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3막 (下 - 1/2)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12)
‘사방이 트인 공간에서갑자기 튀어나왔다’고 말한다면, 보통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겠지만.
안개 속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단순히 불빛을 가까이 지니고 있다고 해서 답답했던 시야가 깨끗해지는 게 아니었다. 공기를 채운 물방울은 불빛을 마구잡이로 반사하고, 그 가운데를 헤쳐나가는 사람들의 이목구비는커녕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도 알아보기 어렵다.
“와.”
그러잖아도 잔뜩 놀랄 준비를 하고 있던 코넬리아 앞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들.
안 그래도 알아보기 어려운 몸을 더 위장하려고 하는지 진녹색 방수 우의를 뒤집어쓴 차림. 가죽장갑을낀 양손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하려는 건지 램프는 오른쪽 어깨에 고정되어 있고, 코넬리아 일행이 가진 것보다도 더 환한 빛을 낸다.
그중에서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선두에 서서 말하기 시작했다.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말문이 막힌 소녀의 앞을 가로막듯, 로드리가 앞으로 나섰다.
“시그널은 확인했는가. 앤시아.”
“구 항만에서 긴급 경보를 열심히 보내고 있더라고.”
비스듬히 얼굴 옆으로 드리운 그림자 사이로. 도끼처럼 날카롭게 뜬 눈이 서린 빛을 반사한다.
“정규 전신(電信)으로 오는 건 전부 차단하고 있다. 로드리.”
“경과시간은?”
“음, 7분 지났군.”
방수 우의를 들치고는 회중시계를 한 손으로 열어 확인한 그녀—앤시아는 로드리의 뒤에 서 있는 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 레이디. 그쪽의 군인 씨도 안녕.”
말은 정겨운 인사지만 목소리도, 눈빛도, 그리고 표정마저도 살벌하다.
“정말로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예의를 지켜라 행여라도 실례가 되는 말은 하지않도록.”
“후후… 괜한 걱정은 하지 마라. 로드리.”
앤시아는 옆으로 왼팔을 뻗어서 손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서 있던 동료 하나가 네모나게 각 잡혀 포개어진 방수 우의를 들고 왔다.
코넬리아 일행 각자 하나씩 받은 걸 확인한 앤시아가 말했다.
“지금 착용해 주십시오. 잠시 후 강한 비가 내릴 것입니다.”
“지금?”
“그렇습니다. 레이디.”
단호한 앤시아의 부탁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어두운 색상의 고무를 엷게 도포해서 방수 처리를 한 우의를 주섬주섬 펼쳐 입으면서 코넬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가 올 거 같은 날씨는 아니었는데.’
하늘 높이 떠 있었을 때 보였던 풍경으로는 비가 내리기는커녕 오늘처럼 내일도 쨍하게 맑을 것처럼 보였다.
단순히 안개가 꼈다고 해서 비가 오는 건 아니다. 공기에 물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무겁든 가볍든 크고 작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건 저 높은 하늘 위이다.
“끙….”
아무래도 좋은 사실보다 더 절박한 문제. 처음 입는 방수 우의는앞뒤를 알기 어려웠다.
“저기, 코니 양. 힘드시면 도와드릴까요?”
“괘— 괜찮아. 이 정도야….”
천 주머니 속에서 길을 잃은 고양이처럼 허우적거리던 코넬리아는 간신히 머리를 구멍 바깥으로 꺼내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는 순간 머리끈이 어딘가에 걸려서 풀어졌다.
“제가 묶어 드리겠습니다.”
허락할 틈도 없고 말릴 틈도 없었다. 슥, 하고 소녀 뒤로 다가온 앤시아는 순식간에 소녀의 머리칼을 뒤로 둥글게 말아서 고정하였다.
“아름다운 금발이십니다. 경의사 님.”
“편하게 말해도 되는데.”
“제가 말하는 게, 로드리와 비슷합니다. 편하게 말하면 선을 못 지킬 것입니다. 그건 싫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좋진 않겠지.”
“그런 겁니다. 자.”
능숙하게 코넬리아의 머리를 묶은 앤시아는, 곧이어 로드리에게 바짝 붙어 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어?!”
“군인 씨도 잠깐만.”
한쪽 팔에 한 남자씩, 로드리와 마틴을 동시에 어깨동무하듯 끌어당기어 안았다. ‘이게 뭐야’란 눈초리로 한 덩어리가 된 셋을 바라보는 코넬리아에게 앤시아가 말했다.
“경의사 님. 잠시만 이쪽으로, 몸을 가까이.”
시커먼 진녹색 방수 우의 아래.
맑은 남색 빛이 감도는 앤시아의 두 눈동자가 소녀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바로 근처에 그녀의 동료가 여럿 있는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안개로 에워싸인 지금은 마치 이 세계에 남겨진 사람이 자신들밖에 없는 듯한 착각이 든다.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흔들고.
코넬리아는 셋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앤시아가 몸을 숙이자 로드리와 마틴도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게 된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저희는 잠시 후 호우가 내리면 제3지구로 진입합니다.”
호우(豪雨).
줄기차게 퍼붓는, 아주 큰 비.
“목표는 존 제르바의 공장. 에버라드 무역상사와 최소 8개월 동안 미신고 물류 교환을 하고 있습니다. 미끼 작전의 형식적인 정당성은 거래상의 세금 탈루 적발입니다.”
“최소한의 정당성은 있구나.”
“예. 안타깝게도 경의사 님의 것이 아니라 저희 구원군의 정당성입니다.”
조금은 아쉬운 척이라도 할 법하지만, 앤시아의 감정에는 낭비가 없었다.
“경의사 님은 즉흥적으로 적당히 말씀하시면 됩니다. 존 제르바의 공장은 지어졌을 때부터 무허가 건축물이었으니, 그 정도는 현장에서 떠올리기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어른 옷을 몰래 입는 아이처럼, 한두 치수도 아니고 한참은 품이 넓은 방수 우의를 뒤집어쓴 차림으로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작전 개요는 이 정도입니다. 설명하지 않은 부분은저희 구원군을 믿어주시길.”
앤시아는 양어깨로 누르고 있던 로드리와 마틴을 해방시켰다. 그러고는 자신도 허리를 쭉 펴면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제3지구 진입은 피뢰장(避雷杖)이 부착된 오토마톤 B 모델을 사용한다. 루트 가이드는 필요한가?”
갑자기 달라진 말투에 소녀는 놀랐지만, 그녀가 말을 건 쪽은 코넬리아가 아니었다.
“전부 숙지하였으니 필요 없다. 둘이서 가겠다.”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내 매듭을 따라서 오면 된다. 로드리.”
“알았다.”
대답을 하는 로드리. 방수 우의를 쓴 머리가 알게 모르게 살짝 끄덕여진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는지 앤시아는 “흠”하고 가벼운 기합을 넣고, 왔었을 때처럼 갈 때도 예고 없이 훌쩍 걸어 나갔다.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사라진 앤시아의 뒷모습을 보면서, 코넬리아는 로드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야. 여기서는 저 사람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위엄을 지키시기를, 경의사 님.”
“너까지 이럴 줄이야….”
떨떠름한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코넬리아는 순순히 고쳐서 말했다.
“로드리. 이번 작전은 앤시아가 담당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작전 수립과 개괄적 지시는 구군본부가 설계하였지만, 현장 통제는 앤시아 정위(正尉)의 역할입니다.”
“저… 두 분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요.”
큼큼, 헛기침한 마틴은 코넬리아 옆으로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참령님. 아까 앤시아 정위님과 대화를 할 때 ‘둘이서 가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다.”
“제생각에는 참령님과 경의사 님이 함께 이동할 거 같습니다만.”
“그 말대로다. 나와 경의사 님이 함께 이동한다.”
“그러면 저는 경의사 님을 어떻게 에스코트해야 하는 건가요?”
손바닥 뒤집듯 바로 쌀쌀맞게 말투가 바뀌는 로드리도 로드리였지만, 시비를 거는 거로 들려도 할 말이 없을 상황에서 대화를 그대로 이어가는 마틴도 대단했다.
그의 질문에 로드리는 바로 답하지 않고. 눈을 잠깐 감았다.
“잠시만.”
길어봤자 몇 초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눈을 뜬 로드리는, 약간의 미안함이 섞인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피뢰장을 부착한 오토마톤 B 모델은 두 명 이상 탑승할 수 없다. 작전 루트를 알고 있는 건 나니까, 내가 경의사 님과 이동한다. 공장에 도착한 후의 에스코트를 부탁한다.”
“예. 그건 이해가 됩니다. 이동 과정에서는 호위가 필요하지 않은 건지요.”
“그렇다. 조심할 건… 여신의 노여움뿐이지.”
로드리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 찝찝한 여운에 마틴이 뭐라고 말을 더하려는 때에.
「투둑- 투두둑—」
“으응?”
마치 도토리 열매가 떨어지는 느낌.
코넬리아는 무심결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방수 우의 위로 뭔가 특별한 게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건, 갓 떨어진 빗방울의 물기뿐.
“비다. 진짜로 비가 온다.”
“그렇습니다. 거센 비가 올 겁니다.”
중얼거리는 코넬리아에게 성실하게 답변하며, 로드리는 손가락을 튀겼다.
딱, 하고 관절을 퉁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대체 어디에 있었을지 모를 부하 하나가 달려왔다. 그는 부하에게 뭔가를 설명한 후 마틴에게 안내하였다.
“라이트 소위. 이 자를 따라가라. 당신은 앤시아와 함께 이동한다. 그녀는 조종이 매우 거치니까 혀를 깨물지 않도록 조심하라.”
“알겠습니다.”
“존 제르바 공장에서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럼.”
로드리는 주먹 쥔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빙긋 웃던 마틴도 주먹을 쥐고, 가볍게 그의 주먹에 퉁 부딪혔다.
“그럼, 이따가 뵙겠습니다. 경의사 님.”
꾸벅 고개를 숙이고 마틴은 로드리의 부하와 함께 안개 저 너머로 사라졌다.
“경의사 님은 나를 따라오면 됩니다.”
공손한 건지 건방진 건지 모호한 말을 하면서, 로드리는 코넬리아의 손을 잡았다.
비록 로드리는 군용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어도, 그 가죽 아래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의 질량감은 코넬리아의 얇은 손바닥으로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 자식 손이 이렇게 컸던가. 아니, 내가 이렇게 작아진 건가.’
코넬리아가 자조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지. 로드리의 손아귀는 인정사정없이 소녀의 손바닥을 짓누르듯 조여 왔다.
“으읏….”
자신도 모르는 새,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이런 실례를.”
로드리는 손에 쥐는 힘을 줄이면서도 말과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부득이한 신체 접촉을 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남자끼리인데, 읍.’
이 세상의 모든 말실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새어 나온다.
소녀는 황급히 왼손으로 입을 가려봤지만 이미 튀어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사이는 마치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괜찮습니다. 일일이 말실수를 바로 잡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경의사입니다.”
로드리의 단조로운 목소리.
“경의사가 붉은 단풍을 보고 파랗다고 하면 파란 단풍입니다. 경의사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고, 살아남으라고 명령하면 살아남아야 합니다.”
“아니, 나는 그러려는 게 아닌데….”
“네가 그러고 싶든지 말든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름 속에 반딧불이 돌아다니듯, 자욱한 안개 주위로 수많은 사람이 램프를 단 채로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후두두 쏟아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이 힘차게 땅을 때리면서 점차 그 세기가 강해진다.
「퓌이이익— 퓌익- 퓌이익——」
태엽을 사용하는 민간용이 아닌, 순간 출력과 최대 출력 모두 압도적으로 강력한 증기 기관을 장착한 오토마톤 B형이 희뿌연 안개 어디선가 예열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애매한 각오는 모두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나와 내 부하 동료들과 마틴은 물론 경의사인 너도.”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도.
정말 신기하게도.
머리 위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빗방울의 선율은 대화의 반주로 깔릴 뿐.
코넬리아의 귀에는, 로드리의 목소리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