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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화 〉3막 (下 - 1/2)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5) (65/111)



〈 65화 〉3막 (下 - 1/2)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5)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긴 하지. 친척 사이거든.”

간단한 답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대화는 코넬리아의 의도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뒤이은 앤시아의 질문은 소녀의 틈을 놓칠 기미가 없었다.

“친척이라. 먼 혈족은 아닌 건가? 로드리와 허물없이 대화할 정도이니 단순하게 왕래하는 사이는 아닌 거로 보였다만.”
“관찰력이 멋지네. 앤시아 씨. 언제부터 우리 쪽을 훔쳐보고 있었던 거지?”
“훔쳐본 적은 없다. 여기처럼 트여 있는 공간에서, 코니 양처럼 드러내놓고 떠드는 아이를 못 본 척할 수가 있을까.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그건 나도 동의하지. 내가 실수했어.”

소녀는 무의식중이라도 로드리와 마틴이 사라진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앤시아의 코끝만을 바라보았다.

미리 로드리와 맞추어둔 이야기—먼 친척 사이의 관계—는 순식간에 다 떨어졌다.

‘역시 수상하게 보였던 건가….’

코넬리아 혼자서 앞가림을 할 거라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술술 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말의 앞뒤를 확인하고도 남을 사람 앞에서, 조금만 툭 쳐도 와르르 무너지는 설정을 떠드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실수에서 바로 교훈을 얻어야 했다.

“나와 로드리의 관계는… 비밀로 하고 싶어.”
“비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닌지, 앤시아의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쉽게 말할 수 없다면 단순한 사이는 아니란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나는 시시콜콜하게 사생활을 떠드는 성격은 아니라서. 내 사생활이든, 남의 사생활이든.”

참말이든 거짓말이든. 불리할  있는 내용은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완전히 입을 다물어서는 대화가 끊어지니 적당하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유감스럽다.”

답을 피하는 소녀의 말 돌림을 들은 앤시아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난 정말로 코니 양과 로드리 사이의 관계가 궁금하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남의 사생활을 좋아하지 않는 숙녀분에게 설명해도 될까?”
“아~ 억지로 들려줘도 난 아무것도  말해줄 거야~!”

손바닥으로 귀를 막은 코넬리아는 일부러 안 듣는 시늉을 하였다. 밤톨만 한 여자애의 덧없는 저항을 바라보던 앤시아는, 피식 웃고 소녀의 머리에 장갑  손을 뻗었다.

“편견을 깨는 귀여움인걸, 숙녀분.”

혹시 머리를 벅벅 긁는 게 아닐까. 어깨가 조금 움츠러지는 코넬리아였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박력과는 정반대로 앤시아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상냥한 손길 너머로 이질적인 촉감이 퍼졌다.

‘어라라.’

가느다란 금속제 골격과 강삭(鋼索)이 연결되어 통통 튀듯 가볍게 울리는 공명음. 그 익숙지 못한 감각의 조각은 곧 하나로 합쳐져서, 소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의수(義手)다.

“코니 양. 나는 당신이야말로 로드리의 절친한 벗이라고 생각한다.”

검은색 가죽 장갑으로 숨기고 있는 의지(義指)는 마치 진짜 손가락인 것처럼 코넬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엷은 복숭앗빛으로 물든 소녀의 뺨과 턱선을 따라 훑듯 내려가던 앤시아의 손길은 금방 거두어졌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사생활을 물어보니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나는 로드리의 동료로서, 숙녀분과 로드리의 관계는 알아야 하는 정보라고 생각한다.”
“알아야 하는 정보.”

코넬리아는 앤시아의 마지막 문장을 의미 없이 되뇌었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해도, 그녀가 로드리와 동료인 것과, 로드리와 코넬리아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었다.

별 이유 없이 그저 호기심이 생겨서 알고 싶을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구원군 내부에서 정말로 코넬리아 자신의 배경 정보를 긁으려고 수를 쓰는 걸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전자인 거 같긴 했지만, 너무 숨기려고 하다가는 되려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도 모른다.

“응, 그렇지. 둘도 없는 친우지.”

로드리와 미리 말을 맞추진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자신—렉스 휴크레이—까지는 엮기 어려운 정도로.

적당히 코넬리아는 말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로드리와는 단순하게 친척이라고만 하기는 좀 어렵지. 아주 어릴 때부터 진짜 남매 사이인 것처럼 함께 놀았었거든.”

머릿속에서 단어의 씨실 날실로 문장을 짜내는 이 단순한 과정조차 지금의 코넬리아에겐 쉽지 않았다.

로드리와 형제 사이처럼 지내긴 했었다. 친하게 지낸다는 건 이런 의미였다.

그런데 자신과 로드리가 이제 와서 ‘남매’ 사이라니, 이렇게 말로 꺼낼 때 위화감이 느껴지는 게 어디 또 있을까.

“솔직히 나 말고도 로드리가 구원군에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귄 거 같아서 다행이네.”
“호오.”

앤시아는 짧게 감탄했다.

“나이 차는 상당히 있어 보인다만. 그래도 숙녀분이 어릴 때 로드리가 같이 놀았다는 건가.”
“상상하기 어려워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고. 못 본 사이에 몰라볼 정도로 내가 자랐으니까 지금은 안 그러지만.”

너스레를 떠는 코넬리아의 추억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실이라고 확신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어렴풋하고. 희무스레하고 아련한 감각의가닥이 둥글게 모인 실뭉치로 머릿속에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그 가닥의 뭉치를 되짚어서 살펴본들 원래의 기억 모습이 되살아나진 않았다. 어떤 빛깔의 추억이었는지, 그 정도는  수 있었다.

“로드리 얼굴을  건 꽤 오랜만이긴 하는데, 그래도 반갑긴 반가웠어.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말을 편하게 한 건 내 실수였던 거 같아.”
“말을 너무 편하게 하긴 했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인 앤시아가 넌지시 물었다.

“얼마 만에 만났길래, 그렇게 반가워한 거지?”
“바트나에서 머무를 때부터는 자주 보긴 했는데….”
“그 전에, 꽤 오랜만이라고 했지. 몰라볼 정도로 숙녀분도 자랐다고했고. 그러면 적어도 몇 년 정도는 못 봤다는 거로 이해했다만.”
“뭐어, 그런 거지.”
“그래? 이상하군.”

어느 순간부터 바뀐 걸까.

평범하게 긴장을 내려놓고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다. 앤시아의 말은 코넬리아가 꺼낸 허술한 말의 틈 사이를 후벼내기 시작했다.

“코니 양. 로드리가 올해 초에 장기 휴가를 적이 있었다.”
“올해 초?”

되묻는 게 아니라 놀란 나머지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렇다. 신년이 지난 직후였다. 고향에 일이 생겼다면서. 훌쩍 갔다가 훌쩍 돌아왔다. 일 개월가량.”

일부러인지 아니면 잘못 파악했는지 몰라도, 코넬리아의 질문에 앤시아는 자세한 내용을 덧붙여줬다.

“어떤 연유로 한 달 가까이 자리를 비웠는지 구체적인 건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 고향을 방문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렇게 친한 사이였는데 안 만났다는 건가?”
“으음. 연초에는 나도 사정이 있었으니까 엇갈렸나 보네.”

허둥대지 않고. 코넬리아는 침착하게 답변할 수 있었다.

자신이 특별히 감정 조절에 능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은 스스로도 진짜 궁금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들었어. 로드리가 고향에 왔었다는 거.”

올해 이른 봄. 아직 정원의 장미가 꽃을 피우기 전, 눈을 떠보니 소녀의 몸이었다.

  재활 치료를 하고 있던 사이에 몇 명에게 자신의 사정이 전달되었다는 걸 알았고, 그 가운데에 로드리의 이름은 당연하게 들어 있었다.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도움을 받은 일주일 전. 그때, 렉스는 몇 년 만에 로드리의 얼굴을 처음 봤었다.

자신은 처음이었는데.

로드리는 아니었다.

‘앤시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필시 로드리는 1월에 고향으로 왔다.’

단순히 사정을 알게 된 것과, 정말로 만난 적이 있었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로드리가 ‘고향에 생긴 일’—사형수였던 소꿉친구가 탈옥에 성공했지만, 어린이의 몸이 되어서 위장 신분을 지니게 된 일—을 언제 알았는지는, 실은 코넬리아도 정확히는 몰랐었다.

올해 1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했을 그때, 로드리가 자신에게 왔었을 가능성이 생겼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생면부지 여자의 입에서 먼저 듣게 되었다.

‘로드리가 고향에 왔었다는 걸 왜 나한테  알려준 거지?’

그가 비밀로 한 건 그렇다 치더라도, 할아버지나 졸업 동기, 심지어 재클린까지 자신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추측이 머릿속에서 쉼없이 솟아나려고 하던 바로 그 순간.

“흐음… 하여튼, 다행이군.”

짧게 한숨을 내쉬고, 앤시아는 슬며시 웃었다.

뭐가 다행이란 건지 코넬리아가 물어보려고  때. 벽 너머에서 마틴이 불쑥 튀어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말끔하게 고민이 풀린 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대화를 엿듣다가 나온 기색은 아니었다. 뒤따라 나온 로드리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앤시아는 로드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아닌 듯 보이는 인사치레에 담긴 의미를 마틴은 모르리라.

“라이트 소위의 소지품은 확인하였다. 발포 허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민간 지역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수고했다. 로드리.”

조금 전까지 느긋하게 수다를 떤 적이 없다는 양, 앤시아는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로비 후문을 통해서 9호실로 이동하도록. 로드리. 일행이 이동한 직후부터 현장 인계를 시작하겠다.”
“알았다.”

로드리는 코넬리아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가자. 코니 양.”
“어, 으응.”

별다른 생각 없이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코넬리아의 어깨 위에 올려진 로드리의 손을 치우는 다른 손이 있었다.

“참령님. 코니 양의 에스코트는 제가 하겠습니다.”

마틴은 로드리의 오른 손목을 정중히 붙잡은 자세로 말했다. 남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물론 정중하고 아니고를 따질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제가 돌아가는 길이니 그편이 낭비가 없지 않을까요.”

마틴의 말을 들은 로드리는 그의 손아귀를 털어내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구원군의 에스코트는 낭비가 아니다. 코니 양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귀빈이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구원군 일행들과 함께 이동하면 여기에 중요한 사람 있다고 자랑하는 모양새일 건데.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라이트 소위….”

머리가 조금 지끈거리는 건지. 로드리는 두 눈썹 사이를 손등으로 비볐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만. 우리가 9호실에 가는 건, 법무부 건물이 바트나 시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보호가 안전해서가 아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참령님.”

세상 부드러워 보였던 마틴의 얼굴에, 감추지 못한 당혹감이 드러났다.

「구원군은 당신을신뢰하지 않는다.」

로드리의 말은 누가 듣기에도 이런 의미가 있었다. 코넬리아는 점점 언성이 높아지려는 둘의 말을 잘랐다.

“저기, 잠시만요. 여러분.”
“아까 대화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참령님? 사나이답지 못하게?”
“공사를 분별할 줄 아는  귀군뿐만이 아니다. 불필요하게 체온을 올리지 마라, 라이트 소위.”

소녀의 혼잣말 정도는 가볍게 밟고 지나가는 둘. 그 대화를 듣는 코넬리아의 입술이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더 친해지기도 바쁠 시간에 뭐 하는 거냐고, 로드리….’

마틴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된다. 코넬리아는 로드리에게 확실하게 충고했었다.

 충고는 둘이서 사이 좋게 친구 먹으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양 시비를 걸라는 뜻은더더욱 아니었다.

“로드리, 그만 말해. 마틴 씨도 진정하시고. 예?”

옆에서 중재할 생각은 전혀 없이, 좋은 볼거리가 생긴 양 팔짱 낀 채 구경하는 앤시아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보면서.

진땀이 흐르는 얼굴로 코넬리아는 억지로 둘 사이를 떼어 놓았다.

“어차피 9호실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잖아. 응? 내 호위를 하는 정도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중요하다.”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기합이 들어간 거야. 둘 다…!”

마틴은 그렇다 치고, 로드리까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조금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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