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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7) (45/111)



〈 45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7)

“아아… 그렇지. 자기소개, 자기소개….”

아무 데서나 누워서 잠을 청하는 건지, 밤갈색 머리칼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 따위는 개의치 않고.

“바트나 북구의 세인트 일러스트리어스 구빈원에서 지원 인력으로 온… 엘리자베스 달링입니다. 베스라고 불러주시면 되고요, 간이형 수액 장치 말이죠. 그건 제가 설치했습니다.”

아직 잠이 깬 기색이었던 그녀—베스의 목소리에 서서히 온전한 빛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푸들처럼 보슬보슬한 부풀어 오른 그녀의 머리를 보면서 코넬리아는 입을 열었다.

“커크 씨한테서 듣자 하니, 지역 의원에서 협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단순히 정보를 모으려는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그나마 한 줄기 빛이 될  있는 조치를 취한 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코넬리아가 알기로는 연합왕국에서 콜레라가 마지막으로 대유행한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

하수도 분리가 덜 진행된 외진 시골에서는 작은 규모로 일어나긴 했었지만, 그보다는 연합왕국 바깥에서 콜레라를 맞닥뜨리는 일이 많았다.

“수액 장치를 써야 한다는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소녀의 질문에 베스는 힘없지만 조금은 뿌듯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극동 전선 후방에 있던 야전병원(野戰病院)에서 일 년간 근무하는 동안, 대처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역시…….”

탄복하는 코넬리아의 입에서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콜레라에 걸린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설사를 하고, 몸의 수분을 쥐어 짜내듯 잃어버리면서 탈수로 말라서 죽는다. 오랜 세월 동안 사회를 괴롭힌 이 병의 치료법의 원칙은 복잡하지 않았다.

몸에서 물을 계속 쏟아낸다면, 그만큼 열심히 몸에 다시 물을 쏟아 넣으면 된다.

다 큰 성인들에게는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청결한 상수도 물에, 약간의 설탕과 아주 약간의 소금을  물을 계속 마시게 하였다. 그렇다고 콜레라가 낫는 건 아니니 설사가멈추진 않아도, 일단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뭔가를 마실 기력도 없는 애들에게 수분을 보충하는 확실한 방법은, 정맥으로 직접 수액을 넣는 것이었다.

그 누구라도 간단히 조립할 수 있는 수액 장치를 사용하면, 콜레라 환자의 위급한 고비를 넘길  있었다.

병실 내의 수액 장치는 충분해 보이지 않았다. 부족하나마 있기만 하더라도, 초기 급성 증세의 환자를 백에 아흔아홉은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이게 없으면 열에 다섯은 죽는다.’

코넬리아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수액 장치. 언제 설치하였습니다. 어디서 빌려온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요. 호기심이 참 많으시네요, 어느 집안에서 곱게 자라셨는지 모를 우리 어여쁜 아가씨?”

여태까지의 대화의 흐름은 꽤 나쁘지 않았다.

코넬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몇  정도 지나고 나서야, 소녀는 뒤늦게 이 간호사가 자신을 있는 힘껏 비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커크 씨, 이 꼬맹이 누구입니까?”
“꼬, 꼬맹이라니, 엘리자베스 씨. 말조심하세요.”
“말을 조심해야 한다니요? 저도 귀족 출신입니다, 그냥 집이 좀 망했을 뿐이지!”
“아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커크는 점잖게 그녀를 타이르느라 애를 먹었다. 그렇지만 그의 말은 소용이 없었다.

“구원군에게 부탁해서 열흘이 지나서야 온 의원은 웬 꼬맹이 하나를 데려왔고, 꼬맹이라는 애는 필요도 없는 수액 장치에 집착이나 하고 있는데, 누가 먼저 인내력이 닳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겁니까?”
“지, 진정해요, 엘리자베스 씨. 이 분이 의원입니다. 아가씨가의원이에요.”

아마도 달래려는 의미가 있었겠지만, 커크의 말은 역효과였다.

“의원? 이 멋진 남자가 아니라, 꼬맹이가?”

멋진 남자인 로드리는 일부러 천장의 얼룩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모르는 체를 하였다.

코넬리아는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는 베스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피하기는커녕 똑바로 바라보았다.

“코니 입니다. 레드우드 시에서 왔습니다.”

소녀는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은 공기 만을 잡았다.

“이런 누추한 곳에 오시면 안 될 영애분이신 거 같은데, 구빈원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여기서 낮은 미천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하십니까?”
“그, 그만 해요. 그 정도로 해요. 이 의원도  곳에서 오신 분이라고요.”

커크는 쩔쩔매었다. 그리고 코넬리아를 보면서도 말은 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는 몸짓이었다.

소녀는 그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정 궁금하시면 말씀드리죠. 이틀 전에야 겨우 빌려 왔어요. 이틀 전! 그것도 바트나의 빌어먹을 의원 나부랭이 자식들이 아니라 이웃 도시를 긁고 긁어서! 그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 멀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안 죽어도  사람이 죽었다고요. 팔십 명 넘게 죽었어요! 대체 지역 의원들은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진작에 수액 장치만 있었어도  죽었을 사람들을, 아이들을…!”

코넬리아는 커크에게 그와 똑같이 쉿, 하는 흉내를 내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였다.

“사과드립니다. 엘리자베스 달링 씨.”
“아, 어, 예?”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허를 찔렸는지, 간호사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숙였던 몸을 세운 코넬리아는, 베스에게 말했다.

“당신 덕분에 정말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있었습니다. 몇 가지 대처 수정 방안은 커크 씨를 통하여 전달하겠습니다. 지금처럼 계속 환자를 지속 관찰하여 주시길. 그럼 돌아갈까, 커크 씨?”
“휴우. 예, 그렇게 하죠.”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으면서 커크는 말했다.

“엘리자베스 씨도 정말 수고하십니다. 곧 좋은 소식 가지고  거예요.”
“좋은 소식이라… 그런 게 있을까요?”

잠깐이나마 타올랐던 분노가 사라진 베스의 목소리엔, 타고 남은 잿가루의 회색빛만 가득할 뿐이었다.

행정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코넬리아는 말했다.

“베스 씨의 조치와 병동 지침대로 잘하고 계십니다.”

치료 자체는, 코넬리아도 감탄할 정도로 능숙하게 관리가 되고 있었다.

“다만 설사를 하는 사람과 멈춘 사람을 완전히 분리하세요. 그냥 나누는  아니라, 공간을 분리해야 합니다.”

콜레라 증상은 설사로 시작해서 설사로 끝난다.

“설사가 완전히 멈추고 이틀이 지나면, 퇴원시켜도 됩니다. 깨끗하게 씻기고 무조건 새 옷으로 갈아입힌 후 퇴원시키세요.”
“이틀 지나면… 퇴원….”

열심히 코넬리아의 말을 메모하는 커크.

 외에몇 가지 사항을  기록한 후, 코넬리아는  전에는 일부러 피했던 푹신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숙제하기 전에는 쉬어도 쉬는 기분이 아니지만. 지금처럼 커다란 일이  단계 지나간 후에는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몸의 근육 마디 마디마다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풀면서,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크으으응~”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순간에도 병동의 직원들은 차가운 바닥에서 모포를 깔고 누워 자면서 환자를 교대로 돌보고 있을 텐데.”
“응. 그래서?”

로드리의 말에, 소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우리들은 서로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병동에서, 나는 원장실에서.”

기지개를 쭈욱 피는 코넬리아의 몸이 고양이처럼 휘었다.

“내가 의원의 업무를 하려면 병동에서 활력 징후를 점검하는 게 맞겠지. 하지만 콜레라는 대증 요법(對症療法: 원인을 치료하기 곤란한 상황에서는 그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를 하는 치료법)이 최선이라서—”

머리 위로 뻗어진 소녀의 헐렁한 옷소매가 흘러내렸다. 어깨 위까지 내려간 소매 바깥으로, 가늘고 새하얀 팔이 드러난다.

“—로드리.”
“왜.”
“좀 전에 병실에서, 아까 간호사… 그….”
“베스.”
“그래. 베스. 좀 야무진 눈빛이 귀여운 아가씨였는데.”
“마음에 들었어?”

로드리의 말에, 코넬리아는 피식 웃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이름을  외울 리가 있겠냐. 그쵸, 커크 씨?”

대화를  듣는 척을 하고 있었던 커크는, 찔끔했는지 헛기침을 하였다. 그가 무심결에 바라본 코넬리아의 눈매는 가느다랗게 휘어져 있었다.

“후후. 농담입니다.”

둥글게 입가를 말아 올렸던 소녀는 다리를 꼬아 앉았다.

“엘리자베스 달링. 극동 전선에도 갈 정도로 열정적인 간호사인데, 분명히 귀족 출신이라고 했었지.”
“프랭크 달링 경의 후손이 아닐까 싶군.”
“프랭크 달링.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데.”
“칠십 오  전 북부 광산 경영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고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문이다.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는과거의 일이지.”

쌀쌀맞다고 생각될 정도로 로드리는  잘라서 선을 그었다. 코넬리아는 로드리의 판단이 언제나 마음에 들었다.

소녀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손가락을 입에 대었다.

“이 찰나의 나태함은 여신님도 너그러이 봐 주실 거야.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로드리는 품에서 꺼낸 지궐련을 소녀의 입술 사이에 물려주었다.

성냥갑을 꺼내면서 로드리는 책상에 앉아 있는 커크 쪽을 보았다. 뭔지 모를 서류를 부지런히 쓰면서 지궐련을 뻑뻑 피우고 있는 커크를 보니, 딱히 양해를 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내일 피울 한 개비를 당겨서 주는 거다.”
“어이쿠. 고마우셔라.”

성냥에 불을 그어서 코넬리아의 담배에 붙여주었다.

“스읍—”

고개를 소파 뒤로 젖힌 소녀의 목덜미가 꿀렁거리고, 이내 후우, 하고 날숨을 내보내는 입술 사이에서는 희끄무레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토해낸 숨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업무 시작하자.”

소녀의 말을 신호로. 로드리는 커크가 고개를 파묻고 있는 책상 서류 위를 툭툭 두들겼다. 대화에 껴들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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