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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2막 (中) 의원을 증오하는 사람 - 3 (28/111)



〈 28화 〉2막 (中) 의원을 증오하는 사람 - 3

“무언가 짚이는 거라도 있으신지.”

코넬리아의 질문에 말없이 웃는 그녀는 커피알이 부풀어 떠올라 있는 유리컵을 잡았다. 그걸 플린저로 덮고, 뚜껑처럼 컵을 막는 얇은 철망 필터가 고정된  막대기를 손바닥으로 꾸욱 누른다.


“응. 있고말고. 귀여운 도련님.”

아주 작은 철망에 걸린 원두 알갱이는 밑으로 밀려 내려간다. 플런저를 바닥까지 내린 유리컵에는 맑은 커피가 찰랑거린다. 직원은 그것을 미리 따뜻하게 덥혀 둔 찻잔에 옮겨 따랐다.

“손님분을 보니까 떠오르더라고. 오늘 당신이 만나고 왔다는 로저 영감도 젊었을 때 멋진 금발이었다고.”

원두 찌꺼기만 남은 카페티에르 세트를 치운 후. 이국적인 푸른 문양이 그려진 찻잔을 재클린에게 내밀며 직원은 말했다.

“지금처럼 빛바랜 백발이 아니라, 마치 순금을 녹여서 정교하게 한 가닥가닥 실로 뽑아낸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이었지.”

그녀는 주름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조금 머나먼 곳을 향해 있는 듯 보였다. 지금이 아닌 수십 년 전의 과거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거겠지.  시선의 각도가 낮아져서, 코넬리아를 향했다.


“손님분의 머리카락 색도 쏙 빼닮았군. 처음에는 손자가 아닐까 싶었다니까.”
“손자… 아!”

코넬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클레멘트 씨의 아들도 금발이었어?”
“응. 피는  속인다고.”


직원은 자신의 이마 옆으로 내려 드려진 하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그렇긴 해도 아들이 여길 떠난 지는 아직 5, 6년 정도밖에 안 되었지. 손님만  손자가 있을 리가 없기는 해.”
“어린 손자는 있을 수 있겠네.”
“있을 수는 있겠지. 그래도 여기로 돌아오려나?”

그렇게 말하고 직원은 후후 웃었다.

“혼자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공방을 이어받지 않고 아카데미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그때 얼마나 화를 냈었는지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다니까.”
“아카데미, 라면… 바트나 쪽으로 간 건가.”
“잘 아네. 너희들도 남방(南方) 출신이야?”
“그건 아니지만. 수도에서도 꽤 유명하다고, 바트나 정도는.”

톡톡톡.


습관적으로 집게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작게 두드리면서 코넬리아는 턱을 괴었다.

바트나는 레드우드 시보다 좀 더 남쪽에 있는, 바다와 맞닿아 있는 도시다. 코넬리아와 재클린이 온 앨버스가 연합 왕국 전체의 수도라면. 바트나는 지금 왕국으로 통일이 되기 전, 남방 지역의 수도 역할을 맡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고 행정 기능을 떠맡은 수도 역할을 한 만큼, 자연스레 교육 시설도 함께 발달하였다. 전통과 근본이 있는 시설이 다수 있었고 거기엔 고등교육 전문 과정인 아카데미 또한 포함되어 있다.

코넬리아가 제일 먼저 바트나를 입에 올린 건 그럭저럭 근거를 갖춘 판단이었다.


“그런데 왜 공방을 이어받지 않은 거지. 로컬 아카데미는 가기 싫었던 걸까.”


로컬 아카데미는 인구 규모가 작은 도시에서 주로 직업 훈련을 보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학구열을 불태우는 아카데미와는 조금 위치가 다르다.


바트나까지  정도라면 거기에 맞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식의 흐름으로 꺼냈던 코넬리아의 혼잣말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쉽게 답했다.

“로컬에서는 배울 수가 없었을 거야. 제대로  아카데미에나 있으니까, 의학원은.”
“의학원, 그래 의학원….”

고개를 끄덕이던 코넬리아. 놀란 기척을 드러내지 않았다.


‘의학원―이라고 했지.’


지금 이 카페에서, 코넬리아와 재클린이 사용한 예비 신분은 의원과 접점이 없다. 그들은 이 둘이 의원 출신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걸 알려주지 않은 상대방에게서, ‘의원’과 관련된 단어가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빙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아들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의원이 되고 싶었구나.”
“아들이면 아들이지, ‘아들인가 뭔가’는 뭐야.”


의외로 이런 낡은 말장난이 약점이었는지. 여성 직원은 코넬리아의 말을 듣고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말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에도 대판 싸웠다고. 하여간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아서, 성격이 더러운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군. 헤에….”

얼음이 띄워진 우유가 담긴 유리잔을 그저 손끝으로 쓰다듬으면서. 코넬리아는 말했다.

“지금 그 할아버지는 몸이  좋아 보이던데. 안 돌아와도 괜찮으려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소녀의 기억에 떠오르는 모습은, 살짝 피 냄새가 날 정도로 깊고 심한 기침을 힘겹게 토해내던 노인이었다.

그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했는지 “그러게, 그러게.” 하고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마을에서 의원질 하는  목표면 굳이 의학원까지 안 가도 충분했을 건데. 대체 어쩌다가 헛바람이 든 건지~”
“하하….”


코넬리아와 재클린으로서는 다소 거북해질 수 있는 주제다. 그래도, 다행히도,  화제는 직원의 입에 더 오르내리진 않을 모양이었다. ‘이제 더 해 줄 말이 없다’라는 의미로 직원은 어깨를 으쓱하였다.

“어때. 귀여운 도련님? 뭔가 실마리가 보여? ”
“응. 고마워. 어렴풋하게 알 거 같아.”


코넬리아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보냈다.


 직원은 코넬리아가 남자애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클레멘트가 이 아이에게 화를 낸 이유를 ‘소년의 외모가 자기 아들과 쏙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절반은 맞는 생각이었다.

여기서 두 직원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면,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리고 직원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나머지 절반은. 그들에게 전하지 않고, 코넬리아와 재클린 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시간을 너무 끌어서 미안해. 이제 보호자랑 대책 회의를 해야 하니까, 자리를 옮길게.”
“후후, 그렇게 배려해주면 고맙지.”


어찌 보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다고 카페의 명당자리를 너무 오래간 차지 하고 있었다. 눈치껏 부탁하여서, 코넬리아와 재클린은 매장의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기다랗게 줄기를 뻗는 관상식물이 심어진 화분이 놓인 자리다. 주위의 시선에 신경을 쓸 건 없었다.

이게  직원이 둘을 배려했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부담스러운 시선에서 숨기려는 목적인 것 같긴 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 오빠?”
“응. 우리를 보고도 편견을 안 가지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지던데.”

손톱줄을 호주머니에서 꺼낸 코넬리아는 왼손 엄지부터 차례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일부러 매너를 안 지키면서 말했어.”


소녀의 말에 재클린도 뭔가 알고 있는지 “그러게~” 하고 커피를 홀짝였다.


대화를 주고받을 때, 서로를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코넬리아가 짚은 건 그런 상식적인 수준의 매너가 아니었다.


더미 신분을 확인하고 나서도 변함이 없었던 직원의 말투.

“우리가 귀족 신분인 걸 알면서도, 그 이후로도 계속 편하게 말을 했지?”
“심지어 나보고는 귀엽다고까지 말했어. 세 번이나.”

‘심지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한 코넬리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다듬어진 손톱을 후후 불면서, 소녀는 말했다.

“내가 실수를 했어.”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라고는   없는 건방진 자세로, 코넬리아는 반성했다.

“그 영감이 아까  만남부터 ‘의원’에 너무 적대감을 드러내는  봤잖아. 너도.”
“응응.”
“그래서 난 클레멘트가 전이(轉移)했다고 생각했거든.”

소녀의 의견에. 재클린도 납득을 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나 선생, 부모님처럼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과 관련한 감정을―무의식중에―타인에게 비추는 사람이 있다. 그걸 보통 [전이]라고 부른다.

『‘가족을 잃게 만든 의원’을 ‘찾아온 손님’에게 비추어 본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클레멘트는 자신에게 심각한 충격을 심어준 의원을, 재클린에게 비추어 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


키가 땅딸막하고 길거리 뉴스보이 복장을 한 코넬리아와, 키가 훤칠하게 딱 맞는 신사복을 입은 재클린. 둘 중에서 누가 초면부터 의원으로 보일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때에는 이게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적인 답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코넬리아는 클레멘트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의원에게 잃은 거 아니냐’고 물어보았다.


소녀가 의도한 뜻은 ‘목숨을 잃었다’라는 의미였다. 당연한 판단이었다. 의원을 싫어하게 된 수많은 사람의 계기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클레멘트가 받아들인 의미는 조금 달랐다. 아니, 아주 심각하게 달랐다.

“그 좀생이 영감탱이…!”


진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잃어버린 아들이  곳은 천국이 아니다. 다른 도시의 의학원 아카데미였다.

“자기 아들이 의학원으로 들어간  왜 우리 보고 화를 내는 거야?”
“후후, 이해가 안 되는  아니잖아!”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재클린은 테이블 한쪽 편, 설탕 조각이 담긴 함을 열었다. 커다란 설탕 조각을 커피에 넣고 저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오빠도 기억나? 의학원에 들어갈 때 우리도 할아버지 할머니랑 대판 싸웠잖아.”
“아… 응. 그렇긴 했지….”

시원한 우유를 마시면서. 코넬리아는 창가의 햇살에 손톱을 비춰보았다.


클레멘트는, 감히 자신의 직공이라는 자리를 박차고 공방을 떠난 아들의 흔적을 코넬리아와 재클린에게서 찾았다.


‘전이는 나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마음속의 이미지를 상대에게 비춰보는 건 클레멘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빠는 고향 집에는 언제  거야?”
“윽.”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을 노린 기습 공격이었다. 재클린의 무언의 압력이 담긴 눈빛을 코넬리아는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슬슬 눈치를 보면서 피했다.

“다음에 갈게. 응, 다음에 진짜로.”
“전에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반년 동안 한 번도 안 갔잖아.”
“아 진짜, 알았어, 알았어! 수도권으로 돌아갈 때 진짜 가면 되잖아. 누가 무서워서 못 가는 줄 알아? 어?”
“응. 무서워서 못 가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야?”
“맞아.”


변명은 필요하지 않다. 코넬리아의 손에 쥔 아이스 밀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걸 그대로 쭉 들이켰다.

얼음만 남은 잔을 내려놓은 소녀는 “캬아~” 하고 아저씨 같은 감탄을 내뱉었다.

“오빠로서 동생에게 감히 잔소리하고 싶진 않아. 그러나 사랑하는 우리 동생에게 한 가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주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소녀의 얼굴에는 입가 주변으로 둥그렇게 하얀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때는, 고민으로 해결이 되는 문제가 아니야!”
“그거… 적당히 지어낸 거 맞지?”
“아니거든? 완전 옛날부터 입으로 꺼내고 싶은 명대사 2위에 있는 말이거든?”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딱히 코넬리아 또한 자신의 헛소리 아닌 헛소리가 얼마나 진실하였는지 증명할 생각은 없었다.

즉, 헛소리였다.

헛소리는 이 정도로 하고. 코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였다.

“다시 찾아가 보자. 동생. 클레멘트 씨의 공방으로 돌아가는 거야.”
“지금 가 봤자 바로 퇴짜를 맞는 거 아닐까?”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을 거야, 동생.”

코넬리아는 입가에 묻은 우유를 손등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나조차도 나 자신이 기대되는군. 지금부터 진심으로 부탁하러 갈 거니까, 동생도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보기 드문 ‘진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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