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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파일럿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97/111)



〈 97화 〉【파일럿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뭘 그리 말하는 걸 좋아하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계산 끝난 일이니까 본인은  관심이 없어."
"선배는 돈만 받으면 끝난 거야? 환자의 사정은 알아둬야 하는ㅡ"
"그걸 내가 왜 알아야 하지?"

약간 불쾌해진  눈살이 찌푸려진 린은 니스를 가느다랗게 째려보았다.

"그 남자가 요구했던 건 환자의 상태 파악이었고, 나란 분은 훌륭하게 그 기대에 부응했지. 어디의 누구 씨와는다르게."


나대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말이 담긴 눈빛으로 린은 말을 이었다.

"환자와 보호자 사이의 사정에 끼어들려는 아줌마 같은 짓을 하고 싶으면 그 필요도 없을 의학원 수료증은 반납하라고. 뭔가 착각하는  같아서 확실하게 말해두지.
후배님처럼 참견하는 의사는 인의를 베푸는 것이니 뭐니 착각하기 딱 좋은데, 친구 사귀려고 환자가 널 찾아오는 게 아니야. 그런 자상함으로 환자의 상처를 핥아줄 생각이나 할 시간에 먼저 똑바로 바라보고, 묻고, 듣고, 짚는 의원의 기초 예진부터 공부하심이 어떨까나? 뜨내기 후배님?"
"으……."

한 마디 한 마디가 전부 열 받는 말이었지만, 단  마디도 대꾸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니스는 얼굴로 피가 확 몰리고 이내 싸늘하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난 의원이었던 걸까.
혹시 '아픈 사람을 돌보는 멋진 나'라는 역할극에 빠졌던 건 아니었을까.


"뭐, 나는 보수도 다 받았으니까~ 기쁜 마음으로 짐을 느긋하게 챙기도록 하지. 후배님도 준비  하면 식사하러 오라고."

그렇게 말한 린은 니스의 주머니에서 은붙이를 꺼내고, 이번에야말로 문을 닫고 나갔다. 한숨을 쉰 니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차피 에릭슨과 그 동료는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과 린은 북쪽 길로, 그리고 에릭슨과 동료는 남쪽 길로 향한다.
이대로 묻지 않고 그대로 린 선배와 함께 갈 길을 가는 편이 당연하다.
조금 전 린의 말엔 무엇 하나 잘못된 점이 없었다.
그들이 나에게 바랐던 건 이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대로 끝내기엔 찝찝하다.
방에서 나온 니스는 다시 에릭슨의 방문을 노크하였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에릭슨은 니스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저, 저요?"
"의원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맞습니까?"


니스의 질문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이었다. 에릭슨의 표정은 겉으로 보기엔 좀 전과 그다지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니스는 에릭슨의 미간 사이의 주름이  더 두꺼워진  느껴졌다.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 진정하면서, 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부와 현자와 에렘의 이름을 걸고, 단 하나의 거짓도 꾸며내지 않음을 맹세합니다."
"의원님은 어째서  동료가 꾀병을 꾸민 거로 생각하시는지. 부디 소중한 고견 부탁드립니다."


좀처럼 외지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어휘였다. 에릭슨이 고개 숙여 부탁하는 동안, 침대에 앉아 있던 환자는 푹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미 체념한 듯.
린은 이렇게 말하였다.
에릭슨의 종이 주인의 돈을 훔치기 위해서 거짓으로 병자 행세를 하고, 약을 구하러 에릭슨이 여관에서 떠나기만을 기다렸다고.
그 가정 자체는 완벽하다. 앞뒤가 맞아서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없다고 해서 틀림없는 진실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

"저는…린 선배님과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어째서?"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이다. 에릭슨과 동료의 사이에 끼어들 자격은 자신에게 없다는 정도는 니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의 일이라고 린처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자신감도 없다. 그래도.
그렇더라고 해도.

"아무리 그럴싸한 가정이라고 해도, 가정은 가정일 뿐입니다. 오해는 짐작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린이 말했듯이, 무슨 이유로 동료가 에릭슨을 속였는지는 니스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릭슨은 사실을 알아야 할 자격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니스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었다.


"환자분이 아픈 척을  것은 맞습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간 저도 부끄럽습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환자분이 꾀병을 부린 이유가 에릭슨 씨의 재산을 노렸다, 라는 건 오로지 린 선배님의 넘겨짚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더 대화를 해 보는 편이 어떨까요."
"그래. 결국 댁도 모르는 거군."

실망한 건지 에릭슨의 말투가 오락가락한다. 그래도 아까 전과는 달리 훨씬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의자에 앉은 에릭슨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환자를 보며 말했다.

"지금 의원님이 말씀한 것처럼, 나는 네 목소리로 사실을 듣고 싶어. 지금 당장 말할 수 없다면-"
"오늘 밤."

오랜만에 환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름도 잠든 시각이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린이나 니스자신이 들을 수 있을 때는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환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에릭슨을 보며, 니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의원은 환자에 끼어들 자격이 없다.
이것만큼은, 린의 말이 옳았다.

* * * * * *


여행길에 오른다. 하늘은 푸르고, 초원의 평원은 완만하고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런저런 설명을 미리 끝내두었는지, 여관 주인은 어제저녁 린이먹었던 것보다 조금  풍성한 식사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에 오래간 환자가 머물러서 못내 불안한 기색이었던 여관 주인도 한결 가벼운 표정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니스는 먼저 여관에서 나왔다.
어제 하루 종일 질리도록 보았던 경치임에도 어쩐지 시야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하루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뀐 것이리라.
이 여관의 공기도, 그리고 나 자신도.
니스는 학생수첩에 적어 둔 여행 계획표를 보면서 앞으로의 여정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늦은 점심을 먹을 때쯤에는 도착할 오파스는 여러 철도 노선이 한 플랫폼을 경유하는 복잡한 정류장으로 소문이 난 도시다. 린 선배와 함께 이동할 때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어쩐지 미리 고민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머리가 지끈거릴 찰나에, 린이 여관에서 나왔다. 여행복은 어젯밤에 식당에서 보았던 호두빛 로브 차림이다. 이마와 앞머리를 감싼 두터운 헤어 밴드를 두르고 있어서 한두 살은 더 어려 보인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로브는 오래 걸어 다니기엔  헐거운 옷이 아닐까 싶었던 걱정은 기우였나 보다. 품이 넓은 소매와 발목 부위를 두어  접어서 버클로 고정시켜 두었다. 거기에 정말로 필요한 것만 챙겼는지, 어깨에 가뿐하게 멘 여행용 배낭까지.
분명히 여행은 익숙하지 않다고 했는데.
여행하는 준비된 자세만 보면, 니스 자신보다도 더 철저하다.
니스의 시선을 알아차린 린은 앞머리를 고정한 핀을 만지작거렸다.

"오래 걸으면 발이 아파서 싫어. 마차를 불러 타고 싶은데 기대도 하면 안 되겠지? 어수룩한 후배?"
"이 여관엔 전화선이 없어. 헛된 희망으로 좌절감을 키우지 마시고, 자꾸 내 명칭을 바꾸면 쓸 만한 수식어가 금세 고갈될 거야, 선배님."
"그러니까 후배님도 본인을 부를  님은 빼라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거점도로는 반석으로 가포장이 되어 있어도, 자그마한 교외 도로까지 포장되어 있기를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길도 험하고 오가는 발길도 뜸한 곳에서  목적지까지 알맞게 향할 마차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무리겠지.
지치기 전에 대화를 해두는  나으리라 생각한  니스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나란 분에게 빚을 지우다니, 너도 참 복이 많은 존재로군."

채 열 걸음도 걷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업신여기는 발언이었다. 니스는 적당히 맞받아쳤다.

"어차피 오파스에 갈 생각이었으니 딱히 빚을 진다는 식으로 계산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 난 선배처럼타산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말은 고맙다만 사람의 호의는 그런 식으로 배려하는  아니야. 그리고 난 법의 그물망에 쫓기고 있는 후배처럼 죄가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
"난 잘못한 거 없어."
"모든 범죄자가 그렇게 말하지. 그리고 안보국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같다만."

그렇게 말한 린은, 오른손에 감은 묵주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시기엔 전국에 수행하는 의학원 학생들이 득실거린다는 거지. 현상 수배 명단에도 네가 단순히 수행의원 신분이라고만 표시되어 있었어.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한 초면에 네 정체를 알아내긴 상당히 어려울 거다. 에릭슨이 널 알아차린 것도 그런 이유일 거고."


현상 수배 명단을 주의 깊게 볼 사람은 현상범 사냥꾼과 그 당사자들뿐일 것이다.
그리고 에릭슨은 자신의 입으로 교도소에서 나온  얼마 안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고 보니 에릭슨 씨는 왜 그리 느긋했던 거지…?"

전날 밤에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도 그랬다. 동료를 정말로 걱정한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무관심’과 ‘냉대’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 정도였다.

"그러게. 후배님이라면 왜 그랬는지 알아차릴까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린은 능글맞게 놀리는 어투였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까지 알려줬다가는 우리 게으른 후배님의 버릇을 망칠 것 같군.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시간은 많으니. 기억력만큼은 자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선배라고는 해도 일단 눈으로 보이는 건 기껏해야 또래 뻘인 여자아이다. 업신여기는 표정을지어도 권위가 느껴지기는커녕, 장난기 철철 넘쳐 보일 뿐이다.
선배라고는 해도 정말 자신보다 연상인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웃으면서 린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었다. 과연 린의 말 그대로였다. 불과 몇 발자국을 떼어놓기도 전에, 니스의 머릿속을 계속 맴돌던 여러 의문과 생각의 파편이 하나로 맞추어졌다.

"아하."


어째서 이걸 몰랐던 걸까.

"에릭슨은, 처음부터 동료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했던 거야."

정답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니스 자신이 생각하기엔 이것이야말로 린이 놓친 사실이었다.
에릭슨은 그야말로 목숨을 담보로 큰돈을 버는 밀수업자. 높은 수익만큼 높은 위험을 감수한다. 린조차 한눈에 알아차릴 허술한 연기에 보름이나 속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하인의 꾀병이 어떤 목적인지는 몰라도, 하인이 연기한다는  주인이 알아차리면 어떤 식으로든지 처벌할 수밖에 없어. 길드 단위로 움직이는 밀수 조직이라면."

거친 발상은 입으로 꺼내지 않았다.
만약 에릭슨이 정말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하인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거두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캐묻는 게 아니라, 의원의 입으로  사실이 밝혀지길 바랐던  아닐까? 그래야 자신이 하인을 반드시 벌해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 하인에게 속은 자신의 부주의함에도 책임이 있는 모양새가 만들어지니까. 아, 이것도 선배가 말한 것처럼 단순한 내 추측이니 틀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이쪽이 사실이면 좋겠다.
차마 그 말만큼은 부끄러워서 꺼낼 수 없었다. 이번에도 순진한 후배니 하는 독설이 날아오리라 내심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째선지아무 말이 없다.
저 멀리 길을 바라보고 있던 니스는 별생각 없이 시선을 린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쉬는  잊어버릴 만큼, 놀랐다.

린 선배를 만난 이후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처음으로 소녀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경멸하던 빛바랜 눈동자는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새빨간 홍조가 생겨난 뺨에 초승달 모양의 미소가 걸린다.

"큿-"


그 미소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고.

"쿠하하하, 뭐,뭐, 뭐야 그게! 너 지금 소설 쓰니?!"

양손으로 배를 잡고, 린은 숨넘어가게 웃기 시작했다. 제자리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한참을 웃어젖힌 린은 "하아, 기분 상큼하네."하고 간신히 호흡을 골랐다.


"진짜 이렇게 배 아프게 웃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기분 상했다면 미안."
"비웃어놓고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는 건 비겁하다고."
"그렇지만 진짜 자랑스럽게 여겨도 좋아. 본인이 즐거웠던 건, 네가 부러워서 그래."


아직도 들뜬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린은 양손으로 뺨을 감쌌다.

"후후,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야. 본인도, 후배님처럼 심장이 뛰던 적이 있었거든."


나에게도 너와 같은 눈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지.
문득, 언젠가 들었던 그 말과 함께, 지쳐 보였던 학과장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말을 나눴는데도 아직도 못 알아차린 걸까, 눈치 없는 후배님."


린은 니스를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악수 정도의 의미만 가진다는  알면서도 긴장이 된다. 니스는 린의 손을 잡았다.

"내 이름은 그리 드러내고 싶은 이름은 아니니까 웬만하면 '선배'라고 불러주면 좋겠군. 후배님은?"

니스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니스. 니스 휴크레이. 왕립의학원 펜텔1 출신."
"후배님의 행동거지와 비교하면 전혀 생각지도 못할 만큼 훌륭한 곳을 다녔네. 반가워, 내 직속 후배님."

맞잡은  사이로 느껴지는 체온은 린의 쪽이 조금  높았다.
악수는 잠깐이었고, 손을 푼 린은 니스를 앞으로 떠밀며 뒤따라 걸었다.
그 앞으로 펼쳐진 풍경은, 야트막한 언덕과 끝없는 평원.


"오파스에서는 진짜 꼭, 반드시 열차를 타야만 하는 거야. 아니면 후배님이 날 업고 다니라고.“
"선배가 내 환자가 되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치? 본인도 동감이야."

고독한 혼잣말이 아닌, 농담처럼 흘려듣는 말.
여행길은 사실 니스도 익숙지 않았다. 정해진 목적지와 스케줄을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도시에서 빠져나오면 같은 곳을 제자리걸음 하는 기분이 드는지라,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지치곤 했다.
하지만 이 풍경도  뒤로 지나가고 새로운 경치가 찾아오리라.
여태까지의 홀로 겪었던 여로(旅路)와는 다른, 둘이서 함께 하는 낯선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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