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2)
질끈 눈을 감은 아렌드는 그녀가 넘겨주는 옷가지들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양손으로 둥글게 뭉쳤다. 소년의 손바닥 사이에 잡혀 있던 옷가지 뭉치는, 노란 섬광을 내뿜고는 일순간에 잿빛 가루로 변했다.
그 사이에 재클린은 문 옆으로 돌아왔다. 가슴과 허리를 감싸는 속옷 차림으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매튜는 재킷을 벗어서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매튜 씨!”
뒤이어 건네받은 도자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다 같이 면담실에서 나가기 직전, 재클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혹여나 흘리고 간 물건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면서.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 프로비던스를 향해 눈을 감고 잠시간 묵념을 하고, 셋 중 마지막으로 면담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직도 직원들이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플로어를 지나친 셋은, 승강기가 아닌 계단으로 향했다.
한참 동안 머무른 것처럼 느껴졌어도 이십 층에서 그들이 보낸 시간은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최상층 직원들이 깨어나기 전에, 재클린과 동료들은 빠르면서도 성급하게 보이지 않게 계단을 후다닥 내려왔다.
입에서 뗀 도자기 파이프는 각자 케이스 홀더에 넣고. 로비층에 도착한 그들이 향한 곳은, 보는 사람들의 눈이 많은 정문 쪽이 아니었다.
[청소 중]이라는 팻말을 치우고 뒤쪽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으로 빠져나와, 재클린 들은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온종일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로비층보다 한 층 아래 높이인—정원은 사실상 에포크 빌딩의 사용인들이 쓰는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부랑인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폐문에 감겨 있던 쇠사슬은, 도주 경로를 준비하면서 미리 잘라두었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폐문을 열고.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들어가서 굽이굽이 빌딩의 반대 방향으로 향하던 그들은, 큰 거리로 나가기 전에 걸음을 멈추었다.
재클린은 깊게 눌러 쓰고 있던 페도라 모자를 벗었다. 앞머리칼을 고정하고 있던 머리핀을 풀자, 언밸런스 보브컷의 짧은 은발 옆머리칼이 귀 끝을 간지럽히며 흘러내렸다.
그녀를 따라서 매튜와 아렌드도 모자를 벗고, 족흔적(足痕跡)을 바꾸기 위해서 미리 덧대어뒀던 밑창을 떼어내었다.
주섬주섬 밑창과 모자를 챙겨 쥐는 소년에게.
“아렌드 씨, 이것도요!”
“부탁한다. 아렌드 군.”
아주 당연하게 부탁하는 둘을 교대로 바라보던 아렌드는 한숨을 쉬고, 그들의 자신의 것과 겹쳐 쥐었다.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시커먼 가루가 되었다.
“큭큭… 이런 건 일도 아니지. 너희들은 못 하는 거지만…!”
재가 묻은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아렌드는 코웃음을 쳤다.
“나란 분이 없으면 너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구만!”
“그렇죠~ 아렌드 씨처럼 도움이 되는 분과 함께 한다는건,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우린 네 동료란 게 정말 자랑스럽다, 아렌드 군.”
아렌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상찬을 읊어대는 둘.
어깨를 으쓱거리는 소년의 기분을 좋게 하려는 말치레 의미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걸 제외하더라도, 재클린과 매튜의 말에는 정말 아렌드와 함께해서 고마운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럼 두 시간 후 레드우드 지부에 모이죠. 계획대로 행동해요.”
재클린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으로 북적이는 큰길로 나서자마자 매튜와 아렌드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완전히 묻히는 걸 확인하고, 재클린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법 더운 날씨지만 어쩔 수 없이 턱 끝까지 재킷을 여민 채로.
재클린은 빌딩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미리 대기시켜 놓았던 이륜마차에 서둘러 올라탔다.
“동행인은?”
마부의 말에 재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거기에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마부는 가볍게 채찍을 당겼다. “이랴!”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마차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 마차는 이제 한참 동안 레드우드 동구(東區)의 명소를 여기저기 돌아다닐 것이다. 중간에 배가 고프면 식당에 들러도 되고, 목이 마르면 상점가를 잠깐 찾아가도 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도시 여행이었다.
승객 칸에 준비해 두었던 기차 승무원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재클린은 프로비던스의 끔찍했던 몰골을. 그리고 그가 숨겨두고 있었던 헝겊 주머니를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히 의미가 없는 물건은 아닐 건데….’
이곳—레드우드 시에서 수도위생국과 공조(共助)하면서 함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재클린은, 코넬리아 대신 『경의사』를 맡고 있었다.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왕립의학원 레드우드 지부의 사람들과 수도위생국소속으로 파견된 인원들은 그녀를 「코넬리아 B.」로 여기고 있다.
연합왕국 남방 지역에서 내로라할 중형 도시인 레드우드. 이 지역 사회를 진단하고 치료해야 할 최종 권한을 재클린이 떠맡았다.
코넬리아가 내린 결정대로 움직였던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큰일이네. 속이 너무 불편하니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멀미하는 건 아니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부터 그랬으니까.
목구멍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억누르고. 재클린은 좁은 창문 밖을 보았다.
일주일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준비하였던 접선은 허무하게 끝났다.
매튜에게는 “헛걸음친 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제일 중요한 접선인을 잃어버린 건, 어떻게 포장하여도 성공스러운 작전이라 하긴 어렵겠지.
완전히 모든 단서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으니 최악의 상황을 피하긴 했어도 그다지 위안은 되지 않았다.
만약 오빠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같이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던 매 순간이, 이제라도 되짚어서 생각해보면, 전혀 가볍게 넘길 선택이 아니었다.
어쩌면렉스 휴크레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만의 착각일 지도.
괜히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해진다. 재클린은 머리를 벽에 기댄 자세로 눈을 감았다. 마치 심야의 외역 기차를 타는 것처럼 마차는 덜컹덜컹 신나게 흔들리고, 딱딱하고 쿠션이 없는 의자에 앉은 엉덩이는 금세 아파져오기 시작했다.
“하하…♪”
이 답이 없는 난처한 상황에 재클린은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즐겁거나 재밌어서 그런 게아닌, 단지 자신의 어두워지는 감정을 애써 바꾸려는 작위적인 웃음.
배꼽을 잡고 킥킥거리는 여성 승무원복 차림의 손님을 태운 이륜마차는, 다른 수많은 마차가 오가는 거리 복판으로 스며들었다.
* * * * *
“음?”
찌릿한 두통에, 코넬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런 소녀의 반 걸음 뒤에서 따라 걷던 청년—로드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등 뒤에서 떠밀려서, 힘차게 튕겨 나온 코넬리아는 몇 걸음 비틀거렸다.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휴, 아니다, 말을 말자….”
코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하려는 소녀의 등 뒤에서 로드리는 양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러는가. 어디 불편한가?”
단단히 붙잡힌 어깨는 여간해서는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코넬리아는 얼굴을 위로 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그래. 긴장해서 그런 건가.”
“긴장한다니. 네가 그런 걸 할 리가 없는데.”
고개를 아래로 내린 로드리의 짙은 브랜디 빛 눈동자는, 코넬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소문난 렉스 휴크레이도 별수 없네. 고작계집애 같은 몸이 되었다고, 마음마저 나약해진 건가?”
“도발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로드리. 대체 누구한테서 배운 거야….”
기분이 상할 단어를 정성스레 골라서 꺼내는 걸 보면,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어처구니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코넬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한 입 베어 물었다.
“누군가를 화나게 하려고 그 사람을 바로 공격하는 말을 하면 안 돼. 노골적인 공격을 들으면 거꾸로 경계하게 되거든. 우물우물, 특히 나 같은 성격인 사람들은.”
“음. 고마운 조언이다. 앞으로 참조할게.”
“게다가 바로 몇 분 전에 이 맛있는 걸 사 준 로드리가, 나한테 다짜고짜 나쁜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소녀가 붕붕 흔드는 손에 들려져 있는 건, 길쭉한 페이스트리 반죽을 튀겨서 설탕과 향신료를 잔뜩 뿌린 츄러스(churros)였다.
연합왕국 남해안에 맞닿아 있는 남방 직할시 ‘바트나’는, 항구도시(港口都市)라는 명칭에 걸맞게 바다 건너에서 밀려오는 수많은 이국적인 문화가 뒤섞여 있다.
그중에서도 이제야 막 바트나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외출을 하는 코넬리아에게 바로 와 닿는 건 바로 이 따끈따끈한 츄러스.
달콤하면서도 기름지고 바삭한 식감과 함께 페이스트리의 버터 풍미는 혓바닥과 입안 전체를 농후하게 채운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흩뿌려진 향신료는, 이 빵은 연합왕국 안에서 존재할 수가 없었던 음식이며—앞으로도 코넬리아가 직접 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지 않는 한—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한 바트나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