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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화 〉2막 (下)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 4 (34/111)



〈 34화 〉2막 (下)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 - 4

노인은 풍화된 이름을 쓰다듬었다.

“아내는 여기에 잠들어 있지.”
“저런….”

작게 탄식을  코넬리아.

클레멘트가 쓰다듬는 『알리사 클레멘트』란 이름 아래, 새로이 새겨져 있는 이름은 『허먼 클레멘트』.

“이제 곧 나도 영원한 잠에 빠질 거 같아서 말이지. 크, 성격 급한 영감이지?”

노인의 혼잣말은 누군가의 호응을 바라는 말은 아니었다.

삼십여 년 전에 공방지대에서 일어났던 재해는 코넬리아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러기에 자세하게 어떤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양으로 일어나든, 이 무수한 십자가의 숲에서는, 어느 날 어느 순간, 아주 많은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하얗게 덧칠한 철제 구조가 노을빛으로 물든.
거대한 십자가의 숲속에서라면.

“나의 시간은 그때 그 시간에 멈춰 있어. 아들은 멋대로 자랐고, 멋대로 여기에서 떠나갔지. 우리는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클레멘트의 멈춰진 말은 저녁 바람의 습기에 잠겨 있었다.

뒤이은 침묵.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대화의 공백을 채우는  땅거미가 드리워지는 저물녘의 바람뿐이었다.

한동안 가만히 십자가 앞에 서 있던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미안하군. 기껏 불러놓고 이런 남의 가정사를 들려주다니.”
“저어…….”

재클린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더 이어나가지 못하였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노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자네들에게 화풀이를 한  미안하게 되었네. 성격 괴팍한 늙은이의 투정은 참 듣기 싫지. 이해하네.”
“아뇨,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아들이라고 키운 놈은 그런 녀석들의 어느 구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쯧쯧.”
“아하하, 그래도 아드님에게 말을 좀 심하게 하시는  아닌지~….”

재클린이 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심하다고? 하, 심한 건 아들을 꾀어서 바트나로 보내버린 시내의 의원들이지.”

그렇게 말한 노인은, 손에 쥐고 있던 캐러멜의 종이 껍질을 벗겨서 십자가 앞에 놓았다.

“난 의원이 너무 싫다네. 끔찍하게 싫어.”

노인은 말했다.

“살리는 환자보다, 살리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지. 그렇지 않은가?  발로 서서 진료소에 들어간 이웃이 누워서  천에 덮인 채 나온다네. 이게 일상이라고!”
“클레멘트 씨. 하나만 여쭈어보겠습니다.”

잠자코 노인의 말을 듣던 코넬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의원을 싫어하면서, 왜 저희를 도와주려는 겁니까?”

답을 얻는다손 치더라도 별로 도움이 되는 질문은 아니었다. 손실과 이해관계를 따져 본다면 그냥 알고도 모르는  넘어가는 게 낫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분노 안에 숨어든 진심을 알 수 없어.)

오늘 하루만 만나고 두 번 다시  볼 사이였다면 모를까.

앞으로는 더욱 깊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알아야 하는 마음은 알아두는 게 좋다.

단순히 아들을 공방이 아닌 의학원으로 빼앗긴 화풀이만 하는 건 아닌 듯하니까.

적어도 코넬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게 말일세. 콜록콜록!”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에 노인은 한참 동안 입을 막고 몸을 움츠렸다. 코넬리아가 등을 쓰다듬어 주자, 천천히 기침은 사그라들었다.

“내가 슬펐던 순간에는 언제나의원이 있었지. 아들이 나를 떠날 때도, 그리고 아내가 떠날 때도.”

눈을 감고, 중얼거리는 노인.

그 눈꺼풀이 뒷면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떼던 아들이 떠오른다. 아내는 여전히 그때의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행복의 기억은  번을 떠올려도 흐려지기는커녕 점점 진해져 갔다. 뒤이어 떠오르는 어두운 기억마저도.

피투성이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아내는 작별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삼십 년쯤 전의  순간.

젊었을 때의 자신은 아내였던 걸 품에 안고 있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 복도의 한구석이었다.

응급 환자로 가득한 임시 진료실의 한쪽 구석에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클레멘트의 귀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가는 의원들과 간호사들도, 하나 같이 납빛이 된 얼굴이  채 쉰 목소리로 대화를 한다.

그들은 아직 살아 있는 환자들과 죽지 못한 환자들 사이를 다니면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피투성이가 된 가운을 입은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 사람은 아내의 손목에 검은 끈을 감았다.

노인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의원들이라고 해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거잖아.”

클레멘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으로 눈을 비볐다.

“원망할 상대가 필요할 뿐이라는 거야. 나처럼 마음이 아픈 채 늙어버린 사람은.”
“클레멘트 씨….”

재클린이 뭔가 굉장히 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짓자,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동정하는 눈빛은 보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네. 댁들이 꼴 보기 싫은  여전하다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는 양, 자리를 털고 이동하려는 클레멘트. 여전히 근육은 붙어 있지만 쇠약해지는 기세를 숨길수 없는 그의 팔을 코넬리아가 붙잡았다.

“그 말씀. 저에게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똑바로, 노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코넬리아는 물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저희와 어울려 주시는 겁니까?”
“난 댁이랑 어울리는 게 아닐세. 댁도 누군가의 가족이겠지?”

자기 나름대로는 위트를 담으려는 양.

클레멘트는 조금은 억지로 쥐어 짜낸,썩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가족을 잃는 가족을  손으로 만들고 싶지 않을 뿐이야.”

그의 말에는 ‘너희들과는 다르게’라는 단어가 숨어져 있다. 코넬리아는 노인이 자신에게 보여준 악의를 반박하려고 하지 않았다.

클레멘트의 말은—아마 그도 딱히 기대하진 않았겠지만—코넬리아에겐 그다지 놀랄 만큼의 특별한 악담은 아니었다.

의원의 업을 짊어진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고.

수련의원 시절에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었다.

치료가 생각보다 더디거나 상처가 곪아갈 때, 내과적인 약물치료에서 원치 않은 부작용이 생겼을 때 등등. 환자에게서 원망을 사는 건 불행히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차라리 다행인 축에 속한다.

염습(殮襲)하는 장의사만큼이나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게 되고, 셀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짊어졌다.  분노는 덧없이 아무 방향으로 향하고 이내 사라졌지만.

“…감사합니다.”

코넬리아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말했다. 소녀의 감사 인사를 들은 클레멘트는 흥, 하고 가볍게 코웃음을흘렸다.

아마도 그는 이 도련님이 자신에게 꺼낸 감사 인사의 뜻을 단순히 ‘자신을 도와주기 때문’이라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코넬리아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내면의 얼굴로 쓰게 웃었다.

만약 모든 경우를 ‘옳고 그름’이라는 두 가지로만 나누어야 한다면, 클레멘트의 원망은 어느 쪽에도 들어갈  없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원망이 가리키는 방향은 너무나도 올곧고, 그렇기에 더욱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다.

“그래도, 이번 일을 마지막 일이라고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클레멘트 씨.”

코넬리아는 고슴도치가 되어 피가 흐르는 마음에서. 방금 꽂힌 화살 하나를 뽑아내었다.

“제가 클레멘트 씨의 보람찬 대상이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하나도  아픈 것처럼.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코넬리아는 그 화살을 클레멘트에게 건네주었다.

“그 보람이끊어지지 않고 이어가게 해주세요. 계속 도와주세요. 저 아닌 다른 이에게도.”
“역시 배운 녀석들의 혓바닥은 잘 돌아가는군. 무슨 윤활유라도 치는 건가?”

이죽거리면서 되받는 클레멘트의 비아냥에도 코넬리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수도에 오시는 건 언제든지 오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전에 꼭, 자제분을 먼저 만나시길 바랍니다.”
“허어, 갑자기 그 이야기는—”
“더늦기 전에 말입니다. 클레멘트 씨.”

단호하게 잘라 말하는 코넬리아의 말에. 노인은 그 투덜거림이 많던 입을 다물었다.

클레멘트의 진폐증(塵肺症)은 상당히 진행되어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는 단계였다. 유독한 공방 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된 장인들 사이에서는 드물지 않은 병증이었다.

아마도 노인의 주위에서도 비슷하게 세상을떠난 이가 여럿 있을 터.

동네에서 어중이떠중이가 만들어 파는 기침약을 먹으면서 지내고 있겠지만, 먹을 때에만 일시적으로 증상이 나아질 뿐.

자신의 잔명(殘命)이 넉넉지 않음은 그 누구보다도 클레멘트 본인이  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지. 코넬리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렉스 휴크레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저희에게 삶의 마지막을 의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당신의 남은 인생을, 당신이 제어할 수 있습니다.”

코넬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 있던 재클린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클레멘트의 어깨 위를 덮어 주었다.

“허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군. 애송이에게 늙은이 걱정을 시키다니….”
“저도 당신을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코넬리아의 자그마한 저주가 드디어 클레멘트로 향했다.

“아들에게 당신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말게 하세요.”

그 저주는 두 팔을 어린아이처럼 활짝 벌려, 피투성이가 된 노인의마음을 감싸 안았다.

“언젠가 아내분을 만나 뵐 때, 아들과 사이가 나쁜  저희 탓으로 돌리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꼭 방금 제가 드린 말씀을 지켜주시길 바래요.”
“후, 후후, 흐흐으….”

웃음을 흘리는 클레멘트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 들썩임이 잔잔해지고, 코넬리아는 손수건을 노인에게 건넸다. 젖은 얼굴을 닦은 노인은 언제 그랬냐는 양.

“내일 해가 뜨자마자 바로 와라. 멋진 선물을  줄 테니.”

주름진 얼굴 아래로 보이는 건,  어느 때보다도 밝은 청년의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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