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3막 (下 - 1/2) 이 숙녀가 우리의 빛인가 (4)
서늘한 금속 반지의 감촉이 손가락을 실처럼 감싼다. 왼손을쥐었다 폈다 해보았지만, 표징이라고 해서 특이한 감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별로 특징이 있는 반지는 아닌 거 같네.”
“그런가. 역시 외부인에겐 그렇게 보이는 거로군.”
“응?”
뭔가 신경 쓰이는 말을 한 로드리에게 코넬리아가 질문을 던지려던 때에. 저만치에서 누군가가 일직선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박살 난 로비 정문에서부터 걸어와 접수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그녀는, 가슴을 쭉 펴듯 어깨를 옆으로 넓게 젖혔다. 그리고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을 허리에 올렸다.
“외부 수습은 끝났다. 로드리. 장소 이동은 후문으로 진행한다.”
허스키한 목소리인 여성은 로드리와 엇비슷한 키에 로드리와 같은 제복 차림. 오른쪽 어깨너머로 내려와 가슴을 타고 넘는 먹빛의 땋은 머리는 그녀가 호흡할 때마다 부드러이 흔들거렸다.
“외부 소란 중 부상자는 경중에 따라 시립 병원과 진료소로 소개(疏開)시켰다. 교전 중 사망한 보안요원의 유해도 곧 유가족에게 인도할 예정이다.”
“민간인 사망은 그 둘이 전부인가.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고위험 계약 근무자의 사망 보험 처리는 시청에서—”
무미건조한 로드리와 여성의 대화. 단어 나열을 흘려보내듯 귀에 담던 코넬리아는 마음속 한구석이 따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근처에는 보안요원의 핏자국이 흩어져 있다. 직전까지, 코넬리아는 그들의 죽음과 같은 시간과 공간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우편집중국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살 수도 있었던 자들.
그 희생을 무겁게 여기기는커녕 아무래도 좋을 만큼 가벼이 넘기고 있었다.
‘원래 내가 이랬던가….’
이 초토화가 된 로비에서 죽음의 냄새에 둔감한 건 코넬리아뿐만이 아니다. 군에서 이름을 떨쳤다는 마틴이나, 바트나 시의 치안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는 구원군은 그럴 법했다.
만약 보안요원이 아니라 자신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로드리는 얼굴을 한 번 찡그린 다음 제 소속에서 제 할 일을 했겠지.
그리고 저들처럼 숨을 거둔 사람을 본 경험이라면, 렉스 휴크레이도 일반적인 시민보다는 훨씬 많다.
이런 사실이 코넬리아 자신이 지금처럼 죽음을 쉽게 넘겨도 된다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 정도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상황 전달은 이 정도로 하고.”
코넬리아의 고뇌와는 상관없이. 로드리와 동료 사이의 대화는 끝나가고 있었다.
“숙녀분과 특무부 소속 일행이 이동하면, 그 후에 지역 경찰에게 현장 통제 권한을 이양할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알았다. 그 후에는 본부에서 말했던 대로 움직이지. 앤시아.”
로드리의 말에—앤시아라고 불린—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코넬리아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표징을 절대 몸에서 떨어뜨리지 마시길. 레이디.”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몸에서 떨어뜨리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울것 같았지만, 코넬리아는 대꾸하는 대신 그저 숙녀에 걸맞은 미소를 지었다.
“응. 숙지할게. 앤시아 씨.”
“흐음….”
앤시아는 코넬리아를 노려보면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 눈빛에 불만스러움이 일순간 스쳐 가는가 싶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로드리. 용건은 처리하였는가?”
“그러잖아도 그 때문에 할 말이 있는데. 잠시만 귀 좀 빌리겠다.”
로드리가 살짝 손짓하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닌지 앤시아는 접수대에 기댄 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왼손을 펼쳐 입을 가린 로드리는 그녀의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짧은 귓속말은 금방 끝났다.
말을 마친 로드리가 뒤로 물러서자마자, 앤시아는 저 멀리 접수대 입구로 빙 둘러 와서 코넬리아에게 다가왔다.
“잠시 후 장소 이동에 대해서는 로드리가 여러분을 안내하겠다. 그 전에 나, 앤시아가 여러분의 소지품을 잠시 확인하는 과정을 가지겠다.”
“저는 거부하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나온 마틴의 즉답.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짓진 않았지만, 뒤로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코넬리아는 내심 놀랐지만, 앤시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법률적인 권한은 우리에게 없으니. 구원군의 입장에서 억지로 확인하지는 않도록 하겠다.”
이미 예상하는 답변이었는지 그녀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만… 로드리는 보호자 입장에서 알아보고 싶다는데. 직위 내려놓고, 남자 대 남자로.”
앤시아의 입에서 나온, ‘남자 대 남자’라는 말. 여기에 담겨 있는 의도는 뻔했다. 사회적 위치 따위는 벗어 던지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노골적인 도발이다.
적어도 전날 로드리가 코넬리아에게 던졌던 밑도 끝도 없는 도발보다는 훨씬 적절했다.
단지 그 자존심이 세워지는 재료로 쓰인 게, 소녀인 코넬리아 자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앤시아의 옆에 선 로드리가 거기에 한술 더 뜨면서 말을 얹었다.
“내가 직접 확인하려는데. 협조를 부탁한다. 마틴.”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일부러 이름으로 부르는 그를 노려보면서,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가지고 있는 화기(火器)는 이미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당신이 보여준 화기만 알고 있는 거지. 보여주기 힘들 정도로 위험한 소지품이 있는 것인가?”
“그런 건 없습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 보여줄 의무는 없습니다.”
“나도 의무가 있어서 확인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니 부탁을 하는 거다.”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눈코입의 정배열이 흐트러지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
잠깐 로드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틴은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내 포기했다.
“하긴… 당신이 여기서 절 속여서까지 얻을 이득은 없겠군요.”
작은 한숨을 쉰 마틴은 치켜 세워든 엄지로 접수대 너머의 벽을 가리켰다.
“남들 눈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죠.”
“고맙다. 앤시아는 코니 양을 확인하도록.”
그렇게 말한 로드리는 마틴과 함께 둘의 옆을 지나치면서 앤시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는 로드리 못지않은 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내가 대신 ‘소지품’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코니 양.”
그러더니 거부할 틈도 없이, 마치 뱀처럼, 앤시아의 손이 코넬리아의 구석구석을 훑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
무언가가 들어가 있을 법한 주머니란 주머니에 손길이 들어갔다가 빠져나가고. 바로 그다음 헐렁한 옷섶 너머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간지럽히는 것처럼 그녀의 손끝은 옷을 파고들어 살갗까지 쓰다듬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아핫, 핫하, 아하하핫~!”
최대한 소리를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건 견디기 어렵다. 이윽고 손길의 감촉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눈에 눈물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하앗, 하… 끄, 끝난 거야…?”
코넬리아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얼굴을 들었다. 소녀의 눈앞에서, 앤서니는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살짝 흔들었다.
“소지품 검사에 협력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숙녀분.”
주먹 쥔 틈 사이로, 코넬리아가 우편집중국에서 가져왔던 헝겊 주머니의 귀퉁이가 삐져나와 보인다.
“로드리의 부탁은 나, 앤시아가 대신 집행하였다.”
그걸 그대로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앤시아는 아까 전까지 마틴이 머물렀던 의자에 앉았다. 코넬리아와 눈빛이 마주친 앤서니는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이제 로드리가 돌아올 때까지 편하게 있으면 된다. 코니 양.”
“아하….”
그녀가 로드리로부터 어떤 귓속말을 들었는지. 말은 하지 않았어도 코넬리아는 짐작할 수있었다.
‘로드리가 나를 속여서 얻을 이득이 없다’는 마틴의 생각이 아예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로드리는 정말 마틴에게서 뭔가를 얻어내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로드리가 원하였던 건 마틴의 시선이었다.
이 짧은 시간에 궁리해서 회수한 건, 그만큼 급하고 중요하다는 거지. 소녀는 특수 사서함에서 바로 찢어서 파기하였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로드리의 앞으로 보내진 소포였지만 그 편지는 로드리가 아닌 자신에게 쓰여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손톱 만한 알맹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재클린과 구원군 사이에서는 이미 정보가 오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중간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기는 했어도, 편지와 함께 담겨 있던 헝겊 주머니를 구원군에게 전하는 걸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소지품’은 자신의 손에서 떠났으니, 이후의 일은 구원군들의 몫.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대화를 전환하였다.
“저기, 앤시아 씨.”
“뭔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말을 들은 앤시아는, 습관적으로 땋아 내려진 먹색 머리칼을 장갑 낀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뭐든지 물어봐라. 답변할 수 있는지아닌지는 내가 판단하겠다.”
“그렇게까지 거창한 질문은 아닌데….”
심각한 분위기의 강약 조절이 잘 안 되는 것까지. 앤시아는 여러가지 면에서 로드리와 닮은꼴이었다.
“당신은 로드리와 친구 사이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질문이었는지.
소녀의 말을 들은 앤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구, 라.”
“응. 친구.”
“직업상 동료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친구 사이다.”
“그럼… 사적인 관계에서는 어때.”
“몸을 섞은사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코넬리아는 헛기침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앤시아의 얼굴에 비로소 사람 다운 감정이 한가득 담긴 걸 보고 나서야, 코넬리아는 이 여자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얄미울 정도로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앤시아는 눈꼽만큼도 미안해 보이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미안하다. 있는 집안의 아가씨를 놀려보는 게 일생의 소원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놀라운 일의 연속이군.”
초승달처럼 둥근 곡선을 그리는, 맑은 남색 빛 눈동자를 깜박이며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 로드리가 코니 양한테만 완전히 쩔쩔매는데, 숙녀분과 로드리가 무슨 관계인지 이쪽이야말로 깊은 호기심이 생긴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