇몇 승객들이 이미 들어서고 있는, 붉은 타일로 분리된 공간.


신분 보증이 되면 복잡한 여행서류가 필요 없이 자유로이 드나들  있는 왕족과 일부 귀족, 그리고 정부 행정 직원들만 들어갈  있는 곳이다.


짧은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그녀는 챙 넓은 모자를 슬쩍 들고, 안에 끼워두었던 서류를 꺼내었다. 나이 든 직원은 반듯하게 접혀 있는 고급 종이를 펼쳤다.

“반갑습니다. 어-.”

습관적으로 이름을 부르려고 했던 통관 직원은, 처음 보는 서류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재클린이 먼저 말했다.

“재클린 R. 커빗입니다. 확인 후 드레싱 룸으로 안내 해주세요.”

푸른빛 잉크로 온갖 정부 기관과 왕실 인장의 도장이 박혀 있는 서류를 살펴보는 직원에게, 재클린은 말을 덧붙였다.

“수화물도 바로 드레싱 룸으로 가져와 주세요. 레드우드 DA 라벨이 붙은 적갈색 여행용 가방입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확인할 부분을 확인했는지, 통관 직원은 재클린에게 서류를 돌려준 후 책상 옆에 붙어 있는 버저를 눌렀다. 잠시 후 멋들어진 근무복을 입은 터미널 직원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재클린이 말하였던 여행용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미스 커빗. 저를 따라 이쪽으로 오시길 바랍니다.”
“예. 감사합니다.”

재클린은 터미널 직원이 안내해준 드레싱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건네받은 가방과 함께 나왔을 때는, 바로 직전까지 에스코트했던 터미널 직원조차도 한순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화려하게 빛이 날 것만 같은 밝은 금색의 가발은 벗었다. 은빛인 비스듬한 보브컷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풍성하게 출렁거린다.


좀 전까지 억지로 허리를 한 치수는 작게 감싸고 있던 답답한 속옷과 드레스 차림이 아니다. 재클린이 입고 있는 건 조금 바지 기장이 짧게 느껴지지만, 그것조차도 패션처럼 느껴지는 남성 기성복 정장이다.

거기에 지금 신고 있는 갈색 단화는, 가발과 드레스와 실크햇과 함께 여행용 가방에 쑤셔 들어가진 하이힐보다는 재클린의 시원시원한 걸음걸이에 훨씬 잘 어울린다.


화려함 속에서 본모습을 숨긴다. 이것이 재클린의 변장 목적이었다.


물론 옷을 갈아입는다고 훤칠한 키까지 숨길 수는 없지만,  외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차이점이 오히려 행적을 감출 수 있다.

“혼자서 갈게요. 못 본 척해주세요♪”


원칙적으로는 계속 따라오게 되어 있는 터미널 직원을 마다하고.


가벼우면서도 밑창이 튼튼한 단화를 신은 그녀는 경쾌한 보폭으로 드레스 룸에서 나와 기나긴 복도를 따라 나왔다. 아직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대기실로 향한 재클린은, 익숙한 얼굴을 금세 찾아냈다.

“끄으으응….”


이를 악물고 끙끙거리는 소녀는 한눈에 보기에도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리 사이에 끼워둔 커다란 여행 가방 위로 엎드린 코넬리아.

그 옆으로는 낯선 목발이 기다랗게 나와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재클린의 걸음걸이는 빨라졌다.


거침없는 걸음을 멈춰 세운 건, 다른 장애물이 아닌 본능이었다. 대기실을 휘감는 소란은 여느 터미널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가운데에서 저마다 수다를 떨거나 신문을 펼쳐 읽던 사람 중, 몇몇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들키는 것마저 포함하는, 노골적인 경계였다.


"재클린 씨."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떠내려갈 것만 같은 희미한 목소리.

"손님을 모셔가기 전에 잠시만, 대화를 좀 할까."
"좋죠."
"지금. 바로 옆의 빈자리에 앉아."


어느 방향에서 들려오는지 알기 어려운 소리에 재클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힘을 풀고, 코넬리아의 바로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엉덩이를 깔았다.

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여행용 백은 발밑에 대충 던져두었다.


"육성으로 들으니 조금 낯설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은 익히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앤시아 씨?”

도대체 왜, 라는 질문이 나오기 전에.

복잡하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대기실에서도 유난히 초라해 보이는 노파 하나가 재클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뭔가 가재도구가 잔뜩 담겨 있는 바구니에서—물 흐르듯 자연스럽게—봉투 하나를 재클린의 무릎 위에 놓았다.


“누군가 경의사를 노린다. 네가 아니라 코니를. 거기에 대한 정보다.”

어떤 특이한 복화술을 쓰는 걸까.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사람의 귀에는  들어올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마치 머릿속으로 직접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육군 특무부에서 가진 정보도 취합했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다.”
“지금 여기서, 바로 읽어봐야 합니까.”
“바로는 안 읽어도 되지만.”


전화로 종종 듣던 앤시아의 대화 습관을, 수화기 너머가 아니라 바로 듣는 느낌은 신기했다. 재클린은 그녀가 이렇게 말을 살짝 늘어뜨릴 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애매하군요.”
“그래.”


그녀의 말에 앤시아는 순순히 동의했다.

“터미널을 떠나는 대로 곧장 읽을 수 있다면 읽는 게 좋다. 코니와 같이 봐도 좋아. 그리고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파기해라.”
“그렇게 하지요.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봉투를 반틈 접은 재클린은 그것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손님 깨워서 가면 되나요?”
“용무는 끝났다. 로드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있는가.”
“말로는 전할 게 없습니다. 그냥 다음에 만나면 저한테 얻어맞을 각오는 해야 할 거예요.”
“그대로 전해주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그대의 여정에 여신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팍스 파렘.”


마지막으로 앤시아의 담백한 기도를 끝으로.

마치 썰물이 지듯, 재클린은 자신들을 감싸고 있던 긴장된 시선이 동시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분명 귓가로 계속 들어왔으면서도 무의식중에 거르고 있던 소음이 밀려 들어왔다.

대기실 자리에 궁둥이를 붙인 채, 재클린은 옆으로 몸을 옮겼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어두운 안색으로 끙끙거리면서도, 잠에서는 깨어나지 못하는 코넬리아.

입은 옷 아래로 목과 어깨를 감싸는 붕대가 얼핏 보인다, 이제 막 쓰기 시작한 목발은, 아직 새것의 티가 흐르고 있다. 솜털이 아직 벗겨지지 않은 목덜미로는 오돌토돌한 목뼈가 얇은 피부의 밑에서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으윽그으응”하고 흘러나오는 괴상한 앓는 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그 머리 앞으로 포개어 고아진 손은 빈말로도 ‘건강한 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 작은 몸으로.
살짝만 힘주어 비틀면 온몸의 뼈가 바스러질 것만 같은,  연약한 몸으로.
세계의 반을 지배하는 이 나라를 언제까지 속이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걸까.

아득해지도록 막막한 심정을 억누르고, 재클린은 코넬리아의 어깨를 감싸 쥐어서 가볍게 흔들었다.

“끄헙!!”


그 배려가 무상하게도 소녀는 기겁하면서 깨어났다. 한동안 떨리는 동공으로 주변을 바쁘게 둘러보던 코넬리아의 시야에, 한참이 지나서야 재클린이 들어왔다.

그런 소녀에게 재클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어났어, 오빠?”
“어. 으응. 오랜만이군… 음 뭔가 내가 바트나로 온 지 열흘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실제로는 일 년 하고도 두 달 만에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무래도 착각이겠지….”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으으~” 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어떡한다, 우리 동생. 맛있는 바닷가재 요릿집에 들를 여유도 없어서.”
“그건 괜찮아. 그보다 중요한 게—”


재클린은 주위 사람이 실수라도 들을세라, 코넬리아의 귓가에 손을 모으고 속닥거렸다.

“여기가 곧 폐쇄되니까 얼른 나가야 한다고 들었거든.”
“아, 너도 전달받았구나. 그럼 대화가 빠르겠네. 흐으음.”

아직 잠이 덜 깨었으면서 아닌 척. 코넬리아는 미리 받았던 티켓을 품에서 꺼내어, 그 중 한 장을 재클린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은 재클린은 습관적으로 표에 적힌 숫자를 읽으면서 앞뒤로 살펴보았다.


미처 코넬리아는 확인을 제대로 못  것 같았지만, ‘바트나 중앙 교구 특별결혼지원표’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인쇄된 티켓.

거기에 적혀 있는 목적지는 재클린도 익히 아는 도시였다. 알기는 해도 뜻밖이었다.

“어차피 수도로 가긴 가야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약속은 지켜야겠지…. 하아암~”

고양이처럼 둥글게 기지개를 켠 코넬리아는 무심결에 재클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 뭐야. 너 표정이  그래?”
“아니. 그냥.”

오빠가 로드리랑 갑자기 결혼했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내가 먼저 묻기 전에 오빠가 먼저 나에게 설명해주면 좋겠는데.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는 걸 억지로 꾹꾹 눌러 참으면서, 재클린은 말을 돌렸다.

“고향으로 가는  오랜만이다 싶어서.”
“오랜만이라고 해봤자 반년 정도밖에  되었잖아~ 할아버지도 뵙고, 고모님도 뵈어야지.”


앞니를 둥글게 보이며 웃는 코넬리아는 [레인폴]이라 적힌 티켓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차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얼굴은 웃고 있어도 경직된 뺨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드러난다.

그런 소녀에게 재클린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터미널 역무원이 작은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레인폴 행(行) 비행선 탑승이 시작된다는 내용.  목소리에 대기실 곳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 몇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네. 비행선 안에서 느긋하게 대화하자고. 엇차-”


코넬리아는 오른팔 겨드랑이 밑으로 목발을 집어넣고 서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행 가방을 챙기려 들던 소녀는 문득 재클린을 보았고, 이번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동생.”

금세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재클린의 콧잔등에 얇은 주름이 잡혔다.

“괜찮아. 다 괜찮으니까….”


새하얀 드레싱 거즈가 덕지덕지 감겨 붙은 왼손을 내밀어서 재클린의 오른손을 잡았다.


코넬리아는 오른팔로 목발을 짚으면서. 재클린은 왼손으로 코넬리아의 여행 가방을 대신 들면서. 빈손은 서로 맞잡고 출입 게이트로 향했다.

전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나이 어린 동생이 손위 누이를 달래는 우애 좋은 풍경.


머리  밝은 전구가 짙은 그림자를 두어 개 그리는 복도를 지나자, 땅거미가 진 어두운 저녁 하늘 아래에서도 빛이 나게 새하얀 유선형 신식 비행선이 둘을 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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