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4)
“여기서부터는 일직선이다. 타지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도 이 정도 간단한 길을 잃진 않겠지.”
“그래, 그래. 재촉 안 해도 갈 거야.”
등에 떠밀리는 압력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 아니다.
코넬리아는 팔꿈치로 로드리를 밀어내고, 앞에 보이는 언덕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 한 번은 갈 곳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찾아갈 줄은 몰랐는데….’
여태 코넬리아는 구빈원이 어떤 곳인지 직접 찾아간 적은 없었다. 특별히 피한 건 아니었다. 소녀의 몸이 되기 전—렉스의 몸이었을 때에도, 단순히 구빈원과 인연이 닿은 적이 없을 뿐.
경의사의 몸이 되고 나서, 지금 가고 있는 바트나 시립 구빈원이 첫 체험이 될 예정이었다.
한 지역에서 가난하거나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설, 「구빈원」은 예로부터 소규모 지역 단위인 교구에서 주도하여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교구마다 구빈원의 생활도 차이가 컸다.
몹쓸 사람이 운영하는 구빈원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빈민들을 관리한다고, 코넬리아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거기에 빈민이 굶주린 나머지 피골이 상접한 동안, 밑바닥은 한 푼이라도 예산을 덜 쓰도록 지갑을 쥐어 짜내는 교구관리(敎區官吏)의 뱃살이 포동포동 차오르는 신문 삽화는 여기저기에서 쉽게 볼 수 있을 정도.
구빈원에 대해서는—빈말이라도—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로드리.”
“응.”
“어째 거리가 좀 으슥해 보이는걸. 기분 탓인가.”
앞으로 방문해야 할 곳이 기피시설이라, 자신이 편견으로 시야를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혹시라도 그런가 싶었지만, 로드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주변은 바트나에서도 치안이 안 좋기로 소문이 난 지역이다. 주민들도 혼자서는 잘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길이지.”
“그래. 우리 로드리가 그런 길을 선택했구나. 그래서 왜 하필 여기로 가는 거야?”
“이 길이 가장 짧은 일직선이라 헷갈리지 않거든.”
소녀에겐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이유였다. 그런 코넬리아를 달래려는 듯, 로드리는 뭔가 애써서 말을 이어나갔다.
“만약을 생각해서, 음, 나 없이 렉스 네가 혼자서 다녀야 할 경우가 생기면 분명 낮에는 괜찮을 거다. 나도 낮에 왔을 때는 괜찮았다.”
“조언은 고마워. 고맙긴 한데, 지금은 밤이잖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길한 느낌에 가볍게 몸서리를 치고, 코넬리아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바다에 닿은 항만은 완만한 경사 지형이지만 내륙 쪽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제법 가파른 경사길이다. 아까 마지막 이정표였던 스퀘어 가든에서 고작해야 한두 블록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바다 냄새는 점점 엷어져 가지만. 상대적으로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연립 주택단지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진해졌다.
질겁을 할 만큼 지독하진 않아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불쾌한 향취.
후각은 점점 둔감해지니까 괜찮아. 코를 훌쩍이면서, 코넬리아는 움츠러드는 어깨를 억지로 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바로 곁에 로드리가 있다는 게, 지금은 정말로 고마울 따름이었다.
자연스레 돈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항만 거리는, 밤을 잊을 정도로 밝은 조명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밤에는 잠을 자야 하는 주택단지 거리에는, 당연히 가로등이 훨씬 적었다.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건 들쥐뿐만은 아니다.
「휘리리이익—」 하고.
저 멀리 어디선가 경찰의 호각 소리가 들려온다.
‘악취는 그렇다 쳐도, 분위기는 둔감해지지 않는단 말이야….’
짙은 어둠에 있는 자들 사이로 걸음을 옮기고있는 코넬리아. 그 옆에서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단단히 에스코트를 하고 있는 로드리.
도시의 밤거리엔 어떤 이들이 있는지. 수도 앨버스에서 오랫동안 지내왔던 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낮과 밤을 잃어버리고 아무 곳에나 머리를 처박고 자는 술꾼들, 그런 주정뱅이의 호주머니를 터는 게 일상인 부랑자들, 길거리의 쓰레기 더미를 기웃거리는 넝마주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저 ‘빈집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일’을 좋아하는 빈집털이부터 시작해서 약간의 폭력을 사용하는 강도들까지 생각하면, 환한 햇빛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항구도시 바트나의 짙은 그림자는 여느 도시 못지않게 지저분하리라.
시끄럽게 떠드는 쪽은 오히려 덜 신경이 쓰였다. 정말 겁이 나는 건,가로등의 빛이 무자비하게 긋고 있는 그늘 밑에서, 말없이 흰자위를 껌벅이는 사람들이었다.
“두려운가?”
그 신경에 거슬리는 침묵의 사이에서.
뜬금없이 로드리가 입을 열었을 땐, 코넬리아는 오장육부가 덜컥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이 두려우면 손잡아줄 수 있는데.”
“하, 하하. 네가 겁나면서 내 핑계 대지 말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코넬리아는 로드리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래도 겁나는 연기는 해야지. 지금 나는 바트나 시에서 엄마를 잃은 제인 에이번이야.”
“연기인가. 그러면 이해를 해 줘야지.”
농담조가 아니라 진지하게 로드리는 소녀의 말에 납득하였다. 특이한 사고 회로를 가지고 있는 그의 귀에는 합리적인 이유로 들렸을지 몰랐고.
그 설득력은 아마 가늘게 떨리고 있는 코넬리아의 손에서도 적잖이 힘을 얻었을 것이었다.
소꿉친구의 티가 나는배려에, 코넬리아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몸이 작아졌어도 해도 고작 어두컴컴한 골목길 보고 내심 겁부터 먹을 정신 연령은 아니었다. 코넬리아의 몸속에서 렉스의 이성은 건재하였다.
건재한 만큼, 지금 자신의 이 자그마한 육체로는, 뼈다귀처럼 말라비틀어진 부랑자 서넛이 모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거라는 현실도 제대로 직시하고 있었다.
뻔뻔한 마음과, 후들거리는 몸의 부조화 속에서.
길고 긴 밤거리를 지나쳐, 마침내 구빈원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코넬리아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후우~….”
긴장을 푸는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힘이 풀리는 무릎에 손을 짚어 섰다. 로드리는 굳게 닫힌 구빈원의 철제 대문을 잠깐 흔들고는 경비실로 이어지는 초인종 줄을 당겼다.
달그랑 하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창문이 열리고, 경비원의 졸린 눈이 나타났다.
“누구요.”
“로드리 필립, 그리고 동행인 하나. 선약이 되어 있을 거다.”
무뚝뚝하게 말하는 로드리 옆으로 온 코넬리아도 웃으면서 말했다.
“에, 에헤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제인—”
「덜컹」
애써 웃던 소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경비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구빈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철제 대문을 열어주었다.
“현관에 슬리퍼가 있지만, 굳이 갈아신을 필요는 없소.”
“친절한 설명 고맙군. 수고해.”
탁탁, 경비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곧장 안으로 들어가던 로드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어서 들어오지 않고.”
“으… 으응….”
코넬리아는 터벅터벅, 구빈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대문 안쪽으로 들어오자, 곧장 대문을 잠근 경비원은 하품하면서 경비실로 돌아갔다.
둘만이 남게 되자 코넬리아는 지끈거리는 이마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렇게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거, 낯이 익은 경험인걸.”
“그런가. 음. 낯이 익으면 충격은 덜하겠군. 좋은 경험이다.”
별로 특이하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 생각했는지. 코넬리아의 말을 가볍게 흘리고, 로드리는 구빈원의 현관으로 향했다.
언덕 아래에서부터 보이던 시립 구빈원 건물은, 행정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종교 건물이다. 그 뒤로 최근 기술로 시공이 된 신식 건축물은 디귿(ㄷ) 자 모양으로 뻗어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이 한눈에 보이진 않았다.
둘이 들어간 행정관도 겉모습만 두어 세기전의 고풍스러운 디자인이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모습은 여느 새로운 공공시설에 뒤처지지 않게 말끔한 실내 장식과 시설이 꾸며져 있었다.
“우와, 끝내주게 돈을 바른 흔적이구먼…….”
띄엄 띄엄이나마 등유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는 로비층 복도는, 적어도 천장과 바닥을 분간할 정도로는 빛이 퍼져 있었다.
새로이 시멘트를 바르고 왁스 실러가 도포된 복도 바닥은 윤기가 반들거렸다. 그 위를 적시는 램프 불빛은 호숫가 저녁놀처럼 점점이 흩어진다. 앞서 걸어가는 로드리는 주황색으로 젖은 구두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정지한 곳은, 복도에서 유일하게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문 앞이었다.
소녀도 나란히 옆에 섰다.마주 보는 문의 눈높이에 다소 딱딱한 글자로 [원장실]이란 이름표가 붙어 있다.
코트를 벗어서 팔에 걸고, 로드리는 똑똑똑, 노크 세 번을 하였다
“왔다. 커크.”
그가 말하자, 문 너머에서 “들어오세요”란 답변이 들려 왔다.
원장실 안으로 들어가니 둘을 기다리고 있던 중년 남성이 반갑게 팔을 벌렸다. 로드리와 가볍게 포옹한 그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녹색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로드리 씨.”
반갑게 인사를 하는 그의 모자에는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나침반 별이 그려져 있다. 국교회가 아닌 다른 종파의 상징이었지만, 구원군 소속이면서도 로드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 놀란 건 코넬리아 쪽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쭈뼛 내민 코넬리아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커크는 움푹 패진 볼로 씩 웃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인상이 꽤 다르죠?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사각 철테 안경을 쓰고 있는 커크는 정말로 삐쩍 마른 체형이었다. 교구관리(敎區官吏)를 맡은 그의 소탈해 보이는 작업복은 꾀죄죄한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탁자 주위에 코넬리아와 로드리가 나란히 앉자,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그는 찻주전자에 우러난 차를 손수 찻잔에 따랐다.
“유명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했었죠. ‘구빈원의 역할은 장의사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고. 저희 구빈원도 삼십 년 전에는 아마 아가씨의 인상 속에 떠오르는 그런 몹쓸 모습이었을 겁니다.”
“하하하….”
코넬리아는 찻잔을 들며 그저 작게 웃었다.
‘말조심해야지, 조심조심.’
미리 로드리와 짜 놓았던 ‘인물 설정’에서 코넬리아는 구빈원 출신 소녀였다. 잘 알지 못하는 정보로 실언을 하였다가는 순식간에 들통이 날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제인 에이번, 위더랜드 시, 성 아우구스투스 구빈원, 엄마 이름은 메어리….’
마음속으로 열심히 자기 암시를 걸고.
뜨거운 차를 후후 불며, 어색하게 웃음만 흘리는 코넬리아. 그런 소녀를 보면서 커크는 갸우뚱하더니.
“로드리 씨. 설마, 이 분이….”
“증빙 자료는 없어도 믿어야 한다. 나를 믿어라.”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코넬리아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사이에.
그 둥그런 어깨에 어깨동무로 팔을 떡하니 걸치고, 로드리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 애가 아르샤를 뒤집은 걸로 소문이 난, 바로 그 경의사다. 코넬리아 B.”
“어? 야, 야!”
로드리의 폭탄선언에 코넬리아는 앉은 자세에서 머리가 천장에 닿을 만큼 펄쩍 뛰는 착각이 들었다.
현실은 몇 센티미터 엉덩이만 들썩였겠지만.
“너 미쳤어? 그걸 왜 말해!”
“호오, 이분이 정말로….”
소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커크는 놀랍다는 얼굴로 안경을 고쳐 썼다.
“좀 더 정중하게 모셔야 하는데. 허허,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아, 아닙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저 제인이에요, 제인 에이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코넬리아다.”
“잠시만요. 커크 씨. 그리고 로드리 너도 잠시만 입 다물어.”
코넬리아의 보기 드문 도끼눈에, 로드리가 정말로 말을 멈췄다. 그 침묵은 아마도 길지 않을 터였다.
조금 전까지의 위조 신분 암기는 대체 무엇이었던 건지.
그리고 왜 갑자기 이 새끼가 내 정체를 죄다 까발리고 있는 건지.
짧은 시간 안에 필사적으로 두뇌를 굴려서 얻은 결론은, 로드리와 단둘이서 말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커크 씨. 죄송하지만 잠시만 자리를 피할 수 있을까요? 로드리와 개인적인 사담을 할 게 있습니다만….”
“대화는 여기서도 할 수 있는데. 렉—”
“아와와! 아와와와!!”
입에서 무슨 소리를 내는지도 모르게, 코넬리아는 황급히 로드리의 말을 자신의 괴성으로 덮었다.
“화장실 잠깐 같이 다녀 올게요! 화장실 어디 있습니까?”
“예. 2층 계단 올라가면 바로 보일 겁니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커크를 뒤로 한 채. 코넬리아는 로드리를 억지로 붙잡고 질질 끌어서 원장실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