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3막 (下 - 2/2)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야겠지 (14)
코넬리아는 왼손을 슬쩍 방수 우의 안으로 집어넣어서, 허리에 차고 있는 홀스터에 손을 대었다.
리볼버의 차가운 공이쇠가 손가락 끝으로 느껴졌다.
어차피 로드리를 상대로는 이런 무기가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거 쓸 일, 정말로 없으면 좋겠는데….’
속으로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하면서도 안 그런 척. 살짝 턱 끝을 세우면서 코넬리아는 로드리의 브랜디 빛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랑 마틴 사이에 무슨 약속을 했는지 말해.”
그 말에 로드리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코넬리아가 기억하고 있는 한, 여태 로드리에게서는 본 적이 없는 시선이었다.
어째서 네가 그걸 물어보는 걸까—하는 경계와 함께, 너무 깊숙하게 묻지 않기를 바라는 걱정이 섞인 그 눈빛.
코넬리아는 이 복잡한 의미가 담긴 시선을 완전히 무시했다.
“나 몰래 너무 많이 약속을 해서, 내가 뭘 묻는지 헷갈리는 거구나. 좀 더 좁혀서 정해줄까? 지하 창고로 들어온 후, 세척실로 향하기 직전. 마틴에게 귓속말로 나누었던 개인적 부탁. 그걸 말하라고.”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소녀의 질문을 들은 로드리는, 두꺼운 안면근육 아래에서 요동치는 격렬한 감정을 용케도 숨기는 데에 성공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건 가느다란 떨림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코넬리아에겐 충분했다.
“어째서 그걸 묻는 건가. 코니.”
“질문은 질문으로 돌리는 게 아니야.질문에는 답변을 하는 게 맞지 않겠니, 로드리?”
코넬리아와 예전부터 둘도 없는 친구사이이긴 했어도 지금은 완벽한 상하 관계다.
왕실로부터 권능을 하사받은 경의사의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로드리에겐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것처럼 지당한 사실.
그러니 코넬리아의 명령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꺼내야 하는 그 답변을, 한참이나망설이고 있다.
백 마디의 말보다도 확실한 반응이었다.
‘제대로 짚었다.’
애매한 어림짐작으로 파두었던 함정은 이제 칼날로 가득 채워진 구덩이가 되었다.
저 둘이 코넬리아에게 비밀로 하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 그 중요한 기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서툰 연기에 속지 못해서 미안해. 로드리.”
로드리를 향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은, 바로 조금 전이었다.
코넬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끼를 던졌었다. 그걸 로드리는 아주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물어버렸다.
“내가 해츨링을 증거품으로 가져가자고 말했을 때, 너는 뭐라고 했지?”
소녀의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흐음…….”
정말로 무슨 말을 한 건지 까먹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단순한 시간 끌기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침묵.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코넬리아는, 그가 말하려는 척도 하지 않자 자문자답을 하였다.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넌 ‘해츨링을 먼저 가져가고, 카데바를 나중에 회수하자’고 말했어. 그렇지?”
소녀의 말에도 로드리는 여전히 “그랬던가….” 하고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의미 없는 말을 흘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지금 네가 하는 말이 앞뒤가 하나도 안 맞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거야?”
‘하~’에서 양팔을 활짝 펼친 코넬리아의 조그만두 손이 공중에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넌 그 의견에 당연히 반대했어야 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라면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평소의 얼굴로 반박을 하려던 로드리는 눈을 조금 크게 뜨면서, 말하던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소녀가 왜 자신에게 핀잔을 놓는 건지. 둔하기로만 따지면 둘째가기 서러운 로드리도 하나 생각이 닿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무역상사의 불법 거래 증거품만을 가져갈 거라면, 그래. 맞아. 해츨링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불법 카데바 거래가 알려지면 지역 사회는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그 전례가 스테이츠의 뉴 앨버스에서 일어난 소요 사건이었고 이걸 막기 위해서 소녀가 제시한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 생각은 코넬리아도 여전히 변함없다.
어디까지나 잘 늘어놓은 미끼를 따라가면 무난하게 떠올릴 발상이다.
‘해츨링 표본은 일부러 이 장소에 둔 거겠지.’
공장에서 가장 깊숙한 이 장소에, 경의사가 오는 걸 가정한 준비품.
존 제르바의 공장은 경의사가 어떤 식으로 결단을 내릴지 처음부터 끝까지 유도하고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이 폐공장은, 정교하게 짜여진 무대다.
지금 코넬리아는 이 연극을 꾸며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계획에서 소녀는 스스로 빠져나왔고, 애초에 바깥에 있던 사람을 추궁할 때가 왔다.
그 사람은 코넬리아의 앞에서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너의 의견이 맞다. 코니. 도시 시민의안전을 위해서 내린 판단이다. 우리는 해츨링을 가져가야 한다.”
“이 카데바가 어디서 온 건지 보고도 그런 말을하면 안 되지. 로드리. 너도 봤잖아.”
철제 상자를 가리키면서 코넬리아는 둥지에서 파닥거리는 어린 새처럼 팔을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커크가 있던 곳에서만 나온 게 아니야. 바트나에 있는 온갖 구빈원과 시체 안치소에서 저만큼 쏟아졌다고. 이 짧은 시기에 무연고 시체만 저 정도야. 이건 이상하잖아?”
시립 구빈원에서만 나왔다면, 콜레라로 목숨을잃은 빈민들과 그 교구관리인 커크에게는 불행일지 몰라도, 도시 전체로 보면 차라리 나았을지 몰랐을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 이곳저곳에서 구빈원의 시체가 같은 시기에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알려주는 사실은 단 하나.
—이미 콜레라는, 바트나 시를 천천히 휩쓸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런 사태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건, 무역상사가 통계의 바깥에서 맴돌고 있는 무연고 시체를 열심히 모았기 때문이겠지.
‘그래도 얼마 가지 않는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이세상의 가장 고요한 시체라고 해도, 한두 구라면 모를까.
이 정도의 양이면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카데바 상자를 밖으로 가져가서 알려야 해. 네가 안 한다면 나라도 할 거야.”
“코니, 나는.”
“네가 협회처럼 인간의 자격을 매기든 말든, 나는 알 바 아니야.”
하는 말의 내용이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진다.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코넬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시립 구빈원에서 일어난 참사, 그 수십 명이 죽거나 죽을 예정이었던 장소로 나를 데려온 게, 경의사를 바트나로 데려오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어?”
“아니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바트나를 걱정하던 로드리는 어디로 가버린 거야.”
어느새 지하 공간에서는 소녀의 목소리만이 커다랗게 울렸다.
“해츨링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닌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정신 차려 로드리, 네가 구해야 할 건 시민이잖아!”
얼굴이 새빨개진 코넬리아가 발을 구르면서 외치는 고함.
로드리는 그저, 묵묵부답으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팔짱을 낀 그는 고개를 젖힌 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며 씩씩거리는 소녀는 이번에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로드리의 닫힌 회중시계 뚜껑 아래로 째깍째깍, 초침이 한 바퀴는 돌았을까.
「쿠웅—……」
저만치 몇 층 높이인지 모를 천장에서 강한 부딪힘으로 울리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좀 전부터 뭘 기다리나 했더니.”
바스러져 떨어지는 돌조각 몇 개가 바닥에 빗방울처럼 튀는 걸 보면서. 코넬리아는 물기에 젖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이 소리. 지금 오토마톤이 지하로 진입하려고 하는 거지?”
“그렇다.”
“하하, 이런 건 또 순순히 대답한다니까.”
어이가 없는지 코넬리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천장을 보고 있던 로드리는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소녀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오토마톤은 지하 창고로 진입한다. 하지만 여기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승강기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지? 저 철제 상자를 다 못 옮기니까 해츨링이나 쓰자는 거잖아.”
소녀의 비아냥을 정면으로들으면서도 로드리는 눈썹 하나까딱하지 않았다. 거기에 코넬리아가 뭐라고 화를 덧붙이려던 순간.
“「기이이잉—」”
둘이 좀 전에 사용하였던 승강기가 갑자기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가시처럼 날카로운 금속음을 사방으로 흩뿌리면서 올라가는 승강기. 궁금해서라도 뒤돌아볼 법하건만, 로드리는 똑바로 코넬리아만 바라보았다.
“아니다. 코니.”
그의 목소리에는 화를 내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차분함이 담겨 있다.
“해츨링도 옮기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뭔데.”
“네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미안하게 되었다.”
로드리는 손바닥을 보이면서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코넬리아가 눈치채기에 앞서 로드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총에서 손 떼십시오. 경의사 님.”
그 말에.
망설임 없이 코넬리아는 번개처럼 홀스터 안에서 리볼버 권총을 꺼냈다.
소녀 나름대로는 번개처럼, 이었지만. 몸이 움직인다-하고 느낄 틈도 없이, 로드리는 손날로 코넬리아의 권총을 강하게 내려쳤다.
“끄윽-”
이를 악물고 참으려고 해도 리볼버를 쥔 손의 힘은 어느새 사라졌다.
덜그렁, 바닥에 나뒹구는 리볼버를 로드리는 느긋하게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걸 자신의 옷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수상한 짓을하시면 곤란하다.”
“아… 아아.”
마치 몽둥이로 세게 맞은 충격에, 오른쪽 손등부터 손바닥까지 얼얼한 통증이 퍼진다. 그런 코넬리아의 아픈 오른 손목을 로드리는 왼손으로 천천히 감싸 쥐었다.
바짝 잘 구워진 벽돌과도 같이. 단단한 굳은살이 배여 있는 로드리의 손아귀는 코넬리아를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그대로,그는 소녀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만 순순히 포기하시지-!”
“이익- 우, 웃기지 마! 경의사 펀치!”
코넬리아의 강력한 펀치는 그저 로드리의 가슴팍 먼지를 토닥토닥 털어주는 정도의 강력함이었다.
품에서 바둥거리는 코넬리아를 가볍게 무시하는 상태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코넬리아의 입장에서는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는,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한 번만 더 저항한다면! 이 정도로 안 끝날 거다-!”
“안 끝나면 뭐 어쩔 건데?! 경의사 킥!”
어차피 자신의 저항이 정말로 먹히지 않으리란 건 코넬리아도 알고 있었다.
다 큰 성인한테—그것도 여느 평범한 사람도 아닌 숙련된 군인에게—이제 열 몇 살 먹은 어린이의 저항 정도는 조금 성가실 정도일 뿐이니까. 그걸 알면서도 열심히 발로 로드리의 단단한 하체를 두들겨 걷어차는 건 이유가 있었다.
살짝 열 받았기 때문인 거도 조금은 맞긴 했는데.
그보다도 코넬리아의 마음속으로 드리운 불안한 그림자가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이유가 있다.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로드리의 어색한 외침은 끊어지질 않았다. 소녀를 향한 외침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지~ 후회할 거다-!”
무슨 엉성한 소설책이라도 낭독하는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로드리. 그리고 그의 본심은, 곧바로 자그마한 속삭임으로 들려왔다.
“중개자가 온다.”
「끼기기기기긱—」
올라갔던 승강기가, 다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려온다. 밑에서 바라보니 불꽃이 파끔하게 튀는 모습이 그리 안전해 보이진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억지로 만세라도 시키듯, 로드리는 코넬리아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그는 온몸을 바둥거리는 소녀의 귀에만 간신히 들릴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흐름에 맞춰서 틈을 찾아라.”
“무… 무슨 말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로드리의 속삭임. 그 말에 담긴 의미는스스로 곱씹어봐도 결코가볍게 넘길 내용은 아니다.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 있는 소녀의 질문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꽉 붙잡고 있던 코넬리아의 팔을 놓아주었다.
이미 저항을 잊은 소녀의 팔은 힘없이 옆구리로 나란히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승강기는 다시 지하 공간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