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3막 (上) 내일은 아주 바쁜 하루가 될 테니 (1)
- 3막 -
- 연합왕국, 레드우드 시(市)
- 중구 사무지역
고층 승강기가 도입된 건물은 점점 하늘을 향해 경쟁하듯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가장 높은 건물은, 창립자의 이름을 딴 「에포크 보증금융 빌딩」이었다.
하나의 승강기도 과분하게 여겨지던 때, 그 건물에는 무려 일곱 라인의 승강기가 쉴 틈 없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그 날은 공교롭게도 여섯 라인이 동시에 비상정지를 한 상태.
오직 한가운데의 승강기만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종착지는 최상층, 21층.
도착한 승강기에서, 흔한 형태의 양복을 입은 자 셋이 차례대로 내렸다. 작고 가느다란 체형의 사람 하나, 옷이 터질 정도로 우락부락한 근육질 체형 하나, 그리고 몸도 팔다리도 시원시원하게 뻗은 장신 하나.
옷맵시는 특이하지 않았다. 언뜻 시야에 들어오는 정도로는 그저 ‘흔히 지나가곤 하는 사람’ 정도로만 받아들일 정도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들을 주의를 기울여서 본다면, 위화감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상·하의는 다들 제각각의 남성 기성복을 입었지만, 챙이 넓은 페도라(fedora) 모자를 쓴 차림. 앞으로 살짝 기울인 모자 덕택에 그림자가 진 눈매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같이 새하얀 도자기 파이프가 물려 있다.
“이봐, 당신들—”
문 옆에 서 있는 나이 든 경비원 하나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셋 중 키다리가 허리에 감추고 있던 경찰봉을 내밀었다.
손바닥 안에 착 감겨서 쥐기 좋은 경찰봉의 손잡이에는, 금박과 각종 염료로 화려하게 새겨진 왕가 문장(紋章)—『로열 크레스트』가 붙어 있다.
경비원이 그걸 보면서 뭐라고 물어보려는 찰나에. 도자기 파이프를 입에 문 채로 키다리가 쉿, 하는 자세를 취했다.
“어어….”
잠깐 할 말을 잃은 찰나의 시간.
한 번 호흡하는 그 짧은 시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변(異變)을 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키다리가 경비원의 시선을 탈취한 사이에. 근육질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시계방향으로, 마른 소년은 시계 방향으로 사무실 주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코트 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작은 구슬에서는, 그 안에 스며든 액체가 기화하면서 투명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호두 열매 정도 크기인 그것들을 발로 톡톡 차면서 사무실 여기저기로 흩뜨리고.
중앙 통로 끝에서 다시 만난 둘은, 면담실로 이어지는 복도 앞에서 거추장스럽게 쓰러진 직원들 위로 넘어 들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의식을 잃은 건 그들뿐만이 아니다.
플로어에서 근무 중이던 마흔 명 남짓한 직원들 모두 책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몇몇은 조금 무서운 각도로 고개를 푹 박고 있었고, 기지개라도 켜고 싶었던 직원은 만세 자세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 채 꿈나라로 가버렸다.
승강기 앞에서 가로막았던 경비원도 그새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 사이로 키다리는 느긋하게 걸어왔다.
또각또각.
일부러 키를 한 뼘은 더 크게 보이게 하려고 신고 있는, 높은 통굽구두에서 나는 발걸음 소리가 플로어를 청아하게 울린다.
창문 밖으로는 여느 월요일 아침의 길거리 풍경이 여느 때처럼 펼쳐지고 있다. 얇은 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잡음이 이 층의 공기를 가득 채워주고 있다.
옆으로 내리쬐는 눈 부신 햇살을 굳이 피하지 않고.
키다리는중앙 통로를 지나쳐서 동료가 먼저 지나갔던 길을 따라 면담실 앞에 섰다.
「스읍—」
도자기 파이프에서는, 좁은 틈을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약하고 가는 호루라기 소리가 퍼져 나온다. 키다리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수화(手話)로 손짓했다.
『문은 열리는가?』
그 말에, 마찬가지로 파이프를 물고 있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안에서 잠긴 문은 덜컹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기만 할 뿐, 당겨도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앞장서서 손잡이를 몇 번 힘을 준 소년은 뒤로 물러섰다. 그 앞으로 선 근육질이 양손을 문 앞에 대었다.
잠깐 그렇게 서 있던 사내는, 의아한 듯 눈썹을 비대칭으로 찡그렸다. 문에서 손을 뗀 그는 키다리에게 손짓했다.
『활력 반응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한가?』
『이샤카의 명예를 걸고.』
사내가 손짓하기가 무섭게, 키다리는 소년에게 신호를 보냈다. 소년은 오른손을 주먹 쥐었다.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수증기가 주먹 위로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걸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키다리는 정중하게 노크를 하였다.
똑, 똑.
당연히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도자기 파이프를 빼내고, 말했다.
“회장님, 안에 계십니까?”
언뜻 듣기에는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운 알토 톤의 목소리.
형식적으로 하는 말을 끝마친 키다리는 곧장 파이프를 다시 입에 물고 비켜섰다. 그 자리로 다가와 선 소년은 오른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쇠로 만들어진 손잡이는 후끈거리는 열기를 뿜으며 곧장 떨어져 나왔다. 치즈처럼 녹아내리는 손잡이를 조용히 발 옆에 내려놓고, 잠금장치로 이어지는 구멍을 두 손가락으로 후벼 파냈다.
잠금장치를 물리적으로 제거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힘없이 벌어졌다.
경찰봉을 쥔 채로 키다리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서 동료들도 들어오자마자 문을 닫고, 파이프를 입에서 떼어냈지만.
“읏. 비린내.”
소년은 질색하고는 곧장 다시 물었다. 마찬가지로 영 거북한 표정인 근육질의 사내는 키다리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귀족이나 왕족이 언제 찾아오더라도 격식에 어긋나지 않도록, 한두 세기 이전의 고풍스러운 장식품으로 꾸며진 면담실의 가운데.
각종 다기(茶器)를 놓아서 대접할 수 있는 낮은 탁상 주위로 응접용 안락의자가 있다. 물소 가죽에 호화로운 적갈색 나무로 만들어진 그 의자엔, 한 사람이 앉은 자세로 놓여 있었다.
“예사로운 짓이 아니군요.”
사내의 말대로였는지. 팔짱을 낀 자세로 키다리는 “끙—…”하는 소리를 흘렸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건 몸에 착 붙는 조끼를 입은 정장 차림의 남자. 그 남자의 아래턱 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자연스럽게 반듯한 절단면은 일부러 줄을 긋고 잘라내려고 해도 어려울 정도로 말끔하였다. 윗입술 언저리부터 사라진 머리의 절단면에서 흘러내린 피가 남자의 상의를 듬뿍 적시고 있었다.
“경의사 씨,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영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근육질의 물음에.
팔짱 낀 채로 얼굴을 완전히 구긴 경의사—재클린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닥에 흘러내려서 작은 실개천을 만들기 시작한 핏줄기를 피하며, 재클린은 조심스레 시체에 도착했다. 근육질 사내는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면담실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중요한 기회를 놓쳤습니다. 한발 늦어버렸군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재클린은 품속에서 가죽장갑을 꺼냈다. 그리고 남아있는 아래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녀가 왕립 의학원 레드우드 지부에서 받은 ‘접선 당사자’의 정보에는 온갖 시시콜콜한 신원 확인 내용이 있었다. 그중에는 [치아치료 내역] 또한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사십 대 중반답지 않게, 심하게 상해서 앙상해진 치아는 누렇고 악취가 심하게 났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클린은 피에 잠겨진 치아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미리 전달받은 인상착의. 발치(拔齒)된 흔적. 아말감 충전을 거친 치아. 예, 프로비던스 S.가 맞습니다. 오늘 저희가 만나야 했던 중요 인물입니다.”
“헛걸음을 친 것도 모자라서 함정에 빠졌군요.”
사내의 한탄에는 일리가 있었다. 이대로 만약 누군가에게 지금의 상황을 들킨다면, 그 누가 보더라도 수상해 보이는 건 그들이었다. 그렇게 안색이 어두워진 사내와는 달리.
“성급한 판단입니다. 매튜 씨.”
재클린은 응고되기 시작한 피로 끈적해진 장갑을 자신의 재킷에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말했다.
“옷차림이 깔끔합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몸수색을 게을리했다는 거죠♬”
그녀는 피로 질척하게 젖은 시체의 조끼며 셔츠며 바지를 부지런히 헤집었다.
구석구석 주머니란 주머니는 모조리 찾아보던 재클린은 문득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재클린이 마주 보고 있는 응접 의자의 뒤에서, 코 밑에 박하유를 바르고 입에서 파이프를 뗀 소년이 말했다.
“찾았어? 경의사 씨, 뭔가 찾은 거지, 응?”
세로 모양으로 길게 찢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린다. 곱슬거리는 적갈색 머리칼은 모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날카롭게 튀어 나온 송곳니는 입술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 이 소년에게 꼬리라도 달렸으면 마구 흔들거리고 있었겠지. 마치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며, 재클린은 말했다.
“예. 찾았습니다. 아렌드 씨.”
단단하게 조여져 있던 허리띠의 안쪽.
면바지의 속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더러운 천으로 돌돌 둘러싸인 무언가였다. 얇은 천 너머에 있는 게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감촉은 단단하고 작은 조약돌 같았다.
감싸여진 헝겊을 펼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재클린은 헝겊을 칭칭 감고 있는 끈을 풀지 않았다.
여기서 확인할 수는 없겠지.
현실적인 판단을 빠르게내린 재클린은 그것을 근육질 사내—매튜에게 던졌다.공중에서 헝겊을 낚아챈 그는 왼손으로 자신의 재킷을 펼치고, 그 밑으로 받쳐 입은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아. 이것도 잠깐만 받아 주세요.”
그때 무슨 생각이 떠오른 건지, 재클린은 자신의 도자기 파이프도 매튜에게 건네었다.
옷에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매튜와는 달리 그녀는 완전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피로 완전히 젖은 재킷을 벗고 목을 바짝 조이던 넥타이를 끌어 풀었다.
“헝겊 주머니 내용물은 의학원 지부에서 확인하겠습니다. 돌아가는 즉시 참관인을 준비하세요.”
재킷을 벗기가 무섭게, 이번에는셔츠 차례였다. 상의를 훌렁훌렁 벗는 재클린을 보면서 소년—아렌드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손으로 자기 눈을 가렸다.
“마, 마, 망측한 짓을!”
“망측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바로 지난주까지, 코넬리아와 다닐 때는 언제나 대화의 주도권을 헌납하던 재클린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지금 그녀와 함께 다니고 있는 자들은 수도위생국에서 특별히 ‘빌려준’ 직원이었다.
얇은 속옷 위로, 피가 묻은 상의는 모두 벗은 재클린이 웃으면서 말했다.
“옷 정도는 아렌드 씨도 멋지게 입고 있잖아요♬”
“입고 있는 거지! 벗는 건 아니잖아, 인간!”
완전히 빨개진 얼굴에서는 김이 팍팍 솟아올랐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뜨겁게 공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생글 웃는 낯으로 가죽장갑까지 마저 벗은 재클린은 그것들을 소년에게 내밀었다.
“재로 만들어 주세요.”
경의사의 명령은 절대 권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