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7)
정거장 앞 광장에서 코넬리아는엘리자베스와 악수를 하였다.
“여기서 ‘일’을 마치는 대로, 이륜마차를 타면 알아서 9호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소녀가 엘리자베스에게 설명한 일이라는 건, 공중전화를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민영 회사에서 운영하는 초창기 설비는 최대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집중해서 부스를 세우고 있었고, 동부 정거장은 그 대표적인 장소 중 가장 크고, 가장 가까웠다. 일단 정거장에 온 이상 특별한 안내는 필요 없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곳이 바로 공중전화가 있는 곳이다.
“정말 괜찮은 거지?”
“베스 씨가 너무 걱정하셔도 거꾸로 화가 나는걸요. 베스 씨의 눈에는 제가 그저 믿음직스럽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합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로드리한테 분명히 그 9호실이라는 건물까지 배웅하라고 부탁을 받았는데.”
엘리자베스가 머뭇거리는 건, 거꾸로 그녀가 ‘9호실’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거도 운이 좋은 거라고 해야 할까.
나름대로는 코넬리아를 배려한 로드리가 들으면 섭섭한 소리겠지만, 지금은 모처럼 코넬리아가 혼자서 돌아다닐 기회다. 그저 소녀가 모처럼 외출하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 행여나 심각하게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녀—엘리자베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쁜 일은 나의 몫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 코넬리아는 억지로 엘리자베스를 떠밀어내었다.
“괜찮아요. 오늘 고마웠어요! 숙소에서 푹 주무세요! 푹!”
“그럴까? 음… 역시 그래야겠지?”
계속 머뭇거리던 그녀도 코넬리아의 형태를 가리지 않는 압박은 버티지 못했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도 결국 노면열차정류장으로 향하는 엘리자베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아. 그러면 이제부터.”
소녀는 자신에게 주문을 외우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디아 광장」이란 글자를 검은 철판에 양각의 황금색 문자로 도드라지게 새긴, 거대한 이정표가 마치 나무처럼 세워져 있는 광장의 중심으로 향했다.
동서로넓게 뻗은 직사각형의 광장. 양 모서리에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세월의 녹이 슬은 4개의 청록색 동상은 광장의 중심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그들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엔 넓은 분수대가 있다.
그리고 그 분수대의 중심에는, 목이 잘려나간 석상 하나.
원래는 그 앞을 그냥 지나쳐 가려고 했던 코넬리아는, 걸음을 돌려서 분수대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앞발을 치켜들고 서 있는 말에는 늠름한 체형인 남자가 올라타고 있었다. 비록 머리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 풍채는 여전히 당당했다.
그 남자는 아마도 과거에 이 도시의 정점에서 국가를 지배하였던 어떤 왕의 흔적일 것이다.
‘이쪽도 조각상은 화려하긴 하네.’
수도 앨버스에서 완성도가 높은 조각상은 흔히 볼 수 있다. 어디 조각상뿐이랴. 도심의 각종 건물과 조형물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에서는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숱한 석상을 보아왔던 코넬리아에게도 이 커다란 조각상이 주는 압도적인 풍채는 보통이 아니었다. 소녀는 분수대 앞에 자그맣게 세워져 있는 설명문에 시선이 향했다.
거기에는 『연합 왕국』이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일이 되기 전, 거대한 항만도시 ‘바트나’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거 남저도(南低島)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바론트 왕국의 수도, 바트나. 통일 후 수도가 북쪽으로 옮겨지자, 옛 왕족들이 사용한 근대적 건물 설비는 민간으로 매각되었다.
“‘지금 이 분수대와 광장과 조각상을 포함하는, 「바트나 동부 정거장」도 그중 한 곳이다’…… 흐음.”
바트나 쪽으로는 경의사 업무를 하면서 우선순위가 낮은 도시였기에, 그다지 사전 조사가 꼼꼼하지 않았다. 코넬리아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분수대를 올려다보았다.
“어차피 꼼꼼하게 했더라도, 광장과 정거장의 역사 따위는 눈에 안 들어왔겠지.”
주변 관광객을 보던 코넬리아는 동전 지갑을 꺼내어 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동전 하나를 꺼내어서 분수대 안으로 튕겨 던졌다.
부디,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기를.
코넬리아가 마음속으로 빈 소원과 함께, 퐁당- 하고 작게 물방울의 왕관을 그린 동전은 투명한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먼저 잠수하고 있는 수많은 동전 선배들은 방금 소녀가 던져 넣은 것처럼 싸구려 동화(銅貨)가 대부분이었지만 드물게 금화나 은화처럼 보이는 것도 점점이 섞여 있었다.
‘잘 좀 부탁할게. 댁이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제일 궁금했던 게 빠져 있는 설명문을 가볍게 툭툭 차고, 소녀는 색안경을 고쳐 썼다.
정거장으로 들어가는 로비 정문은 광장의 중심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는 녹색 선을 따라서 가면 된다. 만약 코넬리아가 이대로 철도나 비행선으로 줄행랑을 치고 싶었다면 그곳으로 갔을지 몰라도.
지금 소녀가 향한 곳은 매표소가 있는 정거장 로비가 아닌, 그 바깥에서 길게 사람들이 줄을 선 쪽이었다.
많은 사람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줄의 끝이 향하고 있는 건 정거장 본관에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 외벽. 그 벽에는,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 공중전화 부스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높은 수요 덕분에 줄은 빠르게 길어지고, 비싼 요금 덕분에 빠르게 줄은 짧아진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코넬리아는 생각보다 금방 수화기를 잡을 수 있었다.
“흠흠~ 흐흠~”
재클린이 흥얼거렸던 멜로디를 입으로 적당히 흥얼거리면서. 투입구에 동전 몇 닢 넣은 코넬리아는 적당하게 다이얼을 돌렸다.
“[-바트나 전화교환국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코넬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님?]”
의아한 듯 되묻는 전화 교환수.
소녀는 입을 다문 채 잠깐 동안 뜸을 들이면서, 주의 깊게 앞을 바라보았다.
코넬리아의 앞.
공중전화 부스가 설치된 벽면에는 거울이 있다.
사람이 몰리는 시간마다 줄이 길어질 때, 자신의 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려준다. 거울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령, 지금 코넬리아처럼. 누군가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할 때에 쓰는 수도 있다.
‘분명히… 아까 방풍림 공원에서 봤던 사람이군.’
동부 정거장에는 수많은 행인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만약 마음먹고 기척을 숨겼다면 코넬리아도 바로 알아보진 못했으리라. 상대가 방심하고 있는 건 순전히 행운이었다.
지금 소녀를 지켜보는 사람은 코넬리아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매부리코에 검은 구레나룻이 수북한 청년 하나. 이 더운 날씨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기다란 코트 차림. 말쑥한 옷차림은 주변과 섞이면 쉬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굳이 특징을 찾는다면, 챙이 짧은 모자를 눌러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자 아래로 삐져나오는 새까만 머리칼 정도일까.
가로등에 기대어 선 채 그는 아까 공원에서 산 게 분명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소녀가 있는 쪽을 노골적으로 지켜 보고 있었다.
얕잡아 보이는 거지. 코넬리아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다. 한 손으로 수화기를 든 채, 소녀는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날씨가 맑네요.”
“[-예?]”
“수도에서는햇빛 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언제나 안개가 꼈고 언제나흐렸죠. 바트나는 언제나 맑아요. 그게 정말 마음에 드는 도시입니다.”
전화 교환수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마치 친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코넬리아는 말을 이었다.
“저는 할 말이 없으면 날씨 이야기를 꺼내거든요. 실례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예, 예에. 감사합니다.]”
딸깍.
통화가 끝난 수화기를 전화기 박스 위에 올리고, 코넬리아는 부스에서 나왔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광장을 가로질러, 분수대 석상의 거대한 엉덩이를한 번 살펴보고, 큰길로 향하면서, 미행 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로변에 도착하자마자 코넬리아는 왼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서 입에 물고 휘파람을 풀었다.
「휘이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공기를찢기가 무섭게, 이륜마차 한 대가 곧장 다가왔다. 가볍게 마차에 올라탄 소녀는 목적지를 말했다.
“우편집중국(郵便集中局)으로.”
“우체국이 아니라 집중국 말씀이십니까요?”
마부가 되묻는 건 괜한 오지랖보다는, 혹시라도 잘못된 목적지가 아닌지 다시금 확인해보기 위한 절차였다. 코넬리아는 목걸이에 걸린 열쇠를 품속으로 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랴!”
마부는 힘차게 고삐를 당겼다. 히히힝- 하고 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륜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적갈색 펠트 모자를 쓴 마부가 말을 재촉하는 걸 뒤에서 지켜보던 코넬리아는, 마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아저씨?”
“예! 손님!”
손님이 어떤 부탁을 할지 기다리는 마부에게, 소녀는 여태까지 그가 들어본 적 없는 질문을 던졌다.
“당신 모자는 얼마쯤 하지?”
얼마 동안 달렸을까.
포장도로를 달리던 이륜마차의 속도는 천천히 느려졌고, 이내 한 건물 앞에서 멈추어 섰다.
수 층 높이인 고전 양식의 석조 기둥이 입구부터 드높게 세워져 있는 건물. 세상에서 사라진 바론트 왕국의 영화(榮華)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인제 와서 짓기에는 터무니없이 화려한 건물 앞에는 수많은 마차가 들끓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멋들어져 보이는 이곳이 「바트나 우편집중국」이라는 걸 모르고 찾는 관광객도 적잖이 있으리라. 코넬리아는 마부의 옆거울로 마차의 뒤편을 보면서 말했다.
“이런 곳에는 텃세도 심하겠군.”
“하하. 그렇습죠.”
비싼 비용에 걸맞은 손님을 태울 고급형 사륜마차. 한두 대가 아닌 사륜마차가 줄을 지어 서 있는 광경에 비교해보면, 소녀가 타고 있는 자그마한 이륜마차는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다.
“저기. 저기에 내려줘.”
그렇게 마차와 마차 사이의 좁은 틈을 가리키는 소녀. 좀 전까지 또래 여자들이나 쓰는 보닛을 쓰고 있었던 코넬리아의 머리, 그 위에 있는 건, 긴 챙이 앞으로 길게 뻗어진 적갈색 펠트 모자.
즉 마부가 쓰고 있었던 모자였다.
발목 근처까지 내려왔던 치마는 무릎까지 접어서옷핀으로 고정했다. 사금빛 머리칼은 동그랗게 뒤쪽으로 올려 묶어서, 멀리서 얼핏 얼굴만 보면 얼굴선이 부드러운 소년처럼 보일 정도.
재킷 위로 두르고 있던 감색 숄도 앞뒷면을 뒤집어서 회색빛 면으로 허리에 묶었다.
‘이 정도면 잠깐 정도는 따돌릴 수 있겠지?’
속으로 자화자찬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삯을 넉넉히 마부에게 지급하고, 이륜마차에서 서둘러 내렸다. 커다란 마차 사이의 틈새로 내린 소녀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우편집중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