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4)
* * * * *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돌아간 지부에는, 조금 전에는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미스 코니. 접수 안내인의 무례함에 사과를 드립니다.”
한 눈에도 체형을 관리한 거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짧게 자른 반듯한 흑갈색 머리칼에 포멀한 단색 정장 차림. 코넬리아를 바라보는 그는 오른쪽 눈에 단안경(單眼鏡)을 쓰고 있었다.
“지역 지부는 언제나 귀빈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여러분을 모시겠습니다. 코니 씨. 그리고 이쪽 분은….”
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형식적인 미소로 화답하였다.
“베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면 베스 씨. 그리고 코니 씨. 저와 함께 지부장실로 가겠습니다. 이 본관 삼 층으로 가야 하는데 승강기는 별관 쪽에 있습니다만.”
새 안내인의 말에 코넬리아는 즉답하였다.
“계단으로 올라갈게요. 괜찮습니다.”
고작해야 3층 높이의 건물이라곤 하더라도, 승강기를 설치하는 건 일종의 ‘유행의 최첨단’을 상징하는 지표였다.
설계 당시 처음부터 화물 운송용 리프트라도 설치하지 않았던 건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 옆에 임시 건물을 세우거나, 보통 전통이 있는 본관 바로 옆에 붙은 별관을 이용해서라도 기어이 승강기를 설치해냈다.
이제 건물에 올라갈 때 승강기를 사용하는 건 ‘격식’의 영역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코넬리아든 엘리자베스든,굳이 그런 데에 얽매일 성격은 아니었다.
“예. 그러면 발밑을주의해서, 저를 따라오시길.”
몸을 숙이는 새 안내인. 그의 허리춤에 늘어진 시곗줄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타운하우스 3층으로 올라가는 원형 계단은 호화로운 마호가니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코넬리아는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로비 층부터 3층 위 옥상까지 막힘벽 없이 연결된 원형 계단의 끝, 새하얀 천장에는 둥글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다.
그리고 벽면을 따라서도 한눈에 시가지를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해가 지기 전에는 자연 채광만으로도 계단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구조. 그 가운데의 계단을 따라 빙글빙글 올라간다.
도착한 3층에는 넓은 복도의 양옆으로 여러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늘어져 있었고, 안내인이 둘을 안내한 건 복도의 마지막에 있는 커다란 문 앞이었다.
“안내인 씨.이거 맡아줘.”
코넬리아는 머리에 쓰고 있던 보닛과 함께, 색안경을 벗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공손히 그것들을 받은 안내인이 노크 후 문을 열어줬다.
넓은 공간이 허전하지 않도록 각종 가구와 장식물을 아낌없이 채워 넣은 지부장실. 그 안에서 응접 테이블의 곁에 선 채 둘을 반긴 지부장은, 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자였다.
땅딸막한 키는 간신히 코넬리아보다는 조금 더 커 보이는 정도. 양손에 과시적으로 끼고 있는 금반지는 하나하나가 손가락 마디 반은 가릴 정도로 커다랬고, 훤칠한 이마 끝의 포마드 머리칼은 뒤로 바짝 넘겨져 있다.
세모꼴로 좁은 얼굴에서 위로 치켜 올라간 눈매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에게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특유의 지루한 분위기가 풀풀 풍긴다.
“외모로 선입견을 품으면 안 되겠지만….”
코넬리아의 귓가에 입을 대고, 작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좀 밉상이기는 하다.”
“동의합니다.”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인으로 방문한 자신의 시선에도 그렇게 보이는데, 여러모로 안 좋은 감정이 쌓인 엘리자베스는 오죽할까 싶었다.
“반갑습니다, 코니 바로우 양!”
둘의 대화를 못 들은 듯. 그는 딱 봐도 연기를 하는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미스 코니. 그리고 그쪽의 그… 구빈원 아가씨?”
“베스입니다.”
“베스. 응, 그래.”
건성으로 흘려들은 지부장은 얇고 길게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제 소개를 하자면, 저는 바트나 시에서 십 오 년 전부터 지역 지부장을 맡은제이슨 호스론입니다.”
“반갑습니다. 제이슨 지부장님.”
코넬리아는 태연스럽게 그와 악수를 했다.
“편하게 앉으시길. 미스 코니.”
그가 코넬리아를 정중하게 대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바로우 가문의 영애가 어째서 이런 곳에….’
그가 삼십 분이라는 시간을 벌면서까지 고민하였던 건, 기어 카드를 읽혔을 때 노출이 된 코넬리아의 신분 때문이었다.
아무리 여기가 수도에서는 가장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이라고는 해도,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를 배출하면서 권세를 유지하고 있는 바로우 가문에 대해서는 익히 여러모로 들어온 게 있었다.
그 정보가 그저 소녀가 가지고 있던몇 가지 더미 신분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지금의 그는 알 턱이 없었다.
‘의원 면허까지 땄으니 똑똑하긴 하겠지만… 그래 봤자 세상 물정은 어두운, 정의감에 가득 찬 아가씨일 뿐이지.’
자기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탄탄하진 않다는 건, 누구보다도 그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감은 일단 줄이고 봐야 했다. 제이슨은 웃으면서 말했다.
“함께 오신 동행인으로 짐작해보겠습니다. 구빈원일로 오셨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지부장님. 실은—”
코넬리아가 막 물어보려는 찰나에, 그는 손을 세워서 말을 멈췄다. 얼핏 무례함으로 여겨지고도 남을 행동이었다.
“저 사람. 저희의 대화를 같이 들어도 되는 겁니까?”
그에게 지칭을 당한 엘리자베스를, 소녀는 슬쩍 보았다. 그의 노골적인 도발에 그녀는 쉽게도 넘어갔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엘리자베스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코넬리아가 먼저 대화의 선수를 쳤다. 제이슨은 입으로는 웃으면서도 눈은 웃지 않았다.
“크크, 사정이 있으니까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겠죠. 예. 말씀하세요.”
“바트나 시립 구빈원의 의료 지원 요구를 이곳, 지역 지부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였습니다.”
언젠가 꺼내야 할 질문이었다. 굳이 감출 것도 없이, 코넬리아는 바로 대화의 테이블에 올렸다.
“구체적인 정황은 확인하고 온 겁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러신 건지, 이 아가씨분이 너무나도 궁금해하시길래 함께 왔습니다. 물론 저도 궁금합니다.”
코넬리아의 말은 간단했다.
도와달라고 하는 요청을 왜 무시했냐.
제이슨이 답하는 내용에 따라서 코넬리아와 로드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 간략한 계획 정도는 진작에 세워두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제이슨의 입에 달려 있었다.
“흠…. 이거야 원….”
코넬리아와 엘리자베스가 면담을 요청했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한 질문이었는지,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제이슨은 한쪽 눈썹을 올리면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저희 지역 지부에 대해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오해? 지금 오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울컥한 건 코넬리아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였다. 그런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혀를 쯧쯧 차고, 제이슨은 불쾌한 양 얼굴을 찡그렸다.
“미스 코니. 이런 사람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대화를 할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기, 베스 씨.”
코넬리아는 제이슨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엘리자베스의 손등을 꼬집었다.
“제가 드렸던 부탁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무조건 긍정하기.
“저와 지부장님의 대화를 그저 지켜만 보세요. 아셨습니까?”
“…알았어.”
마지 못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무시하고, 제이슨은 말을 이었다.
“이제 그러면 다시 대화를 진행해 볼까요? 미스 코니. 다소 오해가 있으신 듯한데, 바트나 시는 이미 콜레라의 전파를 막으려는 조치를 하고 있습니다.”
“조치라니. 어떤 노력인지 궁금하군요. 지부장님.”
코넬리아는 옆으로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였다. 그대로 엘리자베스에 기대어 체중을 실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시립 구빈원에는 꽤나 소홀한 대응을 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좁은 도자기 안에서는 그보다 좁은 구멍밖에 보이지 않죠. 저희는 훨씬 넓게 보고 대응하는 중입니다. 가령.”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선 제이슨은 업무용 책상에서 접이식 지도 하나를가져왔다. 그것을 테이블 위에 펼치니, 꽤 넓은 응접용 테이블을 꽉 채울 정도로 넓었다.
바트나 시를 상세하게 나타내고 있는 대축척 지도. 그중에서 그는 한 곳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시립 구빈원을 포함하고 있는 북구 쪽 주거 지구의 상수도원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 바로 여기. 라인슬링 민영 수도 회사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붉은 색연필로 가위표가 그어져 있었다.
“이곳을 강제 휴업 조치시켰습니다.”
“호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민영 회사에 마음대로 내리기는 어려운 조치였습니다만, 저희지역 지부는 바트나 시청과 긴밀하게 협조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코넬리아는 지도를 살펴보면서 말했다.
“현재는 다른 수도 회사가 북구에 상수도 공급을 하는 거군요.”
“그렇죠!”
제이슨은 무릎을 경쾌하게 탁, 쳤다.
“어마어마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시청과 협조하여서, 상황을 파악한 즉시 휴업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게 언제냐면 구빈원 지원 요청이 온 바로 그 날입니다.”
“흐음—”
코넬리아는 맨들맨들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조치 자체는 잘하셨네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지역 지부에서 많은 인력이 이미 북구 쪽 공공 의료소에서 진료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맞는 판단입니다. 지역 지부가 마땅히 해야 하는, 적절한 대응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소녀는 제이슨에게 재차 물었다.
“그래서 구빈원은 왜 도와주지 않으신 건가요?”
“다시 또 그 질문….”
제이슨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흥건하게 젖은 손수건을 거칠게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곧 사무적인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그걸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답니다, 미스 코니.”
또박또박.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어른처럼. 그는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제 설명은 오로지 코니 바로우 양의 가문, 바로우 가(家)에 대한 예의를 담아 드린 겁니다.”
“그렇습니까. 뭐어, 그렇겠죠.”
자신만만한 제이슨의 말에 틀린 내용은 없다. 일반 의원 자격으로 왕립 의학회 지역 지부장과 면담을 할 수는 있어도, 의원의 여러 질문에 지부장이 성실하게 답할 의무는 전혀 없었다.
그의 말, 그대로.
오히려 제이슨 입장에서는 무상의 선의를 베푼 것과 다름이 없다.
“바트나 시의 공공 보건을 위한, 저희 지역 지부의 헌신이 올바르게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전달 받았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부장님.”
그의 말에 긍정하면서 코넬리아는, 옆에 앉은 엘리자베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다른 지역에 속한 의원이 주제넘게 바트나에 참견할 순 없겠죠. 암요.”
그녀의 손 위에 코넬리아는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개었다.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는 문장을 구사하는 코넬리아의 앞에서. 제이슨은목구멍 깊숙한 곳, 마음속에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구빈원 놈들, 건방지게 밖에서 성가신 녀석을 끌어들이다니….’
어중이떠중이라면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을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어린 귀족 영애가 의원 자격으로 방문하였다고 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놀랐지만.
‘그래 봤자 겨우 이 정도라는 거지.’
“큭큭….”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면서, 진짜로 웃음소리를 입 밖으로 흘리는 제이슨.
그를 잠자코 바라보던 코넬리아가 입을열었다.
“이번 일을 수습하는 지부장님의 견해에 대해, 개인적인 호기심이 하나 있습니다.”
마냥 사람이 좋아 보이게 헤실헤실 웃는 건 재클린이 제격이다.
부드러움 속에서—의도를 하든, 딱히 의도하지 않든—제 몫은 알아서 싹싹하게 해내는 스타일.
그런 건 코넬리아에겐 어려웠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지부장님. 왕립 의학원 후배로서 선배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음? 제 견해…라니, 어떤 견해를?”
코넬리아는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진 제이슨에게 별 거 아닌 양 낚시대를 던졌다.
“콜레라에 걸리는 사람들은 어떤 자들인가~ 에 대해서 말이죠.”
그 말에, 제이슨은 떨던 다리를 멈췄다.
“콜레라에 걸리는 사람들?”
말을 멈춘 그의 얼굴에 좀상스러운 미소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