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3막 (下 - 1/2)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13)
“맞는 말이야. 로드리.”
찰박찰박 물웅덩이를 내딛는 젖은 발걸음 소리. 땅에 파묻힌 가로등처럼 바닥에서부터솟아나 보이는 하얀 불빛과 점점히 보이는 푸른 불빛은 안개 속에서 커다란 구(球)를 그린다.
그 사이로 걸어가는 로드리의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코넬리아는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아. 부족한 건 내 쪽이야.”
엘리자베스가 지역 지부에서 보여준,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선(善)한 마음씨.
마틴이 비행선 안에서 멋쩍게 털어놓았던, 스스로 설명을 하기 어려웠던 무조건적인 호의.
그리고 이 둘과 코넬리아의 교집합을 만들기 위해서 그 누구보다도 물밑에서 노력한 로드리까지.
소녀와 함께 움직였던 셋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는 확실한 각오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상황을 겪든, 마음의준비를 세워둔 그들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코넬리아에게 필요한 건. 누구보다도 선명한 각오.
비행선 안에서 당당하게 떠들어댔던 조금 전의 모습이, 단지 그럴싸한 허세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언제나 너에게는 빚진 기분이 드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과한 말씀입니다.”
여전히 거리감을 두는 말을 하면서도 맞잡은 손은 놓지 않은 채. 코넬리아보다 한 발자국 앞서 걷던 로드리가 걸음을 멈췄다.
‘벌써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둘은 아직 진흙탕 바닥 위였다. 가만히 서 있는 동안 코넬리아는 문득 주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사방이 조용해진 건 아니다. 귓구멍을 가득 채워 울리는 건 소녀의 가쁜 심장 고동을 따라 요동치는 맥박음이었다.
“허억, 헉….”
오랫동안 걸은 게 아닌데도 금세 지쳤다. 그 심상찮은 기미를 로드리가 눈치를 채고 멈춘 거였는지, 쥐고 있던 코넬리아의 손을 놓고, 품 안에서 힙 플라스크를 꺼냈다.
지난밤 9호실로 돌아가던 길에 한 번 본 낯이 있는 물건이었다.
“오늘 담은 성천수입니다.”
로드리가 내민 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은 코넬리아는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주입기를 쓰지 않고 목구멍으로 성천수를 삼켜 넘기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일 뿐, 인공심장까지 도달하는 활력의 효율은 형편없이 낮다.
그렇기는 해도 식도를 훑으며 온몸으로 퍼져 오는 활력의 신호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혹시 졸리십니까.”
“괜찮아. 아직은 마구 졸릴 시간은 아니거든.”
확실히 기운을 되찾기는 했다.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고 코넬리아는 반 정도 남은 힙 플라스크를 돌려주었다.
“그냥 좀 피곤했던 거 같네.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본다.”
“작전 중에 꿈나라로 가시면 내가곤란합니다.”
“그러면 큰일 나지. 그랬다가는 제일 곤란한 사람이 너보다도 나일 거니까.”
참을수 없는 잠기운은 불시에 찾아오지 않는다.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해보면 자정에 가까워질수록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날짜가 바뀌기까진 아직 두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사과만 하는 거 같네. 자꾸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삼가십시오. 경의사 님.”
코넬리아의 오른손을, 로드리는 이번에는 부드럽게 잡았다. 잔뜩 젖은 가죽장갑의 물기가 손을 감싸지만, 이상하게도 불쾌하진 않았다.
한 걸음 앞이 아니라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로드리의 옆모습을 올려다보며. 코넬리아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로드리.”
“감사 인사는 작전이 끝난 후 받겠습니다.”
“지금 받지 않으면 명령으로 받게 할 거야. 내 감사를 받아!”
일부러 배에 힘을 주어 강조하는 소녀의 말에는 익살스러운 놀림이 담겨 있다. 그걸 알면서도 로드리는 짐짓 모른 척을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알겠습니다. 나도 경의사 님에게 감사합니다.”
“어떤 부분이 고마워?”
장난기가 담긴 코넬리아의 질문에도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고마운 것입니다.”
너무 진지해서 뭐라고 받아치기도 어려운 답변이었다.
평범한 하루 속에서 오가는 대화였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부교수님에게 감사하다고 해야지. 아차, 이젠 교수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라고 곧바로 대화를 이어 나갔겠지만.
“어… 으응. 그렇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볍게 털고 넘겨버릴 말은 아니다. 조금은 계면쩍은 미소를 머금고 코넬리아는 말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을게. 나는 경의사니까.”
“올바른 판단입니다.”
그렇게 끊어진 어색한 대화를 끝으로, 둘은 말없이 안개와 소음이 자욱한 진흙 바닥 위를 걸어갔다.
경의사.
왕의 권력을 위임받고, 여신이 하사한 권능을 소유하며, 초법적(超法的)인 조치 권한을 부여받은 특별신분.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코넬리아는 스스로 위치를 직시하지 않았다.
귀족 자제들을 위한 퍼블릭 스쿨에서 성장기를 보냈다고는 하더라도, 그 콧대 높은 귀족보다도 아득히 높은 경의사의 위치는, 렉스 휴크레이가 감당하기 버거웠기 때문이리라.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어. 그래서는 안 되는데.’
코넬리아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무던했던 생활 속에서는 깨닫지 못하였던 자신의 위치가 이런 험지에 와서야 체감이 되다니.
아르샤와 레드우드를 거쳐서 바트나로 오기까지.
그 사이에 결코 「경의사」라는 책무를 망각한 건 아니었다. 아르샤에선 위생국으로부터 떠맡은 의뢰를 수행하였고, 개인적인 목적으로 방문한 레드우드에서도 자신의 대리인—동생—이 경의사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나태하게 임무에 소홀한 것도 아니었으며, 권력에 취해서 불필요한 문제를 도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타락하지도 않았다.
반드시 해야 하는 본업에는 충실하되, 강제하지않는 윤리적인 책무에는 구애받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유롭게,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경의사란 신분을 마음껏 사용하자.
‘그 마음가짐은 틀렸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동생과 함께 다닐 때는, 솔직히 비밀 여행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양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원래의 몸으로 회복하고, 원래의 몸이 짊어진 오명을 벗겨내야 하는 목적은 코넬리아에겐 너무나도 절박한 문제였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손에 쥔 모든 수단을 쓰고, 경의사는 그중에서도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경의사를 도구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자신에게 찾아온 「경의사」라는 특별신분은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 아니다. 그 본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여야 했다. 남몰래 혼자서—또는 동생과 둘이서—움직이면서 조용히 왕국을 순례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
경의사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경의사여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 자기 자신과 서류 뭉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건강과 행복과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무역 봉쇄를 막기 위해서 수인성 전염병이 돌았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버린, 쥐새끼처럼 생긴 대머리 지역 지부장.
시립 구빈원에서 처음 마주하였던, 퀭한 몰골로 엄마를 찾던 병상 속의 어린아이들.
한낮 도심에서 총을 마구 쏘아대면서, 마약 거래 증거품으로 온 소포를 가로채려고 했던 퇴역군인들.
분명히 이 모든 행위의 배후에 있으면서, 바트나를 마약 거래의 유통 창구로 사용하였던 대형 무역상사.
행정의 그림자 구역이라는 맹점을 이용한, 마약 대금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북구 제3지구.
사람과 조직과 위치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의 타래를 해결하는 건 어려울지 모른다. 지역 경찰은 지역 밖에서는 무력하며, 지역 지부마저 좌지우지할 정도의 무역상사는 어떤 식으로든 법의 철퇴를 피하려 할 게 뻔하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도저히 명쾌한 답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바로 자신이.
코넬리아가, 경의사가, 바트나에 왔다.
“나는 경의사니까.”
소녀는 한 번 더 입으로 되뇌었다.
“경의사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좋은 목소리입니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마를 덮은 방수 우의를 고쳐 쓰면서 로드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초여름인데도 그의 입술에서 입김이 나올 정도의 쌀쌀한 밤공기.
계류대에서 내린 이후부터 로드리와 함께 걸은 거리는 단순하게 세면 수백 미터 정도. 그래도 불빛과 소음 사이에서 지그재그로 이동하느라 훨씬 더 오래 걷는 느낌이 들었다.
비가 내리면서 땅이 점점 진득해지는 가운데에, 로드리는 녹색 헝겊이 매어져 바닥에 박힌 쇠말뚝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쪽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일부러 피하듯 걷고 있던, 새하얀 빛덩어리로 똑바로 걸어갔다. 불과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도 시야 앞에 거대한 사람의형태가 불쑥 나타났다. 오토마톤이었다.
일부러 짧은 거리에서만 확인이 되도록 견부(肩部)에 청색 식별등이 장착된 오토마톤. 바로 곁에 설치된 간이 가스등의 새하얀 빛은, 비에 젖은 육중한 금속 덩어리를 아래에서 위로 쏘아대고 있었다.
“오오….”
빗방울이 혓바닥으로 들어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코넬리아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게 있는지 로드리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본 푸른 불빛은 다오토마톤인 거지.”
“그렇습니다.”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십 수 대의 오토마톤이 서 있는 모습은 필시 장관일 것이다. 당장 지금 눈앞에 있는 것만 하더라도, 시가지에서 마주쳤던 모델보다도 한참은 더 커 보인다.
점차 거세지는 빗줄기 속에서, 로드리는 기껏 입었던 방수 우의를 벗었다.
“여기 파여져 있는 홈이 보이십니까.”
어정쩡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두 발로 서 있는 오토마톤. 그 다리 부분에는 손가락이 깊숙하게 들어갈 만한 홈이 패여 있다.
“이걸 이용해서 저기로 올라가는 겁니다.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할 수 있냐니. 이걸로 기어 올라가라고?”
“조금 전에 간신히 세웠던 각오를 떠올리십시오, 경의사 님.”
로드리가 생각하는 기대감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경의사로서 품은 각오는, 빗물로 미끈거리는 오토마톤을 기어 올라가는 데에는 쓰임새가 없었다.
“로드리….”
소녀는 살짝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예전이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못 올라가. 악력이 부족하다고.”
“그렇습니까. 그럼 잠시만 대기하시길.”
다행히 로드리는 코넬리아의 변명 아닌 변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길게 접은 우의는 왼팔에 한 번 넓게 감싸고, 민첩하게 오토마톤을 타고 올라가 콕핏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채 뭔가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긴 해도, 아래에서는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으으응──」”
이미 예열이 끝나 있는 오토마톤은 증기를 피익 뿜으면서, 묵직한 슬관절을 바로 펴기 시작한다.
마치 말을 타고 있는 기마처럼 하반부를 굽히고 있던 오토마톤이 똑바로 서자, 시가지에서 봤던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로드리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정도는 커 보이는 인간형 기계 조종장치와는 이번이 두 번째 대면이었는데.
‘뭔가 달라, 뭔가가….’
왕국이 바다 건너 극동전선에서 육군을 적극적으로 운용하면서 얻은 눈부신 성과—로 포장된 교묘한 전시 마타도어—는 잡지와 신문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 오토마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코넬리아가 알고 있는 오토마톤의 지식은 세분된 모델별 지식이 아닌, 『오토마톤』이라는 대명사에 대한 정보였다.
증기 구동계와 유압 실린더의혼합구조로 작동하는 오토마톤은 기본적으로 1인이 조종하도록 제작된 기계장치다. 최초로 개발되고 사용된 곳이 전장(戰場)인 만큼 ‘튼튼하고, 조종사를 보호하고, 고장나도 수리가 쉽게’의 방향성을 충실히 지키고 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지식은 있었기에, 시가지에서 엘리자베스와 봤던 오토마톤을 보았을 때도 흡사 코끼리를 처음 보는 어린이처럼 놀라진 않았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거, 만져봐도 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보드라운 소녀의 손바닥에 닿는 서늘한 금속 감촉에는, 뱃속까지 울려 퍼지는 낮은 진동이 부들부들하게 퍼져 왔다.
실물로 진짜 만나는 군용 오토마톤에서 느껴지는 박력감은, 태엽 구동계로 움직이는 것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어… 그런데 이거, 두 명이 탈 수 있는 건가.”
“물론입니다. 일단 여기로—”
“으응? 잘 안 들려!”
소리를 내는 건 로드리의 오토마톤 만이 아니다. 전체 규모는 알 수 없어도 적잖은 수의 기계가 사방에서 묵직한 엔진 크랭크를 힘차게 돌리기 시작했다.
아주 시끄러울 정도의 소음은 억제하고 있어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리도 안개밑바닥을 어지러이 떠돌고 있다.
코넬리아가 손을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서 “어떻게 하라고~?”라 외치는 모습. 그 외침이 로드리의 귀에 닿았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모습이 눈에 보인 건 다행이었다.
“「그응— 그으으응—」”
한쪽 무릎을 굽힌 오토마톤은 왼쪽 팔을 앞으로 길게 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종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엇차차.”
외모에 안 어울리는 말을 하며 코넬리아는 기계의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미끄러워서 균형을 잃기 전에 잽싸게 소녀는 자신의 몸뚱이만 한 엄지손가락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그 광경을 당연히 계속 보고 있었는지,오토마톤의 팔은 다시금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설마 이대로 이동하려는 건 아니겠지?’
로드리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다. 불길한 예감이 번뜩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아도 그 ‘일반적’인 감각이 로드리는 조금 남다르다.
그런모습을 여태 보아왔던 코넬리아는 예감이 현실이 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다행히도 빗나갔다.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 오토마톤의 왼손은 코넬리아를 떠받들고 있는 그대로 콕핏까지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