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파일럿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이 작품은 장편 소설을 쓰기 전 작품관을 세우기 위하여 작성하였던 파일럿 소설입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그녀가 내게 묻기를]의 초안입니다. 2015년 2월, 여러모로 부족하고 부끄러운 이 단편 작품을 리뷰해 주셨던 김영준 님, 란피스 님, 위래 님, 황장미 님(가나다 순)에게 다시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 오탈자 및 심각한 흠결(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 고유명사, 현대에 쓰이는 신조어, 앞뒤로 반복되는 비문 등등)은 수정하였습니다. 그 외는 거의 그대로 올립니다. 문단이나 줄바꿈은 그대로입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는, 머나먼 과거의 일.
그렇지만 나에겐 어제처럼 여겨지는 기억.
나는 전염병으로 부모님을 잃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철이 들기에는 한참 모자란 서너 살의 어린애였다. 마치 온몸이 재로 타들어 가듯 뜨거웠고, 간신히 열이 내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근처 시가지의 친척 집이었다.
스무 집은 넘게 있었던 마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나 혼자뿐.
부모님의 소식을 직접 듣게 된 건 조금 후의 일이었다. 해가 바뀌기 직전인 연말에 찾아오는 성모의 날, 경건하게 기도하던 이모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시가지 성벽 너머에서 홀연히 나타나 품에 안고 있던 나를 건네주고 갔다고.
너를 구한 건, 구세주였노라고.
내 인생의 진로는 그때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 * *
열아홉 개의 의자가 열아홉 열로 늘어서 있는 대기실 위로, 둥근 대리석 돔의 구멍을 따라 햇빛이 넓은 선을 그리며 내리쬔다.
그 가운데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약간은 치수가 넉넉해 보이는 상아색 교복을 입은 소년의 옆자리에는 커다란 왕진 가방에 놓여 있다.
거기에 한 손을 올린 채 머리를 괴고 있으려니, 아무런 소리 없이 벽 전체를 갈라놓은 듯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361."
문 옆에 선 경비병이 번호를 호명했다. 심호흡을 크게 들였다가 내쉰 니스는 자신의 뺨을 탁탁 두들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병 옆을 스쳐 지나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의례상 인사를 하고 학과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 낭비로 보일 만큼 커다란 회의실에 놓여 있는 건 학과장의 책상과 의자 하나.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잿빛 머리칼이 가지런히 뒤로 넘긴 반백의 노인이다.
등 뒤의 벽걸이에는 고위 귀족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각종 의장이 내걸려 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차림인 그는 무테안경 너머로 니스를 바라본다.
니스는 문을 닫고 노인의 앞을 향해 걸어갔다.소년이 가까이 오자 학과장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앉게. 니스 휴크레이."
가시방석에 앉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학과장은 서류를 들추어보며 안경을 고쳐 쓴다.
"졸업 학기를 무사히 넘긴 것, 그리고 국가고시를 통과한 것, 모두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수행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나?"
"아무쪼록 빈틈을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입학식 이후로는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왕립의학원 학과장. 학생으로 만 6년을 다니면서도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건 그만큼 바쁘다는 뜻이기도 하고, 애초에 학생따위가 감히 말을 섞을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왕립의학원은 단순한 의료인의 후학양성을 위한 기구가 아니라 왕국 안에서 활동하는 모든 의원을 대표하는 위치이다.
그리고 '의원(醫員)'을 대표한다는 건 왕실 가문의 일원과 버금가는 존재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야흐로 의정일치(醫政一致)의 사회.
창세신화에서는 의학의 여신이 등장하고, 건국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왕가의 혈통은 즉 신의 가호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보건과 의학에 관련된 분야의 모든 것이 국가에서 엄중하게 관리한다. 의술(醫術)을 펼치는 의원은 국가직 공무원과 같은 신분이 되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따분한 눈빛으로 서류를 팔랑 넘기고 있는 이 사람은 의사로서는 최고의 출세 가도를 달린 셈이다.
그 최고의 사람이 지금 자신의 성적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는 건, 상당히 짜릿한 경험이었다.
"음…. 학점을 보아하니… 타지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나 보군."
"면목 없습니다."
"그럼 수행 전 간단하게 하나 물어볼까."
당락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질문이라고 하나, 어떤 시험도 학생 입장에서는 '간단한 시험'이란 건 없다.
학과장은 책상 위에 놓인 몇 장의 종이를 니스에게 건네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니스는 받아 쥔 것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예진서로군요."
빽빽하게 무언가가 잔뜩 적혀있는 예진서. 본격적인 진료에 앞서서 의원이 환자를 간단히 진찰하고 기록을 한예비 진료서였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부터 시작해서 가족 관계, 그리고 질병 확인서까지 동봉되어 있다. 함께 적혀있는 예민한 인적 사항에는 성의 없는 먹칠이 대강 그어져 있었다.
세 장의 예진서, 세 명의 환자.
"어차피 가상의 문서일 뿐이니, 이 중에서 니스 군이 치료하고 싶은 환자가 있다면 한 명만 골라보게."
말투에서 배려가 느껴진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다.
니스는 의자에 앉아서 차례차례 훑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첫 환자는 30대 남성. 직업은 보석세공사. 한 달 전부터 심한 편두통을 호소하고 있다. 열은 없다. 두 번째 예진서는 10대 여성. 도심에 거주하면서 사립 학교 재학 중. 명망이 있던 가문이 경제적으로 몰락한 충격을 겪은 후 호흡이 가쁘고 학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
마지막 세 번째 환자는 50대 남성. 서부 해안 수도원에 거주하는수도사. 지난해 바다에 떨어졌던 이후로 냉기가 가시지 않는다고 한다. 손발이 차갑고 한여름에도 두꺼운 솜옷을 입어야만 바깥 외출이 가능해졌다.
이것만 보면 고민할 것도 없겠지. 서류를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그것을 도로 학과장에게 내밀었다.
"상징의학이라면 세 환자 모두 진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은 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환자를 보지 않고서는, 저는 결정할 수 없습니다."
"호오. 어째서?"
학과장의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서늘한 냉기마저 감돈다.
"내가 말했지 않았는가. 연습일 뿐이라고. 왜. 결정을 못 하는 건가."
괜한 허튼소리를 했다가는 살아서 이 방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압력이 느껴진다.
자신보다 앞서서 학과장 면담을 끝마친 동기들은 다들 어떤 식으로든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자의식이 가득한 예비 졸업생이라고 해도 자신처럼 대답한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사람 앞에서 일부러 튀는 대답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방금 자네 입으로 상징의학으로 진료가 가능하다고 말한 것 아닌가?"
"네.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니스 군…. 니스 휴크레이 군."
예진서를 반듯하게 접으면서 학과장은 천천히, 묵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는 의학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성의학이 아니다. 배움의 힘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상징의학이다. 배움은 지식으로 전달된다. 이 예진서에 담긴 정보로 진료를 결정하는 건 의원이 가져야 할 덕목. 하물며 그걸 본교에서 배우고 익힌 학생이라면 그 중요성을 모르진 않을 터인데."
"의원이라면 병을 보는 것이 아닌 환자를 보는 것이라는 것 또한 함께 배웠습니다. 환자를 보지도 않고 진료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의원이 아니라 의학원 전공 교과서가 결정권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의원은 환자를 선택해서 치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아직 앳된 기가 벗겨지지 않은 목소리의 무게감은 한없이 가볍다. 그렇지만 시선만큼은 학과장의 눈을 똑바로 향한다.
위가 따가워지는 침묵.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달칵, 소리와 함께 학과장실의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노인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자 니스는 저도 모르게 어느새 멈췄던 숨을 돌렸다.
능숙하게 경례 자세를 취한 경비병은 학과장에게 다가가 메모지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내사원(內赦院)에서 면담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장소는? 외부 홀인가?"
메모와 회중시계를 번갈아 보며 학과장이 물었다. 경비원은 인형처럼 표정이 없는 얼굴을 살짝 끄덕거린다.
"포트롭 회랑에서 기다리고 있으시겠다고."
"그 계집 녀석이 또…. 먼저 나가게. 곧 가도록 하지."
얼굴을 찌푸린 노인은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나무상자를 니스에게 건네었다.
경례를 붙이고 뒤돌아선 경비원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등 뒤로 들린다. 니스는 그것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뚜껑이 이미 열려있는 그 상자 안에는, 검은색 묵주 알로 이어진 로사리오가 담겨 있다. 보통 묵주와 다른 점이라면 틔어 나는 새싹을 감싸는 손의 문양이 새겨진 붉은 동전 하나가 꿰어져 있다는 정도일까.
이 동전은 '정부에서 공인하는 의원'을 나타낸다.
"앞으로도 수행을 돌면서 그 마음가짐이 변치 않기를 바라네."
상자에서 그것을 꺼낸 니스는 오른팔에 감겨 있던 자신의 로사리오를 풀어내고 그것을 새로이 매감았다. 학창시절 내내 감았던지라 능숙하게 휘감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생일 때에 착용하는 것은 연한 잿빛의 로사리오다. 그리고 앞으로는 바깥에서 항상 손에 휘감고 있어야 할 이 로사리오의 색깔-검은색은 수행의원을 뜻한다.
면허시험도 통과하였고 졸업 학기도 다 끝내고 난 후, 정해진 도시를 따라 수행을 하는 예비 의원인 것이다.
이 수행을 끝마치고 나서야 묵주 알은 정식의원을 뜻하는 진주색으로 바뀐다.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신관 로브를 걸쳐 입으려는 학과장의 오른손에는 자주색 로사리오가 감겨 있다. 니스를 두고 학과장실에서 나가려고 하던 노인은, 문득 떠올랐듯이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고향이 서부 지역이라고 했던가?"
"뉴웰에서 자랐습니다."
"뉴웰, 뉴웰이라. 정말 멀리에서 왔군. 여기서 비공선으로도 한나절은 걸릴 건데."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뭔가 골몰히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로브의 매무새를 고쳐 입는다.
"수행 계획서를 보니 고향을 들르지 않게 경로를 짰더군.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고향에 돌아갈 자격이없습니다. 정식으로 의원이 되기 전에는…."
자신도 모르게 굳은 목소리가 나왔다. 아차, 싶었던 니스는 혀를 찼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학과장실에서 막 나가려던 학과장이 걸음을 멈추었다.
"…자란 곳과 태어난 곳이 다른 건가."
의학원의 수장이 되려면 이 정도의 통찰력은 있어야 하는 건가. 여기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상황을 넘길 타이밍이 아니다.
잠깐 고민했지만, 니스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군."
노인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학과장실에서 먼저 나갔다. 니스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는 초조하게 기다렸던 대기실의 공간이 이젠 휑하게 텅 비어 보인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학과장의 뒤를 따르던 니스는, 혼자서 일광욕을 하고 있던 왕진 가방을 쥐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손아귀에 실려 온다.
"단순한 호기심이긴 하다만. 니스 군이 의학원에 들어오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
"의원이 되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지."
여태까지 손에 꼽을 몇몇 동기들에게만 말했던 사실이다. 그렇지만 학과장에게는 숨기지 않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압박감이 있다.
"어릴 적, 저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하지만 의학원에 몇 년을 다니는 동안엔 만나지 못했나 보군. 찾을 방법은 생각해둔 건가?"
"비효율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이번 수행에서 그 은인이 갈 만한 지역은 전부 돌아보는 것으로."
학생이 드나 들어왔던 로비와는 다른 방향으로 향한 학과장은, 경비병이 차렷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출입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옆에 나란히 선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줬다.
그것이 격려의 의미라는 것을 니스가 알아차리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나에게도 너와 같은눈을 가졌던 시절이 있었지."
그가 턱짓하자 경비병들은 톱니나사로 조여진 잠금장치를 풀었다.
"모든 수행의원은 공평하니 너에게만 특별한 혜택을 줄 수는 없으나, 은인을 찾을 때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니스 휴크레이."
"마음만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대가 없는 배려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소년이 아는 이 하나 없이 수도에서 지내며 배운 소중한 삶의 지혜 중 하나다. 니스의 완곡한 거절에 보인 학과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의학원에 전설처럼 내려올지도 모르는 시원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노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문 너머로 향했다.
그가 지나기가 무섭게 출입문은 닫혔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경비병들은 심장이 멈춘 표정을 지은 채 니스를 바라보았다. 예의상 꾸벅 인사를 하고, 니스는 환하게 밖으로 열린 로비로 향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긴장하지 않은 척. 들뜨는 걸음걸이를 일부러 늦춘 니스는 마음속으로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한다.
'이 정도로만 말한 건 괜찮겠지?'
학과장에게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짓말을 한 적도 없다. 어차피 그가 마음만 먹으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정보를 구하는 건 일도 아닐 터이다.
여러 사람을 거쳐서 와전되는 것보다는 직접 알려드리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새 의학원 본관에서 나왔는지 햇볕이 눈꺼풀 위로 따사로이 내리쬔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겨울 기운이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하늘. 한 손으로 가방을 고쳐 쥔 니스는 앞주머니에서 학생수첩을 꺼내었다. 교문을 빠져나가기 전에 미리 열차 시간표를 확인해야 했다.
수행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도시는 동서남북마다 의학원에서 각각 정해두었다. 대신 그 도시로 향하는 경로는 학생이 조절할 수 있다.
물론 처음 향할 방향은 진작에 정해두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 수많은 의학원 졸업생들이 같은 도시로 향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최북단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라우리'.
의학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리게 되는, 여신의 성지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종소리에 니스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의학원에서 중앙역까지 이십 분은 꼬박 걸어야 한다. 북쪽 국경으로 향하는 기차의 발차 시각까지는 앞으로 빠듯하다.
걸음걸이가 점차 뛰다시피 빨라지더니 어느샌가 달리기 시작했다.
손에 쥐어진 왕진 가방만큼은 덜 흔들리도록 조심하면서도, 소년의 얼굴에는 의학원에서 한 발자국씩 멀어질 때마다 더 많은 미소가 들어찬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이 들이닥칠지 모르겠지만 의학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흥미로우리라. 졸업하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품을 법한 생각을 하면서도 니스는 마음
한구석에 고이 간직해둔 소원을 되새긴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잊지 않은, 단 하나의 목표.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찾아낼 것이다.
-그 은인에게,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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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 – 2015.2
두 달 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평원의 길을 걷노라면 몸보다도 마음이 먼저 지친다.
끈적거리는 비포장 길이 가뜩이나 무거운 발을 붙잡는다.
"배고프다…."
빵 하나로 때운 끼니는 부족하기 짝이 없다.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정도의 여정은 가능하다면 기차로 이동하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어중간한 거리라면 기차표에 쓸 돈이 아깝게 느껴진다. 그 정도 돈을 아끼려는 거니 혼자서 마차를 탈 돈은 당연히 없다. 언제 올지 모르는 행상인을 기다릴 바에, 하루 꼬박 걷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었다.
마음은 단단히 각오했지만 몸이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밤이슬을 맞는 건 각오해야 할 것 같다. 니스는 머리를 감싼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언제까지고 하늘 높이 떠 있을 것만 같던 태양은 어느덧 비스듬히 뺨을비추고 있다. 산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니 해가 늦게 떨어진다는 건 작은 위안이다. 그래도 이렇다 할 몸을 가릴 곳이 없는 길에서 노숙하는 것은썩 내키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만 따라가면 여관이 있다고 했었는데."
오늘 아침 역전 숙소에서 떠날 때만 하더라도 차장의 조언은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도보로 이동하는 여행객에게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잠깐 걸음을 멈춘 니스는 눈을 찡그리고 저 멀리 바라보았다.
"아."
저 멀리 가느스름한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른다. 야트막한 언덕 너머라서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여관이리라.
때가 좋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어느 쪽이든지 자신의 행운에는 감사할 일. 오른손을휘감아 싼 검은 묵주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니스는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여관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때였다. 여관 기입장에 이름을 적고 있으니, 여관 주인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혹시 의원 선생님이신지?"
오른손에 묵주를 감고 있는 건 스스로 의원임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모든 의원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드러내고 있어야 한다. 겸연쩍게 웃으며, 니스는 뚜껑을 닫은 만년필을 품속에 넣는다.
"아직은 수행을 쌓고 있는 의학원생 신분입니다. 실력은 미흡합니다만."
"그렇습니까……."
어딘가 의뭉스럽다는 반응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정식의원이었다면 하얀 로사리오를 썼을 것이다. 그렇지만 니스의 오른 손목을 휘감고 있는 묵주는 검은빛이다.
수행의원은 수행하는 의원이다. 정식으로 의원은 아니다.
"방값은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 여관에 아프신 분이 있는지."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 조금은목소리를 죽여서 물었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느낌을 받았는지, 여관 주인도 덩달아서 주위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름 전부터 머무르고 있는 손님이 있는데, 도통 얼굴을 보이지 않습니다. 끼니도 거르고 간간이 앓는 소리도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기회가 되면 한번 뵙고 싶군요. 그 옆방으로 잡아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파비 선생님."
여관 주인은 기입장에 적힌 니스의 가명을 철석같이 믿는 기색이었다. 그가 먼저 2층으로 올라가고, 니스는 두어 계단 폭으로 뒤따라갔다.
수행의원이 '경험을 쌓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지켜야 할 조건은 단 두 가지.
첫째, 누군가가 치료를 요구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둘째, 치료의 대가는 돈으로 받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얼치기 의원 행세를 막기 위한 조건이지만, 이를 역으로 악용해서 앳된 수행의원을 등쳐먹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니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지난 두 달 동안은 별별 고생을 했다.
바로 앞서 지나왔던 도시에서 뭔가 위험한 냄새가 나는 일에 휘말렸고.
지역 의원분의 도움으로 억지로 도시에서 빠져나오긴 했지만,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날렸다.
거기에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누명까지 뒤집어썼다.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다.
‘뭐어,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어차피 수도와 한참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다. 다른 도시로 가면 묻히겠지. 최대한 낙천적으로 넘어가려고 해도 일단 한 도시에서 지나치게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
나라 곳곳에 지정된 필수 지역만 들리려고 해도 연 단위의 시간이 소요된다. 부유한 집안의 도련님들은 비공선을 타고 순식간에 해치우기도 한다. 하지만 니스에겐 지금의 수행이 단순한 순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 그들보다 갑절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건 각오해야했다.
아직까진 그다지 만족스러운 정보를 얻지 못했어도 여태까지 지나온 곳보다 앞으로 남은 곳이 훨씬 많으니 실망하기엔 이르다.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는 것도 나름대로 익힌 인생의 요령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니스는 방문 너머로 여관 주인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방에서 짐을 풀고, 창문을 닫았다.
등유 전등을 켤 수도 있었지만, 그만큼의 빛이 필요하진 않다. 지금 당장 연료로 쓸 돈도 아쉽다. 토막이 되다시피 한 초를 가방에서 써내 성냥을 당겼다.
자아, 그럼.
웃옷과 셔츠를 벗은 니스는 몸을 동여맨 붕대를 풀었다. 옆구리엔 흉측한 화상 자국이 있다. 불로 달구어진 쇠로 지져진, 전형적인 고문흔(拷問痕)이다. 수통에 넣어둔 석회수에 새 거즈를 적셔서 갈아 끼웠다.
"으윽…."
마치 성에가 끼는 듯, 시큰거리는 고통이 살을 파고 에어 든다.
진물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소독을 게을리하면, 짓무른 농양은 언제든지 목숨을 위협하는 종창으로 변한다. 신음을 삼키고, 니스는 새 붕대로 배와 옆구리를 감았다.
왕진 가방이 아닌 여행용 가방에서 평상복을 꺼내어 갈아입고, 오른손등을 감싸고 있던 로사리오와 갈색 천을 풀어 젖혔다.
똑똑.
그 순간,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최대한 당황하지 않는 어투로 말하며, 니스는 반사적으로 천으로 오른손을 감싸고 묵주를 감았다. 그 찰나 문이 열리는 것은 동시였다.
제길, 노크했으면 허락을 구하고 문을 열라고. 투덜거림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집어삼켰다. 방에 들어온 사람은 여관 주인이 아니었다.
외지인이다.
처음 들었던 인상은, 이질감이 확연히 느껴지는 은색 머리에 대해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에 대해 경이로움도. 턱에 엷은 수염이 난 사내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키가 컸다.
"자네가 파비, 맞지?"
외모와는 달리 표준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내는, 니스가 조금 전 여관 기입장에 적었던 가명을 입에 올렸다.
"여관 주인이 말하기를 수행의원이라 하던데."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다소의 번거로움은 감안하고 있다. 앞으로 사내가 할 말이 무엇인지도 대강 상상이 갔다.
"동료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다고 한다. 어떤지 봐 주었으면 좋겠는데."
"당연히 봐 드리겠습니다.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는지."
"보시다시피."
사내는 신식 복장인 외투의 안쪽을 보여주었다. 각종 쇠붙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다. 단순한 공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독특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휘어진 나이프처럼 생긴 것도, 그리고 작은 아이의 머리를 감쌀 투구 모양인 것도 있다.
"아, 의원 나리는 모르는 건가?"
"아직 견문이 좁아서 말입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모르는 걸 묻는 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니스의 정중한 태도에 사내는 마찬가지로 예의 바르게 대답한다.
"나는 독수리 사냥꾼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 잃어버려서, 새로이 어린 독수리를 쫓고 있다. 가능하면 어린 녀석을 잡아서 길들이려고."
"그렇군요."
환자의 직업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알아두는 편이 예진을 하기 편하다.
"삯은 돈으로 받지 않으니, 밥 한 끼로 대신할 수 있을까요."
"아무렴. 어차피 행동할 수 있는 건 일러도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하니까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하자고."
이런 경험이 있는지 사내의 반응은 여유롭다. 니스 또한 생각이 닿는 것이 있었다.
사내는 지금 치료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나아질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거라면, 이해타산으로 엮인 동료는 숙소에 머무르게 하고 혼자서 먼저 이동한다. 그런 식의 칼 같은 태도가 니스로서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저녁 식사 먼저 하는 것으로 하죠."
"분부대로 하죠. 의원 나리."
장난 섞인 말투지만 비꼬는 기색은 없었다.
여관에서 기본으로 주는 식사는 잡곡밥에 무말랭이 따위의 마른반찬이 전부.
"이건 너무하군. 교도소에서도 이것보다는 맛있는 밥을 줬는데."
"그 밥맛이 그리우시면 다시 돌아가셔. 아니면 잠자코 주는 대로 드시라고."
여관 주인은 외지인을 대하는 것에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느 쪽이든지 농으로 주고받는 말이기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갈색 수염이 꺼끌꺼끌하게 자란 흉터 진 뺨을 긁적이며 웃던 사내는 니스를 슬쩍 흘겨보았다.
"아, 이거. 수행의원 앞에서는 실례되는 대화이려나."
"아뇨. 괜찮습니다."
니스는 짐짓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조금은 대화에 흥미가 생기는군요. 저기…."
"에릭슨이라고 부르면 돼."
외지인은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저번 도시에서 통행증 기한을 넘어섰다고 가차 없이 외인 교도소에 넣더군. 나 참. 형제들이 힘을 쓴 덕택에 보름 만에 나오긴 했지만."
"형제들이라면, '길드'를 말하는 건지."
"호오." 하고 살짝 놀라는 시늉을 한 에릭슨은, 이내 흥이 식는지 부지런히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어차피 수행의원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주워들은 잡다한 지식은 많겠지."
"그야말로 한 장의 종이 만큼이냐 얇은 정보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도 들어보았는가?"
슬쩍 목소리를 낮춘 에릭슨은 잠깐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연다.
"사람을 죽이는 의사라고, 이 부근의 지역에서 현상 수배가 걸린 의원이 있다고 하더군."
"…물론 들어봤지요."
"내가 들은 바로는 당신과 상당히 흡사한 인상착의를 한 모양이던데."
"그건 정말 우연의 일치겠네요."
니스는 긴장하지 않은 척 평범하게 말을 하였다.
"의학원은 지금한창 졸업 학기가 진행되고 있어서 제 또래의 수행의원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외지에서 오신 에릭슨 씨는 모를 수 있겠지만. 앞으로도 그 현상 수배범 의사가 각 도시 여관마다 두세 명은 있을 터이니 보일 때마다 잡아서 안보관들에게 바치면 되겠네요. 어쩌면 운 좋아서 걸릴지도 모르죠."
"그런가. 내 생각에는, 지금이 바로 그 운이 좋은 순간이 아닐까 싶은데."
"동료분의 건강이 편찮다고 하셨죠, 에릭슨 씨?"
"당장 죽을 목숨은 아니야. 그리고 사냥감과 행운은 한 번 놓치면 두 번은 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기세가 있는 척은 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다. 니스는 얇은 외투 속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이건 좀 곤란한데.'
수도에서 한참은 떨어진 국경 지대라고 방심한 자신의 잘못이다.
그렇게 위가 따가운 긴장감이 얼마 정도 이어졌을까.
"딸그랑-"
여관 현관에 매어둔 방울이 울린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는지, 여관 주인의 호들갑스러운 인사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젖은 듯 물 냄새가 풍기는 발소리는 곧장 식당으로 들어왔다.
짙은 호두나무 빛 로브를 둘러쓰고 있는 손님은, 난롯가로 가더니 거침없이 톱밥을 한 움큼 쥐어서 아궁이에 던져 넣었다. 화르르하고 기분 좋게, 그렇지만 조금은 사치스러운 온기가 훅 솟아오른다.
"정말로 형편없는 곳이군."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가녀려서 니스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외지인도 새로 온 손님으로 완전히 신경을 빼앗겼다.
"비는 어제 내렸는데 길은 아직도 질척거리지, 온종일 지나다니는 마차는 없지, 지나가는 행상인도 없지. 어이, 거기 앉은 얼빵이. 여기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얼마나 걸리지?"
"어, 얼빵이?"
갑작스러운 말에 놀랄 사이도 없이 방문객은 눌러쓰고 있던 후드티를 벗어젖혔다.
이마를 덮는 두꺼운 머리띠에는 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집시풍의 기하학적인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그 머리띠 위로는, 마치 금을 뜨겁게 풀어서 녹여낸 것처럼, 지나치리만큼 화사하면서도 옅은 금빛 머리칼이 흐르고 있다.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고 다듬어진 얼굴에서는 ‘아름답다’라고 쉬이 말하기 어려울 만큼, 힘이 담긴 눈빛과 거침없는 독설이 흘러나왔다.
"너 말고 여기서 얼빵이가 누가 있다는 말이냐, 촌뜨기 녀석."
"초, 초, 촌뜨기?"
"그래. 촌뜨기. 로사리오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방문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니스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의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손에 로사리오를 감고 다니지. 신성한 의료의 손에 부정이 깃들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