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8)
“커크. 이 의원분에게, 협력 요청이 거부된 상황을 알려주도록 해라.”
“예에. 상황 설명이라 말씀하신다면….”
탁자에 앉은 커크는 코넬리아와 로드리 각자에게 서류철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기 구빈원에서 왕립의학회 협회 바트나 지부에 세 차례 보냈던 협력 요청서입니다. 환자의 증가 상황과 치료 조치의 경과는 공통으로 적혀 있습니다. 수치의 차이가 있으니 주의해서 보시길 바랍니다.”
커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소녀는 몇 장 정도 되는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쭉 훑어보았다.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없어 보이는데.’
종교 단체에서 봉사 활동의 지원 인력을 요청할 때, 혹은 사립 학교의 주기적인 아동 건강 점검을 진행할 때 등등. 수련 단계를 밟았던 의학국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서류가 우편으로 들어온다.
그중에서 지금 이 문서처럼 한 지역에서 특정 질환이 유행할 때 협력을 부탁하는 문서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런 부류의 협력 요청서는 익히 봤던 것이었다.
코넬리아 자신이 볼 때일부러 흠잡을 만한 게 없을 정도라면, 이 구빈원에서 작성한 서류는 완성도가 높은 편이었다.
“보아하니 이런 식의 업무를 평소에 하던 사람이 작성한 거로 보입니다만.”
“예. 조금 전 대화를 나누셨던 엘리자베스 씨가 쓴 겁니다.”
“그분은 이쪽 구빈원 소속이 아니잖아요. 분명 북구에 있는 구빈원에서 지원 인력으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소녀의 궁금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커크는 조금은 부끄러움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때마침 여기서 일하는 지인을 만나러 방문했다가, 저희 직원보다도 엘리자베스 씨가 우연히 먼저 알아차렸습니다.”
“아하.”
의도하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코넬리아가 품고 있던 질문 하나는 풀렸다.
“커크 씨. 그건 ‘우연히’가 아닙니다. ‘기적적으로’라고 하셔야 합니다. 여신의 뜻이 아니고서야 이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콜레라 유행을 가장 치열하게 다뤘을 전장에서 몸소 겪고, 그 대처법도 알고 있는 간호사가 구빈원에 나타났다.
“운이 나빴다면 오늘 여기서 저와 상담을 하는 건, 당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그 정도입니까….”
나중에 누가 신문 기사를 쓰더라도 ‘꾸며낸 이야기가 아닐까’란 의문을 사는 게 당연할 만큼 대단한 행운이었다.
베스 당사자에겐 아마도 불행일 거 같기는 하더라도 말이었다.
피곤함에 완전히 절여져 있었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코넬리아는 다 읽은 요청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환자 증세, 경과 관찰, 발병 일시 추측과 전파 우려 경고. 일반적으로 현장에서 모아야 할 정보는 다 모아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청서에는 문제없습니다. 그게 더 골치가 아파요.”
“요청서에 문제가 없는데 어째서 골치가 아픈 겁니까?”
커크의 당연한 되물음에 답한 건 로드리였다.
“구빈원의 문제가 아니란 거지.”
예전부터 로드리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의 영역에서는 언제나 입을 꾹 다물었다.
아는 것에 있으면 아는 만큼 말하는 그 로드리가 입을 연 것이었다.
“협회 지부의 문제다. 고의로 구빈원의 요청을 무시하고 있는 거고 이건 너희들의 추측이기도 했지, 커크.”
“아, 그게, 경의사 님.”
“괜찮아요. 커크 씨. 제눈치는 안 보셔도 됩니다.”
코넬리아는어느새 짧게 한 마디 길이도 남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 요청서는 바보가 읽어도 콜레라가 발병했다는 걸 알 수 있게 쓰여 있습니다. 어, 그러니까….”
몸을 더듬거리는 코넬리아에게 커크는 요령껏 연필을 건넸다. “감사합니다”라 말하고, 소녀는 서류철의 여백을 쓰기 시작했다.
일단 [환자]라고 쓴 글자에 빙글빙글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그 밑으로 가지를 쳐서 두 부류로 나누었다.
[보균자], [비보균자].
“콜레라가 도는 곳에서는, ‘세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균? 콜레라가 ‘균’으로 퍼지는 겁니까?”
“예.”
다소 의아해 보이는 커크의 반응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커크가 알고 있는 건, 필시 「병은 나쁜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걸린다」는 일반적인 통념이다. 이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틀릴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전염병의 경우에는 더더욱.
눈에 보이지 않는 ‘균(bacterium)’이 병을 만들고 동시에 퍼뜨린다는 건, 아직 서서히 밝혀지고 있는 영역이었다.
정보가 식자(識者)에게 제한된 사회에서 코넬리아가 알고 있는—하물며 그 정보 중에서도 가장 첨단에 서 있는—지식은, 일반인이 모르는 게 자연스럽다.
“콜레라는 콜레라 증세를 일으키는 균이 있고, 그 균은 ‘물’을 통해서 퍼진다…는 추측이 있습니다. 꽤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앨버스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바트나에서는 모르셔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이 몰라야 당연한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었다.
‘군에서 쓰던 방법을 여기서도 썼겠지.’
단순히 치료 방법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자와 접촉할 때에는 항상 장갑을 쓰고. 통으로 받은 대변을 하수구에 부어서 버리지 않고. 지하수의 흐름이 닿지 않는 메마르고 단단한 땅에 구덩이를 파서 석회를 바른 임시 정화조를 만든다.
이곳에서 유난히 느껴지던 시큼한 냄새는, 아마도 어둠 속 어딘가의 정화조 순환 구멍에서 풍기는 악취였을 것이리라.
‘아무렇게나 환자의 분비물을 처리했다면 이미 바트나 시는 쑥대밭이 되었을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말을 이었다.
“설사를 하는 환자, 그리고 설사가 멈추고도 며칠 정도 지날 때까지, 그들은 당연히 [보균자]로 들어가겠죠. 병실에 있는 사람은 모두 보균자입니다. 그러면 여기, [비보균자]에는 누가 들어갈까요?”
코넬리아는 뭉툭한 연필심 끝으로 [비보균자]를 체크하였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는 커크를 보면서, 소녀는 연필을 놓고 팔을 활짝 펼쳤다.
“나머지는 여기에 들어간다는 거겠군요.”
그걸 보던 커크는 약간 안심이 되는 어투로 말했다. 안타깝게도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습니다. 그들 외의 나머지는, 어디에 들어가야 할지 몰라요.”
“모르다니… 저희는 멀쩡하잖습니까. [비보균자]에 들어가야 맞을 거 같습니다만.”
“들어갈 수도 있죠. 하지만 확실하진 않아요.”
종이에 적었던 [비보균자] 위로 코넬리아는 줄을 죽죽 그었다.
“감염된다고 바로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하루 뒤에 나타날 수도 있고, 며칠 밤은 더 지나고 나서야 나타나는 경우도 흔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제가 병실 침상에 누울 수도 있어요. 어쩌면 당신도.”
그 말을 들은 커크의 퀭한 눈이 한층 더 움푹하게 들어가는 듯 보인다.
“베스 씨의 대처가 아니었다면 바트나 시 남구의 절반은 시체가 되었을 겁니다. 연립주택 문에 그어지는 붉은 카운팅 마크가 매일 매일 늘어났겠죠. 몇백, 아니, 몇천 명이 죽더라도 당연한 결과라고 납득을 했을 겁니다. 그걸 막은 겁니다. 베스 씨가.”
“히, 히익—….”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이미 환자로 착각하여도 될 정도로 안색이 나쁜 그는, 조금 떨리는 입술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여… 여든두 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희 구빈원에서, 일주일 사이에 말입니다.”
가슴팍에 성호를 그으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것도 신의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허.”
코넬리아는 조금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로드리를 보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커크는 말을 이었다.
“신이 내린 시련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시험케 하는 신의 뜻입니다. 먼저 떠난 이의 앞날을 기쁜 마음으로 축원하며, 아직 떠나지 못한 우리의 거룩한 봉헌에 함께 기도합시다. 자, 기도합시다! 에렘 뮐!”
고개를 푹 숙이고 깍지를 낀 팔을 머리 위로 올리며,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우는 커크.
그를 바라보는 코넬리아와 로드리는 기도하지 않았다.
* * * * *
자정이 되기 전에 구빈원에서 나온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괜한 대화를 했다가 누군가가 엿듣고 헛소문이 퍼질 걸 걱정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는, 딱히 말을 나누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윙킹 스퀘어가든도 지나쳐서 9호실에 제법 가까워지고 나서야 코넬리아가 입을 열었다.
“베스의 말이 맞았어. 의원들은 대체 뭘 하는 걸까.”
“돌고 돌아서 처음 의문으로 돌아왔군.”
로드리의 말에 비아냥은 없었다.
“지금 저기에서 처절하게 맞서 싸우고 있는 건 병동 내의 직원들이다. 그 가운데에서 엘리자베스 달링의 역할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녀는 이 구빈원에서 외부인이다.”
“아슬아슬한 상황인가….”
아직은 베스의 조언과 종횡무진으로, 어떻게서든 콜레라가 구빈원이란 울타리 밖으로 뻗쳐 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
이 기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른다.
“그녀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 경의사의 개입이 필요해. 오늘 보았다시피 커크는 이 사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어. 그는 무능하다.”
“꽤 노골적인 평가를 하는구나.”
“유능한 친구가 있으니까 할 수 있는 평가다.”
그렇게 말하면서 로드리가 자신의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마자, 코넬리아는 그가 문 담배를 냉큼 뺏었다.
“엘리자베스의 충고를 따랐잖아. 그 아저씨. 그럼 무능한 건 아니지. 그보다는 협회 지부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맞아 보이는데 스읍—”
그대로 한 모금 깊숙하게 빨고, 로드리의 입술 사이로 돌려줬다.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갈 수는 없지. 어째서 지역 협회에서 도와주지 않는 걸까?”
“흠. 구빈원이라고 천대를 하는 건가.”
담배를 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면서, 별 고민을하지 않은 생각을 그대로 입 바깥으로 꺼내는 로드리.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구빈원의 보건 업무를 돕는 건 구빈법으로 정해져 있어. 함부로 거부했다가는 큰일이 날 거고, 하암,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이유로 거부했을 리가… 없는 데에, 하아아암~”
말을 하다가, 참을 수 없는 하품이 커다랗게 튀어나왔다.
“어린애는 꿈나라 갈 시간인가.”
“애 취급하지 말라고….”
말은그렇게 해도 코넬리아는 갑자기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참기 어려웠다. 발걸음을 내딛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