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2막 (上) 어린 애라고 안 봐준다고 - 5
“그, 그럼 이거 하나 사갈까.”
코넬리아가 손을 내밀자, 재클린은 소녀의 소지품이었던 동전 지갑을 건네주었다. 지갑과 함께 참견도 끼워서.
“매번 이러면서 짐을 늘리니까 가방이 무거워지는 거야.”
“별로 안 무겁거든. 이런 얇은 거 하나 정도로는.”
손톱만큼의 설득력도 없는 말이란 건 다른 누구보다도 코넬리아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기에. 재클린은 굳이 잔소리를 덧붙이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러면 이제 기계 공방이 있는 데로 갈까?”
앞으로의 계획이란 건 원래는 할 말이 없을 때 무책임하게 꺼낼 수 있는 편리한 도구 중 하나다. 쉽게 꺼낼 수 있는 화제이긴 해도, 답변하는 입장에서는 적잖이 신경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은 숙소부터 정해야지. 음, 그다음에….”
코넬리아는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선택지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였다. 말을 바로 잇지 못하고, 작은 양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소녀.
“헤에… 오빠가 뭔가 망설이고 있는 건 오랜만이네.”
“그런가?”
코넬리아는 평소보다 좀 더 빠르게 두근대는 가슴 위에 오른손을 얹었다.
“앞으로 정말 중요한 걸 얻어야 하니까, 긴장되는 거 같네.”
“그렇지. 앞으로가 중요하지.”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색이 바랜 포장지로 감싼 약전을 쥐고. 로비 층으로 온 둘은 보관된 짐을 되찾고,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우선 적당하게 백화점 근처에 있는 호텔에 묵기로 하자.
그런 생각으로 코넬리아는 지금 있는 곳에서 제일 가까우면서도 시야가 트여 있는 호텔로 향했다.
경의사 신분을 증명하는 기어카드를 쓰면, 정부의 돈으로 호화롭게 묵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즉 ‘경의사가 레드우드에 왔다’라는 걸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랬다가는 꼼짝 못 하고 협회 지부로 가서 업무를 수행하여야 하리라.
“경의사면서 업무를 피하면 안 되는 거잖아.”
“허어, 큰일 날 소리.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달라진단다, 동생아.”
코넬리아는 구두를 신은 채 침대에 걸터앉아서, 재클린이 옷을 갈아입기를 기다리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업무를 피하는 게 아니야. 상황 변동에 대응하는 직분(職分)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재정렬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는 말장난을 뭐하러 해~”
가볍게 웃으면서 코넬리아의 등 뒤에서 드레스를 벗는 재클린. 그 대신에 자신의 체형에 어울리는 세미 정장 옷을 입는다. 가슴 부위도 최대한 부피가 덜 드러나도록 수를 썼는지, 전보다는 부피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구태여 성별을 철저히 숨길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여차하면 공방에서 관심을 끌기 십상인 여성스러운 옷은 최대한 피하자는 게 코넬리아의 판단이었다.
“뒤돌아보면 안 돼, 오빠!”
“보라고 해도 안 볼 거야….”
영혼이 담기지 않은 대답을 하면서.
코넬리아는 포켓용 여행지도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말이 좋아서 ‘포켓용’이지, 이미 접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한 여행지도는 주머니에서 꺼내는 순간 아코디언처럼 부풀어 올랐다.
거기서, 소녀는 미리 서류용 클립으로 고정해둔 페이지를 열었다.
레드우드 시 전역을 그려낸 지도. 거기에서 색연필로 점선을 그려 표시한 구역은, 인위적으로 꾸며낸 지형처럼 살짝 일그러진 원형.
지금 자신들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과 백화점을 포함한 시가지에서도 제법 먼 서쪽으로 떨어져 있었다. 연관 페이지에 갈무리가 된 이동 수단 정보를 훑어보면서 코넬리아는 말했다.
“아 이런, 이거 참. 서둘러서 가야겠는데.”
“무슨 일이야, 오빠?”
어느 사이엔가 옷을 갈아입은 재클린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일치가 된 복장. 재킷 아래의 조끼와, 통이 좁은 기다란 바지가 기막힐 정도로 어울렸다. 실내라서 지금은 벗고 있는 펠트 중절모의 빈자리가 아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 감상은 마음 아래로 숨겨 두고.
“공방지대로 가는 열차가 자주 있기는 한데, 문제는 막차가 생각보다 일찍 끊기네. 일몰과 동시에 운행 중단이라고 하는데.”
“어라 어라… 지금 거기 가더라도, 금방 내려와야 한다는 거잖아.”
오가는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공방지대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두세 시간 남짓이 한계일 것이었다. 그걸 고려하던 재클린이 뭔가 이상한지 코넬리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열차가 자주 없으면, 그냥 마차로 오면 되는 거 아니야? 사람 사는 곳에 마차가 안 통할 리가 없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여기 설명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
미리 레드우드 지역에 대하여 정보를 조사한 코넬리아라고 해도 재클린보다 아주 조금 더 지식이 있을 뿐. 그것도 대부분은 여행용 안내서의 지식이었다.
“‘직접 방문하여 보면 어째서 열차 시간표에 구애받는 건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네. 이 안내서는.”
“그거 좀 무책임한 설명이네.”
재클린의 지적이 맞다. 코넬리아는 동생의 의견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보면 알 수 있다’는 설명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호텔 앞 이륜 마차를 타고 곧바로 도착한 공방지대 열차역.
산간 지형 특유의 언덕 투성이의 거리에는 익숙해질 법도 했다. 아주 커다란 파도가 그대로 얼어붙고, 파도의 얼음 위에 집을 짓고 살면 지금, 이 레드우드 시가지처럼 되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코넬리아조차, 선반 형태의 거대한 침식 언덕—메사(mesa) 지형 앞에서는 원근감이 이상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우와. 밑에서 보니까 진짜 크다아~”
마차에서 내린 재클린이 두 팔을 활짝 벌려 외쳤다.
“이렇게 커어어어-다란 구릉 위에 공방이 모여 있는 거야?”
“그러게. 올라가기 전까지는 못 믿겠는걸.”
거대한 언덕은 마치 둥그런 스펀지케이크처럼 생겼다. 윗면은 평탄한 원형, 그 둘레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가 세워져 있다.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마치 높디높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모양새는 주변의 뾰족한 모서리가 두드러지는 산간 지형과는 조금 조화를 깨는 모양새였다.
언덕 아래에 위치한 [레드우드 서구 공방지대 운행 치상궤도]라는 낡은 간판이 붙은 간이역에는,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1300시 출발 열차 대기 중입니다—! 검표 후 차례대로 탑승합니다—!”
직원들의 고함이 가느다란 잡음으로 들릴 정도로 역사는 북적이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역사라고 하는 것이지, 단순히 열차가 세워진 플랫폼에 기둥과 비를 막는 지붕을 세워두었을 뿐이었다.
훤하게 드러나 보이는 플랫폼에는 이미 승객들로 꽉 채워진 톱니 기관차가 있었다.
톱니궤도(齒狀軌道)로 운행하는 톱니 기관차는, 제법 가파른 경사를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무쇠 톱니를 다중 축으로 맞물리는 구조다. 동력이 증기기관인 건 여타 기관차와 같았지만, 보통 볼 수 있는 증기기관차의 선두 차량과는 조금 다르게 생겼었다.
“아, 좋다. 개발도시 완전 좋아…!”
초롱초롱한 눈동자인 코넬리아는 좀 전의 백화점에서 자동계단, ‘에스컬레이터’라 불리는 장치를 봤을 때의 그 감정선이었다.
톱니 기관차는 가파른 경사로 차량이 기울어지더라도 증기기관이 계속 작동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로 마치 첨탑 꼭대기에 내걸린 종처럼, 윗부분만 세워서 고정하고 아래는 흔들흔들 움직일 수 있는 구조가 발명되었다.
이름하여 「수직 보일러」.
“이제 우리가 저걸 탄다는 거지. 나는 1번 차량에 탈 거야!”
그 주위를 구경하느라 코넬리아는 정신이 없었다.
모든 소년이 기계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모든 소녀가 기계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영혼이 있는 사람이라면, 증기기관차의 구동 바퀴가 힘차게, 느릿하게, 회전하기 시작하는 걸 보면 짜릿한 기분이 들 것이다.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코넬리아는 튼튼하고 육중한 기계 장치를 보면 가슴 한쪽이 설레기 시작한다. 그렇게 완전히 정신이 팔렸던 사이에.
“오빠.”
재클린이 살짝 고민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벌써 우리 앞에 온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래도 다음 기차를 타야 할 거 같아.”
“그래? 아, 너무 시간이 애매한데….”
그렇게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자니.
코넬리아의 시야에 문득 누군가가 들어왔다. 자신들처럼 대기열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한눈에 보더라도 수상한 제안을 하는 거로 보이는 호객꾼이다.
햇빛에 보기 좋게 잘 탄 것처럼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일부러 헐겁게 채운 상의 단추 사이로 보이는 쇄골의 깊이가 예사롭지 않은 청년.
태어날 때부터 곱슬머리이었을 흑발 앞머리가 이마를 가로막고 있다. 그 뒤로 가려진 짙고 도드라진 눈썹 아래로, 우물처럼 깊숙이 들어간 하늘색 눈동자가 사방으로 굴리면서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드디어 코넬리아 쪽으로 향했다.
“아가씨. 급하시면 ‘열기구’를 쓰는 게 어떠신지요?”
‘우와~ 완전 느끼한데.’
호객꾼의 말투에는 바다 건너 공화국의 말투가 배여 있었다. 발음이 둥글고 그 끝발음이 혓바닥 끝에 달라붙어서 끈적하게 떨어지는 뉘앙스. 그 말이 향하고 있는 건 코넬리아가 아니었다.
“열기구. 좋은 아이디어네요.”
재클린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호객꾼 뒤에서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다른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왜 거절했나요?”
“사람 사이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오로지 돈 아니겠습니까.”
“다행입니다. 저희와는 원만한 거래를 하겠군요.”
호객꾼의 제안을, 재클린은 코넬리아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런 재클린을 보며 호객꾼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호구 하나 낚았군. 큭큭.’
호객꾼은 둘 중에서 나이가 더 연상으로 보이는 재클린에게 집중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럼 아가씨, 저를 따라오시길 바랍니다. 발밑의 길이 험하니 조심하시고.”
“감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그렇게 손님을 데리고 열기구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호객꾼은 얼마나 이 둘을 뜯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딱 봐도 돈 꽤나 있어 보이는데 세 배는 받을까…. 아니지, 이 여자는 딱 내 타입이니까, 양심껏 두 배 정도만 받을까?’
이미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가지 각을 세우는 청년의 앞서가는 어깨를, 재클린은 톡톡 두드렸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모겐스라고 불러주시죠. 레이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면서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는 청년 호객꾼, 모겐스는 웃었다.
“실례지만 아가씨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열기구라는 이 훌륭한 운송 수단을 왜 시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몰래 외딴곳으로 가서나 사용할 수 있고,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묵인하고 있는 거지요? 왜죠?”
“그, 그러게 말입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기만큼 키가 커다란 여자 손님은 완전히 대화의 흐름을 무시하는 말을 꺼내고 있었다.
“질문이 좀 늦은 거 같네요. 탑승 비용은 얼마인가요, 모겐스 씨?”
“한 사람당 오백 링입니다요.”
“오백 링이라니—”
코넬리아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재클린은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서 말렸다.
“모겐스 씨. 저희가 공방지대에서 내려올 때도 이 열기구를 쓰고 싶은데,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아하하~ 저희도 이걸 공짜로 하는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정 그러시다면 좀 더 팁을 주셔야죠. 아가씨?”
모겐스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산을 최대한 끌어내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 울려 나오는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 조각상처럼 벌어진 어깨,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그윽함이 한 숟갈은 뿌려지는 눈빛까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성을 홀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믿고 있었고, 약간의 나르시시즘을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와 말을 섞으면서 재클린은 빙긋 웃었다.
“이미 두 배는 받으셨잖아요. 모겐스 씨.”
“네, 네에?”
“알면서도 속아주는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다른 동종업자에게 놓치고 싶으신가요? 이런 일 하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아가씨. 한 번 만난 인연을 잃어버리는 건 슬픈 경험이죠.”
맞장구를 치는 겉으로는 미소를 짓지만.
‘어이구, 어디서 주워들으신 건 있으셔서…. 키만 짜증이 나게 큰 여자 주제에 싫으면 다른 데로 가시든가….’
속으로는 험담을 내뱉으면서, 모겐스는 선심 쓰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팁은 아가씨의 아름다운 외모로 하겠습니다. 두 명 왕복으로 이천 링.”
“고마워요.”
재클린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동생을 코넬리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