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2) (49/111)



〈 49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2)

“슬프지. 화도 나고. 그 감정은 지금은 구빈원에 두고 왔어.”
“감정을 두고 온다고요?”
“일터에서 겪은 감정은 일터에서만 쓰기로 했거든.”

목과 가슴이 이어지는 부위.

빗장뼈의 가운데 부분을 손으로톡톡 두드리면서, 엘리자베스는 말을 이었다.

“허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었어. 노인들, 그다음은 아이들. 그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져. 마치 여기를 쥐어 짜이는 것처럼. 그렇기는 해도.”

호흡을 가다듬는 그녀의 미간이 가느다랗게 찌푸려진다.

“그 슬픔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지, 내 슬픔이 되어서는  된다고 생각하거든.”
“일은 일이라는 겁니까.”
“굳이 요약하면, 그럴지도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말을 멈추고, 코넬리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둔감해진 걸까. 코니 양이 보기엔 어때?”
“글쎄요. 딱히 둔감하다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소녀는 알 수 있었다.

눈물을 쏟아내면서 통곡을 해야만 슬픈 건 아니다.

감정적으로, 격정적으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만이 꼭 진심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멀리 예시를 찾을 게 아니라 레드우드 시에서 코넬리아 자신이 억지를 부렸던 것처럼.

“그리고 베스 씨. 당신이 감정을 두고 온  구빈원뿐만이 아니잖아요.”
“…바다 건너 동쪽에도 잔뜩 쌓아 두고 왔지.”

그녀의차분한 목소리, 그 비등점 아래에서 아슬아슬하게 끓어 넘치지 않는 분노가 있었다.

“이런 건 누구에게 털어놓으면 기분이 개운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네.”
“경솔한 질문이었습니다. 인제 와서 무르는 것도 이상하지만,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
“코니 양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못 들은 거로 할까?”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췄다.

“말을 하다 보면 금방이지? 여기가 지역 지부야.”

그녀가가리키는 건물을 올려다보는 코넬리아는 색안경을 슬쩍 내려서 위로 치켜보았다.

눈앞의 건물은 주위의 번화한 상점가의 신축 건물보다는 좀  고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3층 높이의 타운하우스(Townhouse)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상가 건물은 처음부터 1층을 상점으로  목적으로 설계하여 건축한다. 그보다 이전 세대의 건물은, 마치 일반 주택처럼  하나의 중앙 현관을 따라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즉 겉으로만 보면 여기가 상점이나 사무실 전용으로 쓰이는 건축물인지, 아니면 하나의 층 안에 다양한 상점이 위치한 상가 건물인지는 알기 어렵다.

“금방 왔네요. 과연 가까운 거리입니다.”

붉은색 벽돌과 검은색 연철로 꾸며진 외양. 깔끔하게 정리가  정면 방향으로는 자그마한 간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층으로 올라가야 하나요?”
“하하. 이미 지역 지부에 도착해 있는 거야.”

타운하우스 정문에 서 있는 둘. 그 발밑의 거대한 화강암 블럭을 가리키면서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여기 로비층부터 지역 지부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설마. 건물 전체가 말입니까? 한 층도 아니고, 전체를요?”
“그래. 이 건물 전체를~ 지역 지부가쓰고 있다고.”

엘리자베스는 오른팔을 크게 휘저어서 둥근 원을 그렸다.

“그렇게 놀랍다는 반응을 해주니까 고맙긴 하네.  정도 건물은 레드우드 시에도 잔뜩 있을 건데.”

엘리자베스가 오해해도 이상할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처럼 이해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왕립의학원 출신의 의원들만의, 사교 및 업무 협업 도모를 위한 협회. 그 협회의 지역 지부라면 이 정도의 으리으리한 건물을 쓰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마도 평범한 반응일 것.

코넬리아의 의문은 다른  아니었다.

‘지역 지부라는 게 이렇게 부유할  있는 곳이 아닌데?’

소녀가 ‘지역 지부’라고 부르는 것의 정확한 명칭은 『왕립의학원 협회 및 경의원 지역 감찰 등록 인가 지원 지역 지부』.

그 명칭에서 마지막 부분만 달라지는데, 이곳은 바트나시니까 ‘남방 지역 바트나 지부’가 된다.

요컨대, 수도에 있는 중앙회에서 각 지역의 도시마다 두고 있는 자그마한 지회(支會)일 뿐. 그 지역 지부는 쇠락한 도시에 있다고 해서 특별히 낮은 취급을 받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대도시의 지역 지부라고 더 높은 지부가 아니다.

본회(本會)보다 한두 단계 아래에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권력의 역학 관계는 변할  없었다.

 지역 지부는  지역의 내부의 회원 인적 관리와 지역 업무를 맡는 말단 조직에 불과하다.

‘뭔가 엘리자베스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 합리적인 가능성이 어긋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때에.

“아, 그렇지. 들어가기 전에 미리 말을 할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코넬리아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러운 접촉에 미처 손을 빼내는 시늉도 못 하는 사이에, 그녀는 다른손으로 색안경을 벗었다.

“나의 역할은 너를 여기에 데려다주는 거야. 원래는 안에 함께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들어가고 싶어. 괜찮을까?”
“예. 뭐어 그러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차피 코넬리아에게 바트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밖에서 찾아온 이방인 그 이상이  생각은 소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경의사는 완전한 타인이기에. 하나의 지역에서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는 지방경찰보다, 경의사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일  있다.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해야 하는 코넬리아. 그 옆에 엘리자베스 하나 정도는 함께 있어도 특별하게 더 신경이 쓰일 건 없었다. 그렇지만.

“ 베스 씨가 굳이 저와 같이 지역 지부에 들어가고 싶은 이유가 있겠죠. 그 정도는 들어도 괜찮을까요?”
“코니 양이 앞으로 할 일에, 조금은 보탬이 될 수 있을 거 같거든.”
“제가 할 일에.”

엘리자베스의 말을 입으로다시금 되뇌는 소녀.

콜레라가 퍼진 구빈원을 의도적으로 방치하고 있는 긴급 상황에 『경의사』로서 개입을 해야 한다. 코넬리아 자신과 로드리가 함께 내린 여러 결론 중 하나였다.

몇 가지 사항—가령 ‘코니’가 그저 단순한 의원은 아니라는 사실—은 엘리자베스에게 아직 전해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구빈원의 답답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역할로 코니가 왔다는 건 엘리자베스도 알고 있었다.

“지역 지부가 구빈원을 왜 무시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무시하는지도 봐야 하지 않겠어?”

굵은 눈썹이 기울어지며, 그녀는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여기서 어떤 모욕을 당하는지. 지역 지부란 곳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면서 무시를 당했는지,  보고 들으라고.”
“어, 어어—”

마음의 각오를 다질 틈도 없이, 소녀의 손을 붙잡은 엘리자베스는 회전문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냥 문이라면 모를까, 회전문의 좁은 공간은 둘이 끼어들기에는 버거운 부분이 있었다. 거의 반쯤 끌어안은 자세로 회전문을 통과하자마자 도어맨의 화끈한 마중 인사가 찾아왔다.

“이봐, 이봐! 어이! 당신 또 오면 내가 쫓아낸다고 했지!”

살집이 많은체형의 현관 안내인. 면바지 벨트 아래로 쑤셔 넣었어도 뱃살로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셔츠를 출렁이면서 다가온 그는,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옆에 서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고.

흥, 소리가나도록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이건 또 누구야. 그 냄새 나는 구빈원 애라도 끌고 와서 이젠 무슨 짓을 하려고?”
“말이 좀 심하신데, 구빈원이라고 꼭 냄새나는 건 아니거든? 원래 내가 일하던 곳은 냄새 같은 거 안 나거든? 응?”
“하하….”

엘리자베스의 어딘가 헛짚는 반론에, 코넬리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발끈하는 지점은 역시 뭔가  남달랐다.

저 정도의 독특한 인격이기에, 귀족 출신이면서도, 험한 일의 세계에서 구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렇고. 역시 귀족인 건 숨기고 있는 건가?’

기억을 돌이켜보면 엘리자베스가 처음대면했을 때 신분을 먼저 드러내진 않았다. 눈치 없이 커크가 속을 긁다 보니 나왔던, 일종의 ‘사고’였다.

아무리 계급과 신분이 격동하는 시기라고는 해도, 도어맨이 귀족 출신 아가씨에게 폭언하는 건 일반적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광경이다.

엘리자베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 수는 없다. 그리고 그건—당연하지만—코넬리아의 사정은 아니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베스 씨.”
“어, 으응.”

엘리자베스와 잡고 있던 손을 놓은 코넬리아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면서 말했다.

“세상에… 명색이 협회 지부인 곳에서, 도어맨이 방문객을 이렇게 우습게 보다니. 당신만 이런 거였으면 좋겠는데.”
“어쭈, 코흘리개 동전으로 뭘 하시려고? 과자라도 사게?”
“흥.”

미리 챙겨서 가지고 온 동전 지갑을 보고 대놓고 조롱하는 현관 안내인.  말에 굳이 반박할 것도 없이 코넬리아는 그저 옆눈으로 흘겨보고, 그대로 지나쳐서 접수대로 향했다.

자신만만하게 걸어갔지만 접수대는 소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발뒤꿈치를 끝까지 들어서 양팔을 겨우 올린 코넬리아는, 고개를 억지로 들이밀면서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아침입니다. 떡갈나무 아래를 달리고 있는 여우를 본 적 있으신지.”
“—예. 안녕하십니까.”

느긋하게 소녀를 바라보던 접수원의 표정은, 소녀의 말을 듣는 순간 곧장 사무적인 얼굴로 바뀌었다.

“왕립의학회 바트나 지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슨 업무로 방문하셨습니까.”
“당신은 말이 통하는군.”

코넬리아는 동전 지갑을 열어서, 위장 신분이 등록된 기어카드를 내밀었다.

“바트너 지부장과 면담 약속을 잡고 싶은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숙련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면서 접수원은 소녀의 기어카드를 해석기관에 넣었다.

경쾌하게 찰캉하는 소리와 함께, 길게 뽑혀 나온 출력 압지를 읽어 내려가던 접수원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미스 코니. 면담 시간은 언제가 편하십니까?”
“이르면 이를수록.”
“그럼, 삼십 분 후에 다시 찾아와 주시기 바랍니다. 방문 인원은 혼자십니까?”

접수원의 물음에, 색안경을 고쳐  소녀는 자신의 어깨너머, 등 뒤를 가리켰다.

“동행인이  명.”
“알았습니다.”

방문 접수 서류에 부지런히 기재한 안내 직원은, 해석기관에서 빼낸 기어카드를 다시 코넬리아에게 돌려주었다.

“미스 코니와 동행인 한 명, 오전 아홉 시, 지부장 면담을 접수하였습니다. 삼십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음.”

돌려받은 기어카드를 지갑에 넣고, 코넬리아는 돌아섰다.

“삼십 분 있다가 올라가면 된답니다. 베스 씨.”

양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비스듬하게 접수대에 기대어 코넬리아. 그 소녀를 향해, 접수 안내인이 다가왔다. 얼핏 보기에도 자존심을 구기고 비굴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그가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사람과 같이 오셨길래 그만 몰라보고—”
“ ‘몰라보고’? “

색안경 너머로 안내인을 노려보면서. 코넬리아는 말허리를 잘랐다.

“접수원은 아는데 당신이 모르는 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야. 아무도 너한테 가르쳐주지 않던가?”
“뭐… 뭐를 말입니까…?”

그 멍청한 질문에 코넬리아는,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억양. 지금도 댁이 듣고 있는  말의 억양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