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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1) (48/111)



〈 48화 〉3막 (中) 나쁜 일은 나의 몫 (1)

바트나 시가지를, 환한 햇빛 아래에서 걷는 건 처음이었다.

만약 지금이 아무런 부담 없는 산책이었다면,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경치를 구경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겠지만.

“…….”
“…….”

서로 말없이 걷는 둘.

한 발자국 정도 앞에서 걷는 엘리자베스는 코넬리아보다 약간 키가 컸다. 굽이 높은 단화를 신고 있었기에 만약 신발을 벗는다면 치열한 승부가  것 같았다.

그렇기는 해도 들어갈 부분과 나올 부분이 뚜렷하게 구분되었기에, 2차 성징이 끝났다는 건 한눈에도 쉽게   있었다.

“흐음….”

저 작은 몸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있기에.

구빈원의 콜레라가 바깥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게 막으면서, 환자까지 간호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소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살짝 느려진 모양이었다. 몇 걸음 더 앞서 나가던 엘리자베스가 어느 사이에 코넬리아의 곁으로 왔다.

“좀 천천히 걸을까.”
“예. 그렇게 해요.”

직업 습관이긴 하겠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면서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의 높이가 비슷한 사람은 뭔가 안심이 된다. 잠깐이나마 엘리자베스의 갈색 눈동자를 보던 소녀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커다란 보닛 모자 덕분에 그나마 약간 눈부심은 덜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속으로 코넬리아가 안도하는 동안.

“자.”

엘리자베스가 뭔가를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걸 받은 소녀는,  검푸른 색깔이 들어간 유리 렌즈가 끼워진 안경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셰이드…?”
“어라. 이거 아는 거야? 의원이니까 아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긴 하다만.”

자신도 그사이 색안경을 쓰고, 엘리자베스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색안경의 코받침을 쓱 올렸다.

“어때. 누군지  알아보겠지.”
“변장 목적으로는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좋네요.”

색안경을 쓰자마자 확실하게 눈이 편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하게 기분 탓만은 아니다. 얇게 가공한 렌즈 덕택인지 시야가 일그러져 보이는 부작용은 없었다.

거기에 클레멘트 공방에서 썼던 것과 다른 점이 하나 더 있다면, 빛의 세기를 줄이는 역할 만큼이나, 디자인에도 꽤 신경을 쓴 티가 났다.

“저바다 너머 무역국가(貿易國家)에서는, 바닷가 주위에서 흔하게 쓰는 거래. 특히 배를 타는 사람들은 필수품이라고 하더라고.”
“헤에…. 그럴 만하겠네요.”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들처럼 색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수도에서 색안경을 사용하는 자들처럼 환자이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여태 해가 저물고 난 이후에나 항만 거리를 다녔으니까 몰랐을 뿐이지, 실은 바트나에서 생각보다 꽤 유행하고 있을지도.

“전에 항만 구역에 있는 진료소에서 일할 때, 배 쪽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이들 찾아왔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항로를 정하는 사람 중에서 눈이 나쁜 사람이 엄~청 많았어. 셰이드를 써서눈이 편해지긴 했어도, 더 나빠지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눈이 좋아지진 않아. 이미 늦었던 거지.”
“저는 베스 씨 덕분에 다행이네요. 의원이 바닷가 햇빛에 눈이 멀어 버려서야 체면이 서질 않으니.”

머리보다 한 치수는 큰 색안경이 약간 헐렁거리긴 했지만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넬리아는 얼굴 반은 가릴 정도로 커다란 색안경을  채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지역 지부는 여기에서 멉니까?”
“걸어서 갈 만한 거리야. 만약 멀었다면 마차를 탔겠지만—”

말을 하던 엘리자베스는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서 코넬리아를 상점가 건물 벽면으로 바짝 붙였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하고 소녀가 물어볼 틈도 없이, 그것은 바로 코앞의 골목길 틈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사람의 형태.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철제 상자 여럿을 손으로 들고 있는 그것은 보통 성인의 두 배는 커 보이는 높이에, 눈코입이 달려 있어야 하는 얼굴은 그저 반들거리는 금속체로 꾸며져 있을 뿐이었다.

「위잉— 위이이잉—」

전속력으로 태엽이 감겼다가 풀리는 회전음(回轉音)이 구동계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성별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 금속 인형(人形)의 등 뒤에는, 마치 부모의 등 뒤에 업힌 아기처럼 누군가가 있다. 그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서 엘리자베스를 향해 외쳤다.

“야 이 장님 자식아!  안 보고 걸어? 처박을 뻔했잖아!”

걸걸하게 말하는 중년의 사내는 험한 현장에서 얼마나 굴렀는지 온 얼굴이 흉터투성이다. 다짜고짜 눈을 부라리며 욕부터 하는 사내. 그에 질세라 엘리자베스도 주먹을 휘둘렀다.

“웃기고 있네, 야,그따위로 운전하면  가랑이 사이에 있는  다 터진다! 어?!”
“대낮에 어디서 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곱게 말해!”

길바닥에 침을 뱉고, 사내는 다시 기계의 목덜미에 머리를 고정하였다. 팔다리는 기계 깊숙하게 넣어서 조종하는 방식인지, 그의 어깨나 허리가 들썩거릴 때마다, 그것은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났던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퇴장도 순식간이었다.

어느샌가 좁다란 골목길  사이로 매끈하게 움직여서 사라진 그 뒤에 엿을 먹이고, 엘리자베스는 웃는 낯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멀었다면 마차를 탔겠지만, 그 정도로 멀진 않아.”
“어, 음, 으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잠깐 할 말을 찾아서 머릿속을 헤매던 코넬리아는, 가장 궁금한  물었다.

“조금 전의 그건 뭐죠.”
“오토마톤(automaton)이다. 수도에서도 저건  봤나 보네?”

엘리자베스의 말에 코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에서 사용하는 장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도시 한 복판에서 돌아다닐 줄이야….”

사람 모양의 기계 장치는, 수도 앨버스에서도 사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방금 눈앞의 오토마톤이 아니라 그 대부분은 어린 애들을 위한 장난감이나부잣집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용도의 진귀한 장치였고.

그 크기는 작게는 손가락  어 마디, 크게는 기껏해야 코넬리아 또래의 아이 정도.

증기기관의 소형화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오토마톤을 더 유용하게 쓰려는 욕구는 늘어나고 있었지만, 코넬리아가 알고 있는 ‘산업용 오토마톤’은 오로지 군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중이었는데.

“응. 그 말이 맞아. 코니 양.”
“예?”

뜻밖에도 그녀는 코넬리아의 말에 동의하였다.

“오토마톤은 원래는 군에서만 쓰는 거 맞다고. 조금 전에 태엽 소리 들었지?”

엘리자베스는 휘파람을 불면서 회전음을 흉내 냈다.

“전선에서 폐기된 오토마톤을 무역 상관(商館)에서 대량으로 수입. 고출력 외연기관은 떼어내고, 민간 사용 허가가 나온 태엽으로 구동계를 바꾼 거야.조종은 전역(轉役)한 군인에게 맡기는 거고.”
“아하….”
“군에서 나온 기계 장치는 인기가 높거든. 일단 녹이 잘 안 스니까. 그중에서도 오토마톤은 아주 특별한 존재지.”

앞뒤 사정이 알게 되니. 조금 전의 말다툼은 이곳에서는 특별히 생각해야 할 정도의 풍경은 아니었다.

 수 없이 다양한 짐을 하역(荷役)하는 항만에서는, 오토마톤과 같이 튼튼한 인형장치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멸시와 공격을 받지 않는, 위험하고 특수한 작업 전용으로 쓰였겠지.

처음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그냥 짐을 빠르게 나른다’는, 어떻게 보면 충분히 사람의 일을 위협하는 자리까지 내려온 것 같았지만.

“베스 씨는 극동전선에다녀 왔으니, 이런 쪽으로 잘 아는 거겠네요.”
“에이, 남들 아는 정도로만 아는 거야. 바트나에서 이 정도는 누구든지 다 말해줄걸?”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는 엘리자베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막힘 없이 줄줄 흘러나왔던 실전 말싸움 어휘도 인상이 깊었지만,그 부분에 깊이 파묻지는 않기로 하자.

아까 전보다는 확실히 풀어진 분위기에서, 코넬리아는 그녀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지역 지부에 제가 찾아가는 이유는 로드리에게들었습니까.”
“응. 이유를 듣긴 했는데, 너무 단순한 설명이었지. 새벽에 자는 사람 깨워서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없을 정도로. 하하.”

말 속의 내용만 보면 불만을 가질 법한데도 엘리자베스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그러더니 얼굴색을 싹 바꾸고 말했다.

 ‘지역 지부가 안 움직이는 걸 의원 자격으로 따지러 간다. 그걸 도와줘라. 베스.’ ”

그렇게 말한 엘리자베스는 언제 정색을 했냐는 양 환한 얼굴로 색안경을 고쳐 썼다.

“어때?”

뭐가 어떻냐는 건지 잠시 어리둥절 한 건, 엘리자베스가 한 짓을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처리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뭘  거지.’

현기증이 핑 돌았다. 마음의 각오를 하고. 코넬리아는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로드리 흉내입니까?”
“응. 그 잘생긴 군인 따라  건데.”
“하하….”

어젯밤, 구빈원에서 처음 대면하였을 때에는 훨씬 진지해 보였던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소녀의 생각보다는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역시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섣부른 선입견을 품었던 자신을 반성하였다. 그러면서 소녀는 말했다.

“그 잘생긴 군인한테는 ‘저를 도와주면 된다’는 어렴풋한 부탁을 받은 거군요.”
“도와주라는 그게 진짜로 지역 지부로 가는 길잡이가 되어 달라는 의미인 줄은 몰랐지~”

웃음을 흘리면서 엘리자베스는 바람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려 오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확실하게 되물어서 확인하지 않은  실수이긴 한데, 그래도 어이가 없는  어쩔 수 없잖아. 그치?”
“예. 뭐어.”

애초에 로드리가 이렇게 인간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는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 전까지는 접점이 없는 사람에게 뜬금없이 로드리의속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원론적인 부분에서는 그녀의 사정에 동감했다.

“이해합니다. 그에게는 좀 더 섬세한 대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하. 그렇지~….”

그렇게 밝게 웃는 낯으로 말을 하던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코니 양. 말 나온 김에,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전까지 술술 말꼬리를 이어 나가던 그녀답지 않게.

엘리자베스는 코넬리아에게 뭔가 말을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좀처럼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스스로 각오를 다졌는지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했다.

“어젯밤에는 너무 피곤해서 평소보다 좀  화를 낸 거였거든. 그건 정말로 내 잘못이야. 상처 주는 말을 해서 미안해.”
“상처 주는 말, 이라.”

코넬리아는 곰곰이 어제 자신이 들었던 말이 뭐였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 깊었던 악담은 아닌 듯.’

어차피 지금의 몸이 되고 나서부터, 렉스였을 때에는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별 해괴한 소리는 다 들었다.

그저 그런 말은 다 흘려 넘기게 되긴 했는데.

“그것보다 제 쪽에서 베스 씨에게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지난밤의 대화 가운데에서.
 자리에서는 차마 엘리자베스에게 묻지 못하였던 게 있었다.

“며칠 사이에 여든  정도가 죽었다고 했죠. 괜찮습니까?”
“직원들은 감염 예방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으니, 구빈원은 괜찮은데….”
“아뇨. 구빈원이 아니라 베스 씨말이에요.”

소녀의 말을 듣고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열흘이 되지 않는 사이, 구빈원은 파국을 맞이했다. 전체 수용 인원의 삼 분의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었으며, 필시 이 젊은 아가씨는 그들의 절명을 하릴없이 목도(目睹)하였을 것이었다.

그런 코넬리아의 걱정이 간신히 이해가 되었는지. 엘리자베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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