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3)
“억양이라면 그 정도는.”
안내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도 억양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 하지만 지금 당신의 말은.”
“코니.”
“코, 코니 씨의 말은 앨버스 억양을 쓸 뿐이었잖습니까.”
서너 세대 전에야 간신히 하나의 국가로 통합이 된 연합왕국에서는 그 영토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지역 억양이 존재한다. 바트나 정도의 대규모 도시가 되면 마치 용광로처럼 여러 억양을 집어삼키게 된다.
뒤섞인 억양과 말투만으로는 고향이나 신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안내인의변명이 전혀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는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불행한 일은—그는 몰랐지만—접수원은 눈치를 챈 게 있었다는 것이었다.
“바트나에서는 모를 수 있지. 그래도 도어맨이라면 알아야 하는데….”
혀를 차면서 말한 소녀의 입술 끝에서 부서지는 파열음(破裂音), 문장 마지막 어절에서 미묘하게 내려가는 악센트 등등.
코넬리아가 일부러 쓰고 있었던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특유의 억양은, ‘한 국가의 귀족 자제들만 모이는 기숙학교’라는 폐쇄적 환경에서 탄생했다.
여러 지역의 가문이 모여서, 수도 앨버스 안에서도 자신들만을 특징 짓는 공통된 말의 습관을 만들어낸다. 그 습관은 자연스레 선배에서 후배로, 시대를 넘어서 이어진다.
듣는 사람은 한 번 귀에 익으면 그 차이점이 쉽게 분별 되고, 말하는 사람도 한 번 입에 익으면 좀처럼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걸 안내인에게 친절하게 가르쳐줄 생각은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튼,”이라고 소녀는 대화를 돌렸다.
“난 베스 씨와는 달라. 무례한 사람에게 예의 베풀 정도로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니거든.”
코넬리아는 턱 끝으로 로비층의 그늘진 쪽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넌 저기 구석으로 꺼져서, 나와 내 친우(親友)에게 다시는 그 더럽고 불결한 입냄새를 풍기지 마.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도.”
“예, 예에?”
“뭐?”
우물쭈물 하는 안내인에게, 코넬리아는 귓가에 손을 대고 귀를 기울이는 시늉을 하였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은 건가, 아니면… 네 귀가 어두운 건가?”
그 말을 들은 경비원의 안색은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말없이 멀어져 갔다.
고작 몇 분 전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면서도.
“다시 봤어. 코니 양.”
축 늘어진 안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이렇게 남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어? 아무리 그렇다고 지금—”
“베스 씨. 잠깐만 함께 산책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올라가기 직전, 이번에는 소녀가 엘리자베스를 끌고 로비층에서 나왔다.
지역 지부 건물에서 다시 밖으로 향한 둘은, 남은 삼십 분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천천히 걸음을 걷기 시작한다.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는 모르면서도 서로 나란히 서서 보폭을 맞추었다.
“베스 씨. 지금 저는 먼 길 둘러서 가는 대화를 할 인내심이 없습니다. 이건 정원을 가로지르는 지름길 같은 거예요.”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의 한복판에 흙발 자국이 마구 남는, 다른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거리.
이런 짓이 용서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철없는 아이, 철이 들 필요가 없는 소년 소녀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존중을 받기만 해야 하는 부류이거나.
양갓집 규수 흉내를 낸다면 전자. 왕립의학원 출신 의원이라면 후자였지만, 코넬리아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지금 어째선지 자신한테 화가 나 보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이걸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조금 전의 일은 저도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잠자코 듣던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도어맨의 얼굴에 먹칠할 필요까지는 없었어.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음. 예, 굳이 자격을 따지면 없기는 한데 말이죠….”
엘리자베스의 완강한 태도는 코넬리아도 다소 의외였다. 무엇보다도 여태 그 안내인에게 조롱을 당했던 건 그녀였고, 그 조롱을 코넬리아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함께 건물에 들어온 것 또한 그녀의 판단이었다.
코넬리아 자신이 엘리자베스 입장이었다면, 그 안내인을 감싸줄 이유는 눈 씻고 찾으려고 하려야 찾을 수가 없었을 것.
‘거꾸로 더 심하게 골려버리고도 남았을걸.’
그런 생각을 하던 코넬리아는 엘리자베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곱슬곱슬하고 풍성하게 흐르는 갈색 머리칼과 굵은 눈썹이 주는 강인한 첫인상. 그 안에 숨겨진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넉살에는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녀의 넉살 좋은 마음은 바야흐로, 자신에게 기분 상할 말을 잔뜩 던진 상대조차도 부드러이 감싸고 있었다.
“아하….”
그녀를 보던 코넬리아는.
정말 기적과도 같이, 그녀의 사고 방식이 이해되었다.
“당신, 사람이 너무 좋은 거 아닙니까.”
“뭐, 뭐야 갑자기.”
“제가 잘못한 거 맞아요. 베스 씨.”
코넬리아의 목소리는 마치 갓 끓인 홍차처럼 뜨거웠다.
“저는 제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행동할지 먼저 정하는성격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저에게 행동하는 걸 보고 따라 하거든요.”
나에게 친절한 상대에게는 친절하게.
나에게 무례한 상대에게는, 철저하게, 더욱 무례하게.
베풀어져 오는 은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돌려주는 호혜적 관계를 유지하되. 먼저 날을 들이대는 상대에겐 그 어떤타협도 하지 않는 무자비한 앙갚음으로 돌려준다.
그것이 렉스 휴크레이가 자라면서 배워왔고, 여태껏 지낸 곳에서 모두가 공유하던 인생관이다.
여느 귀족 자제와 같이 퍼블릭 스쿨을 다니고, 왕립의학원을 거쳐 가는 동안,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두가 그런 성격이었다.
“저는 그렇지만 당신은 그런 성격이 아니었던 거지요.”
거짓 없이, 진심이 어린 감탄이었다.
코넬리아는—일순간 자신이 소녀의 몸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로 강렬하게—엘리자베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뭘 먹고 살아야 이렇게 착하게 자라는 건가요?”
“착하다니? 아까부터 뭐야, 왜,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서 코넬리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강하게 달라붙은 소녀를 떼어놓는 건 여간 쉽지 않았다.
“도어맨은 당신에게 매우 무례한 언행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화가 잔뜩 났으면서도 당신은 내가 그를 무례하게 대하는 건 싫어했죠.”
“끄응~~… 하아, 그거야 당연하지.”
바짝 달라 붙은 코넬리아를 뿌리치는 걸 포기하고. 살짝 땀이 난 이마를 손등으로 훑으면서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내가 저 아저씨에게 화가 어느 정도 났었냐면, 구빈원 문제만 아니었다면 이쪽이 먼저 때려 눕혔을 거야. 싸움은 자신 있다고!”
그녀는 둥글게 말아 쥔 주먹을 흔들다가, 스르륵, 손의 악력을 풀었다.
“그러다 보니까, 말로 남을 깔보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쁘고 불쾌한지 잘 알거든. 그런 건 하면 안 되는 거야. 코니 양이 귀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렇게 남을 무시하면 안 돼.”
“베스 씨….”
“좀 어수룩하지? 하하, 내가 생각해도 네 눈에는 좀 미련하게 보일 거 같긴 하네.”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고개를 붕붕 흔들고, 코넬리아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좀 전에도 말했다시피, 저도 스스로 정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은 합니다. 고마운 조언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감사할 것까지야.”
“베스 씨는 정말로 멋진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코넬리아는 그녀의 팔을 놓고, 손을 잡았다.
“앞으로 착한 일은 당신에게 부탁하겠습니다. 베스 씨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너무 좋게 봐줘도 곤란해. 난 네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도 아니라고.”
“저보다는 착해요. 그거면 충분하고 남습니다.”
『그리고 나쁜 일은 내가 맡겠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바깥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베스 씨. 앞으로 저에 대해서 실망을하시더라도, 그래도 저를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믿지. 그 때문에 구원군의 부탁을 받고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엣헴, 하고 어깨를 펴면서 엘리자베스는 코넬리아의 잡은 손 위로 겹쳐서 양손을 맞잡았다.
“지역 지부에서 속 시원하게 따져줘. 아,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말을 하면 안 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와 지부장은 일단 동등한 의원 자격에서 대화하는 거니까요.”
“그렇긴 하네. 응.”
‘일단’이라는 가정에 엘리자베스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하였다. 그녀는 서로 잡은 손을 악수하듯 흔들었다.
“인제 그만 손 좀 풀어주지그래? 이대로 서 있기도 불편한데.”
“아차.”
어째 아이의 몸이 되고 나서, 신체 접촉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적극적으로 바뀐 것 같았다. 코넬리아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놓고, 멋쩍게 웃었다.
“아하하, 이건 뭐라고 할까요, 제가 원래 사람 대 사람의 호감을 느끼다 보면 그만 저도 모르게….”
“그건 코니 양이 날 좋아한다는 거지?”
“헉.”
숨을 들이켜면서 놀란 시점에서 이미 져버렸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엘리자베스는 깔깔 웃으면서 코넬리아의 뺨을 푹푹 찔렀다.
“무슨 사춘기 꼬마 같은 반응이야~!”
“사춘기 맞거든요….”
물론 그 내면의 인격은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는 훌쩍 넘긴,스무 살 넘게 먹은 남자다. 렉스 휴크레이는 그랬다.
그것과는 별개로 코넬리아—그리고 코니—는 아직 성숙하지 않은 여자아이다. 이 현실은 언제나 명심하고 있었다. 반복해서 떠올리다 보니, 완벽에 가까운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자기가 생각해도 징그러울 정도로 소녀스러운 행동을 하는 건, 분명 지나치게 몰입을 한 탓이겠지.
“여하튼 저와 베스 씨가나눌 대화는 다 한 듯하니, 슬슬 돌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정말? 뭔가 그럴싸한 작전 계획 같은 거는 없어?”
“작전 계획이라….”
턱을 쓰다듬으며 코넬리아는 말했다.
“저와 베스 씨가 만난 지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 열두 시간도 채 되지않았죠. 어설픈 계획은 안 짜느니만 못합니다.”
처음부터 코넬리아가로드리와 함께 상정하였던 몇 가지 시나리오가있다. 지역 지부의 비협조적인 행동 이유와 그 심각성에 따라서 경의사의 대응은 달라지게 되어 있었다.
그 상세한 건 엘리자베스에게 알려줄 수 없을뿐더러, 설사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그녀에게 기대할 역할은 없었다.
이런 소녀의 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지역 지부의 대장을 만나러 가는데, 나도 뭔가 코니 양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걸.”
엘리자베스는 어딘가 아쉬운 눈치였다.
딱 잘라서 거절하려던 코넬리아의 생각이바뀐 건. 단순히 변덕만은 아니었다.
“베스 씨. 시립 구빈원을 위해서 단단히 각오하신 거지요?”
“당연하지.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녀의 행동 원리를 알기 위해, 머리를 너무 굴릴 필요가 없다. 코넬리아는 곧은 심지가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보면서 재차 생각했다.
그녀는 코넬리아 자신처럼 ‘받은 만큼 갚는’ 사람이 아니었다.
받지 않아도 베푸는 쪽의 사람이었다.
“그럼.”
코넬리아는 손으로 입을가리고, 조금 목소리를 죽여서 말했다.
“제가 뭐라고 물어도 무조건 긍정하시면 됩니다. 무조건입니다.”
“흐음~…. 겨우 그 정도를 계획이라고 해도 좋은 걸까?”
“그 정도. 라고 할 만큼 쉬운 건 아닐 거예요.”
입을 가린 코넬리아의 눈 사이로 주름이 그어졌다.
“베스 씨에게는 정말로 어려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