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3막 (下 - 2/2)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야겠지 (15)
팅, 가벼운 종소리가 울리고.
옆으로 열리는 철망 사이로 군홧발을 내디딘 사람은 코넬리아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기만 하는 정도가 아니다.
“소란스럽더군요.”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얼굴.
증인을 인계하고 왔는지, 혼자서 지하 공간 바닥으로 온 마틴 라이트는 승강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로드리에게 물었다.
“무슨말을 하셨어요, 참령님?”
“나에게 그걸 물어볼 게 아니지. 소위.”
“이런.”
가볍게 웃는 마틴은 여느 때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뜻 보면 여유로워 보이기만 한 행동에도 움직임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다. 그런 면으로는 군인의 모습이 보이면서도, 9호실에서 말을 섞으면서 느꼈던 마틴은 낙천적이면서 낙관적인 성격이었다.
그의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확신은 없다. 그래도 남들 정도는 알고 있다고, 여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참. 여기는 저희 셋밖에 없으니 좀 더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말이죠. 하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는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마틴을 보면서.
코넬리아는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경의사 님.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왜 저항을 한 건가요. 참령님이 어떤 부탁을 하였기에 거부한 거지요?”
여느 때처럼 마틴의 말은 귀족 가문 영애에게 존중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마틴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진 건 코넬리아였다.
로드리가 말하였던 중개자는 바로 마틴이었다.
소녀가 알고 있는 평범한 의미의 ‘중개자’는 아니리라.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단어를 뒤늦게 알려준 이유는 모르겠지만, 평범치 않은 의미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경의사 님?”
마틴의 재촉에도 소녀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로드리를 힐끗 보았다.
로드리는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뭔가의미를 전하는 거 같기는 한데 저것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코넬리아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프후후….”
소녀는 입술 사이로 실없이 파열음을 흘리고, 고개를 들어, 여전히 웃는 낯인 마틴을 바라보았다.
비행선 안에서 그가 했던 말이 스치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 전 정말 이런 첩자 같은 짓은 못 하겠어요.
- 거짓말이 너무 어설프거든요.
코넬리아가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어째서 마틴의 말을 내가 그대로 믿었던 거지?’란 의문점이었다.
그 답은 간단했다.
믿고 싶었으니까.
자신의 믿음은언제나 선량한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기대가 있었으니까.
그 허물 없는 기대가 이제 벌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녀는 가볍게 큼큼, 헛기침하고 말했다.
“카데바가 담긴 상자를 무역상사 불법 거래 증거품으로 쓰자고 했다.”
코넬리아는 어깨너머로 액침 표본이 담긴 수조를 엄지로 가리켰다.
“로드리는 합당하지 않은 이유를 들면서 나의 명령을 거부했다.”
“저런.”
소녀의 말을 들은 마틴은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간 옆으로 기울어진 그의 시선을 따라 무의식중에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코넬리아는 말했다.
“마틴.”
“예.”
“로드리를 체포하라.”
“예… 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코넬리아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마틴은, 지금의 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곧바로 되물었다.
“저보고 참령님을 체포하라는 건가요?”
“경의사의 명령은 즉 왕실의 명령이다. 따르지 않았으니 체포해야지. 마틴. 내 말에 틀린 부분이라도 있는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닌데.”
머뭇거리는 마틴을 보면서 코넬리아는 일부러노골적인 한숨을 쉬었다.
“후우—….”
입으로 길게 숨을 내밀어내고. 다시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보면서, 허리에 손을 얹은 코넬리아는 한쪽 발을 까딱거렸다.
일부러 화났다는 어필을 하는 코넬리아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소녀의 생각이 향하는 곳은, 자기 자신.
‘완전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자신이 정말로 살아온 시간이 짧은 소녀였다면, 로드리와 마틴이라는 두 청년 사이에 낀 한 편의 로맨스 모험 소설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마틴이 온갖 멋있는 척을 하면서 용감한 말로 분위기를 잡으려고 한 것도.
그리고 자신에겐 이미 여자 친구가 있다면서 궁금하지도 않았던 지식을 알려준 것까지도.
그 말이며 행동까지 하나하나가, 어설프게 남 도발하는 로드리와는 수준이 다른,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마틴은처음부터 나 하나만을 위하여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해 보이는 연기.
연기를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그는 코넬리아가 9호실에 수감되었을 때부터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예전부터 했을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로드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틴이 유일하게 보호하고, 동시에 복종하고 있는 건, 현재까지는 코넬리아 단 한 명뿐이다.
코넬리아가 겹겹으로 감추고 있는 신분을 모른다면, 이런 전략도 나쁘진 않았을 것이었다. 아직 어린이의 티를 벗지 못한 귀족 영애를 농락하려는 몇 가지 사교 수단은 뻔해 보이면서도, 알면서도 속기 마련이니까.
마틴이 공을 들이고 있는 이 아이의 속 알맹이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먹혔을지도.
늘어진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소녀는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마틴의 시선은 그리 잘 숨겨지지 않는 듯하다.
“인간 혐오가 생기겠는걸….”
“예?”
“어어,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다.”
마틴이 못 듣는 척을 하는 걸 못 듣는 척을 하였다. 정말 숨겨야 할 혼잣말은 마음속으로 했으니까.
‘지금부터 중요하다.’
누가 봐도 성격이 짓궂어 보이는 아이지만, 그 얇은 가죽 속에 들어 있는 렉스 휴크레이는, 지금까지 분명 그의 예측대로만 움직이진 않았으리라.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마틴도 내 명령을 거부하는 거야?”
“아닙니다. 그런건 아닙니다.”
“크흐, 지금 똑같은 대답 두 번 했다고.”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흘린 코넬리아는 허리를 쭉 폈다.
“명령은 번복하지 않는다. 로드리를 체포해. 그리고 해부용 시체 상자를 바트나 종립구원군 지부로 이송하겠다.”
그저 마틴을 떠보기 위해서 내린 명령은 아니었다.
로드리가 구원군이기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듯, 코넬리아에게도 자신이 경의사이기에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마틴 또한 그 책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카데바 상자라면… 시체가 들어있는 상자를, 바트나 도심으로 옮기겠다는 건가요?”
“그래. 그 말대로다.”
경의사로서 할 일을 한다. 코넬리아는 턱을 살짝 당겼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너도 체포야. 너는 내가 체포해야 할 건데.”
“하,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히 소문이 퍼질 건데요. 시민들이 그걸 알았다가는—”
“마틴 라이트 소위. 군인이 왕실의 명령을 거역하면 안 되겠지?”
“따르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머뭇거리던 모습은 사라졌다. 마틴도 어깨를 펴고 뚜벅뚜벅, 로드리에게 다가갔다.
“무장해제를 하겠습니다, 참령님. 소지한 무기를 꺼내주시고, 뒤로 돌아서 벽을 짚으세요.”
마틴의 말에 로드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그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했다. 좀 전에 썼던 너클과 함께, 몇 가지 소형 화기를 꺼내어서 바닥에 놓았다.
로드리가 별로 놀라지 않는 건 새삼스러울 게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로드리라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를 거니까.
진짜 문제는, 마틴과 로드리, 둘 모두가 어떤 어색함도 없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
‘야단났군….’
조금 전까지, 문자 그대로, 셋은 한배를 탄 운명이었다. 그 사이에서 코넬리아가 ‘서로를 체포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을 내렸는데 특별히 놀란 기색이 없는 둘.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건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그리고… 음, 이건 제 리볼버군요. 다른 건 없나요?”
“없다.”
“정말입니까?”
“내 몸이 나의 무기다.”
“역시 참령님은 어쩔 수 없군요.”
뒤돌아서서 벽에 양손을 짚고 서 있는 로드리의 옷 위를 더듬어 수색하면서, 마틴은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압수한 너클과 작은 접이식 나이프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경의사 님.”
그는 마지막으로 돌려받은 리볼버의 약실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경의사의 명령이 왕실의 명령인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 너도….”
말을 하다가, 아주 잠깐, 고민하였다.
얼굴에 상상의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자신은 있다. 그런데 그 거짓말의 앞뒤를 정확하게 맞출 자신은 없었다.
“너도 마지못해서 따르고 있겠지. 네 상사한테는 다른 명령을 받고 있을 거잖아.”
코넬리아는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를 말했다.
“가령 이 공장의 일을 조용히 수습하라는 명령, 이라던가. 그런 명령은 내 명령과는 다르지. 너는 그 둘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거고.”
거침없는 소녀의 말. 코넬리아가 꺼낸 생각이 아주 완벽히 빗나간 망상은 아니었는지, 마틴은 오- 하고 놀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 알고 계셨어요? 아, 이게 아닌가. 어디까지 알아차린 거지요?”
“그것도 아니다. 마틴. ‘언제부터 알아차렸냐’라고 나한테 물어봐야지.”
“하하하-!”
듣는 사람의 기분까지 상쾌할 정도로, 마틴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저 멀리, 드높은 지하 공간의 천장까지 울렸다가 퍼진후.
“아, 정말 코니 양이 이 어린 나이에 경의사가 된 자격은 충분한 거 같아요.”
일부러 과장되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하면서마틴은 코넬리아를 보았다.
“사실은 조금 업신여기던 감정이 없던 건 아닙니다. 반성하겠습니다. 당신은 멋진 경의사에요. 그래서 더 아쉽네요.”
“아쉽다니, 뭐가.”
“저는 상사의 명령을 우선합니다.”
찰칵.
리볼버의 약실을 제자리로 끼워 넣은 마틴은, 총구를 땅으로 향한 채 말했다.
“군은 남방지역의 현재 안정화된 분위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바트나가 혼란에 빠지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그러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군. 그 말대로면 더더욱 내 의견을 따라야 할 건데.”
이마 옆으로 식은땀 한 방울, 뺨을 타고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떨리는 손은 주먹을 꽉 쥐고. 코넬리아는 말했다.
“내일 당장 무역상사를 털고, 무연고 시체가 나온 장소를 소독해야 한다. 콜레라는 숨긴다고 숨겨질 게 아니라고.”
코넬리아는 정론을 말하고 있었다. 침착한 분위기에서 이해득실을 고려해보면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건 멍청이라도 알 수 있을것이었다.
“후후.”
깔보는 시선을 숨기지 않는, 마틴의 상냥한 웃음.
지금처럼 긴장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정론은 통하지 않는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콜레라가 무서운 건 군이 더 잘 알죠. 알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묘비다.”
잠자코 벽을 향해 돌아선 채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로드리가, 입을 열었다.
“생자(生者)가 살아있을 때는 삶의 기쁨을 모른다. 그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서는, 묘비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눈을 지그시 감은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칵, 하고.
슬며시 엄지손가락으로 리볼버의 해머를 당겼다.
“저희가 원하지 않아도 시대가 원합니다. 코니 양.”
“마틴.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하하. 참령님과 함께 대화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마틴은 엷은 미소를 지으면서 곁눈질로 로드리를보았다.
로드리는, 조금 전부터 이상하리만치 얌전했다.
얌전히 벽에 손을 짚고, 벽만 바라보고 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코넬리아에겐 보이지 않았다.
“죄책감을 느끼지 마세요. 경의사 님. 당신이 체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 마.”
뭘 하지 말라는 건지. 말한 코넬리아도 모른다.
성난 동물을 향해 침착하라는 손짓을 취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앞으로 내미는 소녀를 바라보며, 마틴은 웃었다.
“경의사 님. 저는 특무부의 명령을 따릅니다. 그리고 구원군은 신탁을 따릅니다.”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곧게 뻗은 오른팔의 끝에 쥐어진 리볼버의 밑을 왼손으로 받쳤다.
“이것이 여신의 뜻이에요.”
그 총구의 안으로 동빛으로 빛나는 총알이 보인다. 두 발걸음 떨어진 코넬리아의 눈썹과 눈썹 사이를 똑바로 겨냥했다.
“어….”
코넬리아는 두개골 안쪽부터 체온이 내려가는 감각을 느꼈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찾아오는 공포는, 죽음을 앞둔 순간 온몸이 던지는 경보.
얼어붙은 소녀 앞에서.
마틴은 바짝 긴장시켰던 어깨를 털썩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농담입니다. 경의사 님.”
“하, 하하….”
“진짜는 이쪽.”
그리고 곧바로 몸을 비틀어, 우향우 방향으로 돌렸다.
한쪽 눈을 감고, 신중하게 로드리의 머리를 겨냥하고, 부드러운 연속 동작으로 방아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